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 에펠탑과 콩코르드 광장
2010년 12월 5일(일) 흐림
터어키 일정을 끝내고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빠리로 새처럼 날아들었다. 이제 여행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5일간의 일정으로 빠리 시내만 몇 군데 돌아보고 북유럽의 섬나라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터어키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빠리로 향하는 뱅기 코스가 알프스 산맥을 지나가는지 흰 눈을 흠뻑 덮어쓴 설산들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뱅기가 빠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기수를 내리는 동안 공항 근처에 따닥따닥 붙어있는 주거지를 잽싸게 한 컷 건졌다.
빠리 5일간은 한인 민박집에 배낭을 풀었다. 복잡한 낯선 대도시에서 유용한 여행정보를 얻는 것이 한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제일 나을 것 같아 그렇게 정했다. 주인장은 대중교통편으로 버스보다 지하철을 권유했다. 지하철 승차권도 1회용으로 사지 말고 3-4일 통합권으로 하면 편리하고 싸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도시, 모르는 지하철 시스템과 거의 까막눈인 불어 앞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어 주인장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빠리 에펠탑
샤요 궁 쪽에서 잡은 멋진 에펠탑 사진은 내가 잡은 게 아니고 내 여행 가이드책에서 발췌하였다. 많은 에펠탑 사진을 보았지만 이게 최고의 작품인 것 같다. 사진 포인트를 잘 숙지했다가 다음번에는 나도 한번 잡아 보리라.
에펠탑(Tour Eiffel 투르 레펠)은 프랑스 빠리 마르스 광장에 위치한 격자형 철골 타워이다. 1889년에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빠리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박람회를 상징할만한 기념물로 에펠탑을 건축하였다. 박람회가 열린 마르스 광장 출입 관문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에펠탑은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빠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이 탑은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의 작품으로 이를 디자인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1889년 3월 31일 준공해 1889년 5월 6일에 개장했다.
빠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며 동시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근대 건축의 혁신점으로 1889년에 300m라는 경이로운 높이를 달성하여 미국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인 1930년 이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에펠탑이 완성되어 개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특기를 선보이며 에펠탑을 더욱더 유명하게 만들어 갔다. 산악 등산가들은 절벽을 타듯이 탑을 등산하여 탑꼭대기에 올랐고, 공중 곡예사(Trapeze)들은 탑 정상에서 묘기를 선보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Birdman이라고 자칭하는 Reichelt라는 빠리장은 낙하산도 아닌 변형시킨 날개용 망토(cape for wings)를 입고 탑 정상에서 점프하여 새처럼 날면서 지상으로 내려오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죽게 되었다. 죽은 후 검시를 해보니 지상에 발을 대기도 전에 심방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상 그라운드에서 샤요궁 쪽으로 바라본 풍경
지상 그라운드에서 마르스 광장 쪽으로 바라본 풍경
날씨가 흐려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이 에콜 밀리테르(École Militaire)로 1751년 루이 15세가 설립한 프랑스 파리 7구의 역사적인 고등 군사 교육 기관이다. 에펠탑 근처 마르스 광장에 위치하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졸업한 학교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현재도 군사 학교로 사용되며, 우아한 건물은 역사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이 에콜 밀리테르를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라고 하는데 우리의 육군사관학교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에펠탑 견학 온 빠리 초등학생들
탑의 밑둥 부분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에펠은 이 탑 건설의 공로로 188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Le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받았다. 레지옹 도뢰르(Legion d'honneur)는 명예의 군단이란 뜻으로 1802년 나폴레옹이 제정한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국가 훈장이다.
에펠탑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샤요 궁전
샤요궁(Palais de Chaillot)은 프랑스 빠리 16구 트로카데로 지구의 샤요 언덕에 있는 건물이다.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졌다. 두 날개 건물 사이에는 인권 광장이 있으며 건물 앞쪽에는 트로카데로 정원과 바르샤바 분수대가 있다. 건물 명칭만 궁전이지 루브르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그런 것은 아니다.
