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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ho Yoo Jan 14. 2023

‘좋은 불평등’이 알려주는 점, 그리고 놓친 점

경제학책 리뷰 오래간만에 합니다

결론

너무 깁니다, 짧게 가시지요.   

통쾌한 저술, 연구자의 자세는 100점 만점에 만점

우리나라의 불평등에 대한 바른 진단이 돋보인다

그런데 좀 빈구석 (쿠즈네츠 곡선, 낙수효과, 교육개혁등)이 있다


들어가기

이른바 진보개혁 경제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마치 마키아밸리 보듯 보는 책이 나왔습니다. 바로 최병천-좋은 불평등입니다. 사실 진보경제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 제일 써서는 안 되는 말이 ‘불평등이 좋다’입니다. 대부분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문제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진보적인 경제학을 받아들이고 기존 경제학적 관점들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불평등이란 ‘금기의 언어’였습니다.

저자는 이 금기의 언어를 들고 와서 이른바 한국의 진보경제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식’을 깹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한국경제의 불평등의 시점은 1997년부터다.

원인은 3대 적폐(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때문이다.

해법은 3대 적폐를 타도해야 한다.

이 책임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민주정부 10년 + 보수정부 10년의 잘못이다.

불평등은 무조건 경제성장에 해롭다.

이를 분석할 때는 국내적 요인만 분석한다.


이 6가지 상식을 저자는 아주 낱낱이 파괴합니다.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고 통쾌했습니다. 책 내용 자체는 뭐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테니, 저는 제가 생각하는 부분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책 요약은 딴 데 보세요.


잘 한점

왜 통쾌했을까요? 그것은 한국 지식인들의 ‘지루함’을 깨어 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한국 지식인들은 지루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너무나 두려워하고, 실질적인 데이터를 모으거나 분석하지도 못하고, 선배들의 생각을 함부로 반대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짜증 나는 건, 외국의 문제를 외국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거나 한국의 문제를 외국의 방법론으로 접근합니다. 문제 자체가 다른 나라의 문제를 풀던 방법을 가지고 한국의 문제를 접근하려면 문제가 쉽게 풀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지식인이 한국의 문제를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업을 좋아합니다. 최병천 씨의 접근은 이런 점에서 아주 아주 신선했습니다.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비판하지 않으면 악습이 그대로 갈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자는 이 사실들을 이렇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의 불평등의 시점은 1997년부터다. ⇒ 1994년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

1992년 1~2월 중국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서, 중국이 개방되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이른바 한국의 중숙련 저 숙련 중국으로 넘어가버렸다.

고용이 날아가버리니, 소득이 없고 이것이 불평등의 시작이다.


쉽게 말해서, 가장 많은 자리를 가지고 있던 기업들이 중국으로 가버리니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소득이 감소하고 격차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불평등의 시작입니다.


즉 저부가가치 산업(도소매, 음식, 숙박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고 자영업자 비율이 30%대에 육박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최저임금을 만원 가량 올려버리면 이 사람들이 그 부담을 모조리 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으로 저임금 + 불안정 고용 + 짧은 근속기간 노동을 장려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불평등의 가장 거대한 축 : 비노동 ‘노인’

저자는 또 한국적 현실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비노동(노동하지 않는/못하는) 계급인 노인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1930~40년대에 태어나 학교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비롯한 온갖 위기 속에서 겨우 겨우 생존해 오신 분들입니다.


저자는 이 노인인구가 제일 큰 빈곤집단이기에, 노인빈곤을 줄여야 전체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평균적으로 소비성향이 가장 높은 집단이기에 수요가 늘어나는 경제성장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소득주도 성장에서 2019년 노인주도 성장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불균형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노인’을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저자는 취업자 빈곤율과 취업자가 있는 가구 빈곤율, 그리고 취업자 없는 가구 빈곤율을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취업자 없는 가구 빈곤율’이 45% 이상으로 나왔습니다. 2011년에는 65.6%였습니다. 그럼 누가 취업자 없는 가구일까요? 바로 노인입니다. 저자는 이 노인을 ‘계급’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바른 진단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내용을 주장하는데 제일 중요한 통계가 그 유명한 윤희숙 의원이 쓴 KDI보고서입니다. 사실 저는 그래서 이 내용을 어디까지 받아 들어야 할지 걱정이긴 합니다. 기본적으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그 사람의 행동이 학자시절에는 과연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


