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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로 가는 길

동유럽 일기 - 2

by 지노그림


피곤해서 늦잠을 잘만도 한데, 이놈의 시차는 예외가 없다. 새벽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 돌아다니고 있다. 10시쯤 역사지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마트에 가서 장도 조금 더 보고 점심식사 후 이동할 계획이다. 시간이 되자 지금사진, 지마음 모두 슬금슬금 일어나서 아침수다와 음악을 함께 하고 있다. 아침은 어제 사두었던 빵과 커피 한잔으로 해결.


12시까지 차를 숙소에 두고 다녀오기로 했다. 다른 것들은 저렴한데 이상하게 주차비는 저렴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숙소에서 도보로 겨우 5분 거리의 역사지구 초입의 광장에서는 클래식카 전시회를 하고 있다. 지마음이 오늘 새벽 폭주족의 오토바이 소음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이 클래식카들이 범인인 듯하다. 시동을 걸었는데, 그 굉음이 딱 폭주족들의 그것과 닮았다.


어제 펍에서 봤던 HELLS ANGELS 떡대 형님들이 등장한다. 심심한 이곳에 갈 곳이라곤 이곳 역사지구밖에 없으니 만나는 게 당연하다. 이쪽으로 돌다 보면 형님들, 저쪽으로 가면 또 그 형님들. 아무튼 계속 스쳐 지나간다. 이 정도로 만났으면 아는 척을 해볼 만도 한데, 이 형님들 말 걸기에는 몹시 부담이 되는 행색들이시다.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가보았더니, 하수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동상이다. ‘이 동상이 왜 유명한 거지?’ 심심한 도시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쳐다보고 있는 듯한 동상을 보고 있자니, ‘어라, 이 녀석 바로 브라티슬라바랑 닮았잖아’라는 생각이 든다.



지마음과 지금사진은 느긋한 이 동네가 마음에 든다고 에어비앤비나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다. 광장 돌아보고, 성당 돌아보고, 구시청사 건물 돌아보고, 유대인 지구 골목길 돌아보니 끝. 도시의 역사를 모르니깐 그냥 건물과 골목과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역사지구 관광종료. 공부를 좀 하고 올 걸 그랬나.


생각보다 일찍 끝난 역사지구 탐방에 계획을 변경하여 브런치로 점심을 해결하고 12시에 체크아웃을 하기로 한다. 주문한 잉글리스 블랙퍼스트와 샐러드의 양이 부담이 될 정도로 많다. 브런치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옥의 천사님’들이 두 번씩 왔다 가셨다.



식사 후 배가 불러도 젤라또 한 개의 유혹은 참을 수 없지. 젤라또 하나씩을 손에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셀프체크아웃.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지금사진. 숙소키까지 완벽하게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온다. 나중에 집주인이 숙소키 어디에 두었냐며 연락이 왔다. 보통 그냥 식탁에 던져두고 가는가 보다. 우리처럼 원래 있던 키박스 속에까지 일부러 두고 오는 사람들은 없었나 보다.


마트에 가서 와인 몇 병과 가스가 없는 물(어제 산 물은 모두 가스가 있다)을 몇 병 더 사고, 마침 맛있어 보이는 과일도 보이길래 몇 개 사고...어쩌나 자꾸 짐이 늘고 있다. 지나가는 아이들은 예쁘고 하나도 바쁠 것이 없는 토요일 오전.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마실 곳이 없다. 카페인 절대량을 채워야 하는 작가들인지라 기어코 문을 연 카페를 찾아내서 카페인을 채운 후 출발한다.


유럽에는 비넷(Bignette)을 사용하는 국가들이 제법 많다. 통행료를 건마다 내는 대신 10일 치, 한 달 치 또는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내고 그 기간 동안 고속도로를 무제한 이용하는 방식이다. 비넷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국경에서 비넷을 충전하고 다녀야 한다. 만약 적발시 무시무시한 벌금을 내야 한다.


헝가리 국경에서 비넷을 사야 한다. 트럭을 따라가다 길을 잘 못 들었다. 대충 주차하고 비넷 사무실에 가니, 옐로페이퍼(?)를 가져와야 한다고 한다. 다시 차로 돌아와서 렌터카 회사에서 준 서류뭉치를 원하는가 싶어 가져가니 이게 아니란다. 옐로페이퍼가 뭔지 설명을 하는 것을 들어보니 차량등록증 같은 거란다. 에잇. 다시 차로 가서 차량등록증을 찾으니 ‘엥, 노란색이네’.