2015년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트로카데로 정원 전경
트로카데로 궁을 배경으로 잡은 트로카데로 분수 모습
저 멀쩡한 궁을 만국박람회 한다고 부숴버리고 그 자리에 현재의 샤요 궁을 세웠다. 트로카데로 분수는 1878년 설치되어 1935년 트로카데로 궁을 허물 때까지 근 57년간 빠리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샤요 궁을 배경으로 한 바르샤바(Warsaw) 분수로 분수대 이름이 왜 폴란드 수도 이름으로 했을까?
<사요 궁의 사요란 이름이 궁금>
Chaillot는 주로 프랑스어권의 성(Last name)으로 사용되며, 고유명사이므로 특별한 한국어 뜻으로 번역되지 않고 샤요 또는 샤이요로 발음된다. 궁(palace)이라 해서 그런 궁전이 아니고 그냥 명명된 이름뿐이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샹드마르스 공원
에펠탑을 중간에 놓고 샤요궁과 마르스 공원이 일직선으로 연결된다. 날씨가 흐려서 마르스 공원 훨씬 밑에 있는
것들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선명한 사진을 퍼왔다.
엄청 선명한 샹드마르스 광장의 사진이다.
탑 정상에 가면 저렇게 각 나라별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평양보다 부산이 더 먼 이유는 프랑스 파리의 위도가 평양, 부산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에펠탑에만 올라가보고 북쪽 샤요궁과 남쪽 샹드마르스 광장 끝에 붙어 있는 에콜 밀리테르(육군사관학교)는 구경도 못하고 허접한 사진만 몇 장 챙기고 에펠탑을 떠났다. 시간이 아쉬울 뿐이다. 다음에 여기를 구경 갈 사람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샤요 궁에서 에콜 밀리테르까지 걸어서 가 보는 것도 평생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프랑스 빠리의 광장으로 샹젤리제 거리 동쪽에 튈르리 공원과 사이에 위치한다. 면적은 약 20 에이크로 빠리 중심지에 위치한 광장 중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동시에 유럽에서는 매우 의미 있고 역사적인 장소이다.
프랑스 독립 기념일인 7월 14일에는 매년 샹젤리제 거리 아래쪽으로 거국적인 군사 퍼레이드 축제 행렬이 이어지는 곳이며, 1989년에는 바스티유 데이(1789년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기념하는 날) 2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방문한 방문객들이 이 광장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가지기도 하였다.
콩코르드 광장 입구
1755년 조성된 이 광장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기마상은 철거되고
대신 단두대(gillotine)가 설치되어 혁명 기간 중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광장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변경되었다가 1795년부터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불리어 오다가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이다.
* 1830년 7월 프랑스혁명(영광의 3일)은 샤를 10세의 전제 정치와 언론 탄압에 반발하여 파리 시민들이 주도한 봉기이다. 이 혁명의 결과로 부르봉 왕가가 축출되고 루이 필리프가 시민의 왕으로 추대되어 입헌군주제가 시행되면서 유럽 내 여러 나라의 자유주의 운동을 고무시켰다.