저는 이런 통찰이 있는 연구를 볼 때, 통쾌함을 느낍니다. 수많은 통계 데이터들 더미 속에서 데이터가 이야기하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직관이 있는 연구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가 쌓여서 우리에게 분명히 있는 그 무엇을 ‘실제 있는 것’으로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경제분석은 우리나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다

특히 중국의 영향력에 대해서 저자가 분석한 내용을 보면, 예술급입니다. 즉 우리 경제의 문제가 가장 가까운 나라의 영향까지 같이 봐야 한다는 관점은 기존 학자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겨버리는 통쾌함이었습니다. 사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만 보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많은데 경제학도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매우 신선해 보였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오로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현재 진보 경제학자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고자 합니다. 즉 바른 진단을 해야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있는 주석을 보면 제가 꺼려하는 이영훈 같은 사람의 자료도 인용한 것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런 편견은 넘어가야죠. (저는 공식적인 경제학자가 아니니까 뭐라 하지 마시고요.)


이른바 세상을 제대로 바꾸고 싶다면 더욱 냉철하게 자료를 보고 사실인지 아닌지 살피고 또 살피는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통계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엿보이는 것이 많았습니다. 제가 정리한 위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앞뒤로 살피는 것이 행간에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놓친 부분으로 보이는 것

자, 그런데 여기까지는 고생했고. 이제 저도 좀 아쉬운 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쿠즈네츠 곡선이 참고할만한 거 맞아요?

저자는 불평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면서 쿠즈네츠 곡선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 또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은 하는데… 음… 우선 저자도 알고 있습니다. 이 쿠즈네츠 곡선 자체가 ‘가설’이었다는 것이요.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Kuznets curve appeared to be consistent with experience at the time it was proposed. However, since the 1960s, inequality has risen in the US and other developed countries.

쿠즈네츠 곡선 이것이 제안되었던 시기까지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미국과 다른 선진국에서는 불평등은 증가하고 있다.


 A measure of income inequality: the top decile share in the US national income, 1910–20
 [1]Piketty argues that Kuznets mistook the 1930-1950 decrease in inequality for the endpoint of its development. Since 1950, inequality has again reached pre-WW II levels. Similar trends are visible in European countries.[2]

피케티는 쿠즈네츠가 1930-1950년의 불평등 감소를 발전의 종점으로 착각했다고 주장한다. 1950년 이후, 불평등은 다시 2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에 도달했다. 유럽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보인다.


즉, 쿠즈네츠 곡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국의 쿠즈네츠 곡선’을 이야기해봤자 이미 썩은 고등어 같은 상황이지요. 저자는 ‘불평등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불평등이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모델을 들고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현실반영일까요? 처음 이 곡선을 들고 왔을 때, 이야기는 되는데 좀 불안했습니다.



낙수효과라니…

저자는  이른바 ‘낙수효과’도 간간히 인용하고 있는데…. 우선 소득이 없다가 소득이 생기고 이것으로 소득이 없는 사람들과 격차가 생길 수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낙수효과는 이론에만 있지, 돌아가지 않는 것이란 게 이미 상식이라서요.

게다가 한국의 토지개혁에 대해서 사고팔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경제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토지 집중으로 인해서 이른바 투기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 만드는 세상의 문제를 경제학자로서 눈감는 것은 맞는 건가요?

독점이 만드는 불평등은 소득이 늘고 줄고 하는 문제보다 심각합니다.


