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국립현대미술관의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는 손가락질 받는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26년 3월 20일부터 데이미언 허스트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 전시를 두고 분명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대된다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미 인정받은 서구 예술가의 개인전에 큰 예산을 써야 하느냐는 비판적인 의견도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미술계 내부에서도 분명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는 영국 태생의 예술가로 yBa(Young British Artists)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yBa는 1990년대 영국 미술을 이끌었던 젊은 작가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이 미술사 안에서 자리를 잡고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미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확히 파악한 컬렉터와 기획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영국의 기업인이자 사치 갤러리 소유자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1943-)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죠. 쉽게 말해 작품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것이 미술 세계 안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마케팅과 브랜딩 역시 잘 이루어진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중에서도 허스트는 특히 유명한 작가입니다. 어쩌면 yBa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작업은 죽음과 생명,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 전시 방식, 그리고 예술과 시장의 관계를 주요한 주제로 삼습니다. 실제 상어를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그대로 전시한 작품 <살아있는 이의 마음 속에서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1991)이 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실제 상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허스트가 직접 상어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상어의 사체를 전시해 인간이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늘 논란과 화제를 동시에 불러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미술사와 미술 시장 양쪽 모두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공한 작가의 전시가 국내 미술관에서 열리는 것에 대해 왜 반대 의견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보았어요.
첫째, 공공성의 문제
둘째,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의 문제
셋째, 미술사적 시의성의 문제입니다.
먼저 공공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허스트의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이 개인이 설립한 사립 미술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국립 현대미술관은 국가가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립 미술관입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은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전시를 기획하는 기관이라기보다,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연구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연구 기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왜 이미 주류 미술사에서 충분히 인정받은 허스트의 전시를 단독으로, 그것도 대규모로 개최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점에 대해 변론도 가능합니다.
먼저 이번 허스트의 대규모 개인전은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전시입니다. 서울에서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높아진 문화적 위상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또 미술관 측에서는 이러한 전시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자체적인 예산을 확보하고 이후 전시를 준비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허스트의 작품을 보기 위해 굳이 유럽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국내 관람객과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충분히 유익한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추가로 이런 의견도 있더라고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에는 국내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시야에서 주요한 미술 작품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거죠. 모두가 동시대의 주류 미술 작품을 시의적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요.
그럼에도, 공공성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관이라는 점이 이 문제를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이미 많은 문화 자본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의 국공립 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렸다면 공공성과 문화 소외 지역의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2.
다음으로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허스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합니다. 예를 들어 전시장에 거대한 수조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죽은 상어가 전시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강하게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화려함은 쉽게 잊기 어렵다고 하죠.
이러한 자극적인 시각성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종 스펙터클 개념을 통해 비판받기도 합니다.
스펙터클이라는 개념은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가 제시한 것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제 경험보다 이미지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스펙터클 사회에서 우리는 참여하는 시민이라기보다 구경하는 관객으로 머물게 된다고 그는 우려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 문제를 직접 이해하고 참여하려 하기보다 뉴스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우리는 사유하기보다 소비하는 인간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를 허스트의 작품과 연결해 보면, 강렬한 시각적 요소를 가진 그의 작품이 관객에게 깊은 사유를 촉발하기보다 그저 흥미로운 이미지로 소비되는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벌써 이런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허스트의 스펙터클한 전시장 속에서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후 인스타그램에 그 사진들이 올라오는 모습 말입니다.
물론 허스트가 일부러 스펙터클한 작품을 만들어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하려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스펙타클’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만연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무엇이든 쉽게 촬영하고 업로드하며 소비한 뒤 곧 잊어버리는 현재의 이미지 소비 환경 속에서 허스트의 작품을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으로만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라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미술사적 시의성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허스트는 1990년대 영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yBa 역시 이미 미술사 안에서 역사화되어 1990년대 미술사의 한 사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작업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당시의 사회문화적 조건과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오늘날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탈식민주의, 인류세, 포스트휴먼과 같은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즉 허스트의 작업이 동시대 미술의 주요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으며, 이미 충분히 조명된 작업을 장소만 바꾸어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전시를 직접 관람해 본 뒤 판단해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충분히 타당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허스트의 최신 작업까지 전시에서 함께 다루어진다면 그 작품들이 어떤 새로운 담론을 품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큐레이터들이 연구를 통해 그의 과거 작업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할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의성의 기준부터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요.
지금까지 현존하는 매우 유명한 예술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가 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공공성의 문제,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의 문제, 그리고 미술사적 시의성의 문제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만약 직접 전시를 관람하게 된다면 작품과 함께 이러한 문제의 측면들도 함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본다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전시 관람이 가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