1792년 10월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를 활용한 처형이 처음 집행되었다. 2년 반동안 여기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된 사람은 1,119 명으로 그중에 유명 인물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빵이 없으면 케이크라도 먹지••• 그런 골 빈 소리한 멍청한 여자) 그리고 로베스피에르가 있다. 콩코르드 광장 최후의 처형식은 1795년 5월 있었던 프레리알 폭동 주동자들의 처형식으로 이때부터 단두대가 광장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콩코르드 광장의 주요 역사적인 행사 및 사건들
1763년 루이 15세 광장 헌정식으로 루이 15세 기마 동상을 세워 기념하였다. 그 이후로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73년 뒤 1836년에 프랑스 혁명기에 파괴되었던 루이 15세 기마상의 받침대 바로 위에 이집트 룩소에서 가져온 룩소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1793년 1월 21일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벌어진 루이 16세의 처형식
1793년 10월 31일 지롱드 파의 처형식
* 지롱드 파: 프랑스혁명 중 프랑스 정치 파벌의 하나로
일종의 혁명 온건파로 분류된다. 급진 좌익파인 몽테뉴 파에 대립되는 정파로 지롱드 파의 경제적 및 군사적 실정으로 인해 의회의 주도권이 몽테뉴 파 쪽으로 넘어가자 이를 만회하고자 봉기를 결의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몽테뉴파를 배제하려고 했지만 지롱드 파의 주요 멤버가 잡혀 처형당해(위 그림) 실각하였다. 로베스피에르도 여기 지롱드 파 멤버이다.
1829년의 평화로운 콩코르드 광장 모습
1836년 10월 25일 룩소르 오벨리스크 직립식
1836년 광장에 두 개의 화려한 콩코르드 분수를 세웠는데 높이는 9m이며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 있는 분수를 본떠 만들었다.
1840년 준공된 〈강의 분수〉
<강의 분수〉의 하단부 조각상
야간 조명이 켜진 분수
1872년의 콩코르드 광장 모습
1900년 만국 박람회의 입구로 사용된 콩코르드 광장으로 오른쪽 끝에 지붕만 보이는 건물이 박람회에 맞추어 준공한 그랑 빨래(Grand Palais) 전시관이다.
1934년 프랑스 의회 부패 항의 시위 과정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11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41년 광장에 배치된 나치 독일군의 탱크와 군대
1944년 8월 파리 해방을 축하하는 군중들의 모습
2024년 하계 올림픽 당시 설치된 스케이트보드 가설경기장의 모습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이 사이좋게 서있다. 연령으로 비교해 보면 3200년 살 먹은 큰 어른과 겨우 216년 된 햇병아리가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저기 서서 자태를 뽐내는 오벨리스크는 루이필리프 1세 재임 시절에 이집트로부터 선물 받은 것인데 거의 강탈해 온 것과 진배가 없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 오벨리스크(일명 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세워져 있다. 람세스 2세 재위 시기였던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200년이나 오래된 오벨리스크의 원래 주인은 이집트 것으로 고대 이집트 중왕조 시대의 수도였던 룩소르 (Luxor)에 있었던 고대 유물이었다. 1831년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인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룩소르 신전 앞에 좌우로 서있는 오벨리스크 두 개를 선물하겠다고 했는데 상태가 조금 양호한 오른쪽 것만 가져왔다고 한다. 명백한 문화재 약탈 행위라 볼 수 있다.
오벨리스크 하단에 금박으로 묘사된 1836년 당시 이송 및 설치 과정을 그려 넣었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
룩소르 오벨리스크의 받침대를 비롯한 높이는 총 23m, 무게는 250톤에 달한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기원전 6세기경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소실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진짜로 룩소르에서 뚱쳐(훔쳐) 왔는지 확인해 보려고
<49일의 세계일주> 배낭여행 시 2010년 11월 카이로를 거쳐 기차로 룩소르에 달려갔다. 신전 앞에 가보이, 람세스 2세의 좌상 앞에 오벨리스크가 이빨 빠진 뭐처럼 볼품없이 하나만 달랑 서 있었다. 차라리 뚱쳐가려면 균형이나 맞추게 2개 다 가지고 가던지. 준 넘이나 그걸 덥석 받아가는 넘이나 그 나물에 그 밥으로 같은 비빔밥이다.
수세기 동안의 굴곡 어린 아픈 역사의 점철로 이어진 콩코르드 광장에도 어김없이 노을은 찾아온다. 그런 아픈 역사를 화합하여 이를 극복해 보자는 의미에서 명명한 화합의 광장(Concorde)에서 지난날의 영광과 아픔을 되새겨보는 것도 긍정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J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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