“올해 3월 말 기준 국내 순자산 지니계수는 0.606으로 지난해 3월 말에 견줘 0.003포인트 상승했다. 이 지수는 1에 가까울수록 소수의 가구가 많은 자산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순자산 지니계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집값 상승이 본격화된 2018년부터 매년 상승 추세를 보이며 올해 역대 최고치(조사 첫해인 2012년 제외)를 기록했다. 소득 상위 20% 가구의 가구당 평균 자산 보유액은 12억 910만 원으로 하위 20%(1억 7188만 원)의 약 7배에 달했다. 지난해 6.7배에서 확대된 것이다. 상위 20% 가구는 부동산 등 국내 전체 자산의 44%를 보유하고 있다.”  박종오, “자산 불평등 역대 ‘최악’… 양극화 커지는데 분배는 ‘역주행’,  2022-12-03


처칠 가라사대.....


이미 부동산에 의한 불평등 상황은 내버려두고 소득, 특히 임금소득, 에만 집중한 분석은 자칫 거대한 비용은 내버려두고 자잘한 비용만 절감하려고만 하는 거 아닌가 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받을 각오는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국은 여전히 저수준의 기업만 있어야 하나요?

저자는 한국에는 저부가가치 산업(도소매, 음식, 숙박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고 자영업자 비율이 30%대에 육박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최저임금을 만원 가량 올려버리면 이 사람들이 그 부담을 모조리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즉 기업 규모가 영세하고 저 부가가치 사업장이 많습니다. 이것은 낮은 생산성을 보여주고 저임금 노동자가 많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말합니다. “질 좋은 일지라는 어떻게 가능할까? 대기업 일자리가 많아지면 된다” 그런데 그런 대기업은 어떻게 늘릴까요?  한국은 계속해서 저부가가치 기업을 붙들고 있어야 할까요?

저자는 이 부분에서 정확한 저술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효율의 대기업들이 더 나와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삼성, 현대 이외에 더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나와야 한다는 거죠. 그럼 이런 기업은 어떻게 하면 나올까요?


한국은 맨땅에서 이른바 재벌을 이용해서 대기업을 키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1. 교육을 통해 고급 인재 양성 2. 창업을 지원하고 관련 초기 투자를 과감히 해서 국제 경쟁력을 가질만한 기업이 될 때까지 키운다 3. 이 기업이 사업을 하는데 쓸데없는 규제를 없애고, 본질인 혁신이 아닌 투기에 투자하지 못하게 한다.  4. 이러한 기업에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에 끊임없이 투자해서 급격한 빈곤층이 되지 않게 한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은 결국 ‘교육’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 개인의 재능을 활짝 꽃 피울 수 있게 하는 데로 귀결됩니다. 핀란드의 교육철학이 ‘한 사람의 재능도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작은 나라니까’. 그런데 한국은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젊은이들을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책 이외의 이야기: 대학을 안 나오면 처벌받는다는 사실은 왜 빼먹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TGONwvGOdu4

제가 하필 이걸 봐서..


사실, 이 책을 파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든 게, 이 영상이었습니다. 저자는 지금 한국 대학의 질이 떨어지는 게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대학 등록금은 고정한데 문제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부출자를 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돈을 덜 쓰니 교육의 질이 안 좋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대학교육자체가 신분이동을 위한 것이니 ‘과감히 비용을 올리자’라고 합니다. (등록금 고정하고 국가지원 늘리는 것은 은근슬쩍 넘어가죠)


이 관점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젊은이들을 처벌합니다. 저임금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고생하는 일자리 외에는 기회가 당연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가장 답답한 건, 굳이 대학학위가 필요 없는 단순한 비정규직 자리들이라도 대학을 나와야 기회를 준다는 거죠. (이렇게 만든 한국의 ‘이왕이면 다홍치마’ 주의는 계속해서 한국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둘째, 현재 한국대학의 대부분은 사립대학이고 사립재단의 재단전입금은 여전히 쥐꼬리입니다. 즉 사학재단이 자신들이 대학 살림을 위해 내놔야 하는 재산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손 놓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등록금만 올리라면 누구를 위한 이야기일까요?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잘못된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시작은 ‘교육개혁’입니다. 그리고 그 교육개혁은 ‘인간이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더 발전시켜서 자신의 능력을 무한대로 발휘하게 하는’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없는 한, 불평등의 가장 큰 문제인 극단적인 경제적 빈곤으로 떨어져 버리는 사람들의 수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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