슬로바키아에서는 차량도 확인 안 하고 차키에 붙어있던 차량번호만으로 비넷 등록을 해주었는데, 헝가리는 제법 깐깐하게 군다. 현금밖에 안 된다며 ‘쏘리’하며 미소를 보내는데 이상하게 밉지 않다. 20유로 주었더니 몇 센트 거슬러준다. 납입했다는 서류한 장 잘 챙겨서 헝가리 입국.


막힐 길이 아닌 것 같은데 길이 막힌다. 도로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다. 확실히 헝가리는 말을 타기 좋은 나라였겠다는 느낌이다. 공사를 하면서 차선 하나를 줄여 놓은 게 차량정체의 원인이었다. 정작 공사차량은커녕 작업인부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주말이라서 그냥 그대로 두고 퇴근을 했나 보군’이라고 우리끼리 짐작을 했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느긋하고 두 번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주말에 공사를 하지 않는다면(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일단 공사차단을 풀었다가 다시 공사시작 전에 설치할 텐데 이곳 사람들은 ‘뭐 하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조금 불편한 것은 그냥 참는 게 이곳에서는 미덕일지 모른다. 서로 조금씩 불편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삶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언제라도 내가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공동체의 삶이란 이렇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누군가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요즘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새벽배송, 총알배송 이런 단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확실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국내 거주 외국인들까지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런 것들이 때문에 한국이 좋다고 떠벌이는 것을 볼 때 ‘이것들이, 우리를 은근하게 멕이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한다.


부다페스트에 도착. 숙소로 가는 길이 공사 중이라 막혀있다. 뜻밖에 역사지구 내부를 지나가게 되었다. 브라티슬라바와 비교가 되지 않는 멋진 도시풍경에 홀딱 반해버린 우리는 광속으로 브라티슬라바를 손절한다. 미안, 브라티슬라바.


원래 계획은 유람선에서 야경을 보는 것으로 계획했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싫고 줄 서는 것도 귀찮아져서 어부의 요새에서 야경을 보기로 했다. 관광지 입구의 무료주차장. 지금사진과 지마음은 이런 거 잘 찾는다. 계단대신 엘리베이터도 잘 찾는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지금 먹어야 소화시킨 후 숙소에 가서 또 먹을 수 있다는 지금사진의 논리에 따라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하기로. 슈니첼이 지마음 얼굴만 하다. 양이 우울할 정도로 많다. 결국 남겼다.


식당 앞 기마동상에 기어이 올라가서 말의 중요부위를 만지고 내려오는 여자들이 있다. 하도 만져서 반짝반짝한다. ‘왜 만지는 거지’ 알 수가 없다. 내일 만날 가이드에게 물어봐야겠다. 잠깐 돌아본 부다페스트지만 확실히 이 동네 사람들은 동상을 참 좋아한다는 느낌이다.


어부의 요새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행사를 하고 있다. 지마음 말로는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도는 행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찬송과 기도를 끝내고 돌기 시작한다. 우리는 노을이 잘 보일만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노을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고 추워도 너무 춥다. 유월날씨가 이러기냐.


야경을 잘 볼 구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짐을 챙기는 사이, 신자들이 한 바퀴 돌고 왔다. 다시 찬송과 기도 시작.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일곱 바퀴 돌기전에 다 없어지겠다.


지금사진이 물색해 놓은 장소는 바로 국회의사당 맞은편 도로이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지금사진은 장비를 챙겨 출동. 추운 지마음과 나는 차 안에서 그냥 따뜻한 차 안에서 야간조명이 들어올 때만 기다리고 있다. 이곳이 확실히 포인트이긴 한가 보다.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관광객들을 쏟아내고 있다.


10분 구경 후 다시 차로 돌아왔다. 으으 추워. 지금사진은 도로에 주차된 차량이 시야에 방해가 된다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내려간 거지. 길이 안 보이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도로 끝까지 가면 계단이

있단다. 마음껏 촬영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차 안에서 계속 휴식모드로.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들린다. 불꽃놀이닷! 산책 마치고 돌아가던 아주머니도 다시 돌아온다. 매일 있는 불꽃놀이가 아닌가 보다.


방전된 체력으로 숙소에 돌아와서는 뭘 더 먹으려 하지 않는다. 내일 계획은 2시간 오전워킹투어, 시장구경, 돌아와서 막걸리 만들기. 이틀 동안 잘 숙성시켜 자그레브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자그레브에서는 비까지 예정되어 있어서 감자전도 야무지게 부쳐 먹기로 했다. 비 오는 날엔 역시 막걸리와 전 아니겠는가.


<그리다 만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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