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천안문 광장
가장 자주 손을 뻗는 책장에는 언제나 0.6cm만큼의 공간을 비워둔다. 피터 밀러의『리서치란 무엇인가?』를 쉽게 꽂아두기 위해서다. 손바닥 크기이며 두께가 1cm도 채 되지 않는 이 작고 얇은 책은, 2019년 뉴욕 바드 대학원 센터에서 열린 대담을 편집한 기록물이다. 이 대화에는 피터 밀러의 주도로 아홉 명의 예술가, 인문학자,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시인 캠벨 맥그래스가 밝힌 자신의 리서치 방법이다. 그의 리서치 스타일은 월트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과 닮아있다.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타인의 눈에 그저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대서양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마이애미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해변을 바라보는 일은, 그에게 분명한 리서치의 한 형식이다. 이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몹시 직관적인 경로로, 어느 날 문득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리서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그저 빈둥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그만큼이나 반가웠다.
미술사학자 우훙의 천안문과 마오쩌둥 초상에 관한 글을 읽고, 나도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 써야 할지 확신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 글을 머릿속에 넣고, 오래된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다녔다. 결국 베이징에 가서 천안문과 그 초상을 직접 보고 와야겠다고 결정했다. 맥그래스가 그러했듯, “세계의 물리적 장소 속 물리적 풍경”에 몸을 두면 언젠가는 글이 출발할 것 같았다.
베이징행 비행기표를 예매하고도 한참 동안 별다른 준비는 하지 못한 채 지냈다. 내 뇌벽에는 우훙의 글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예약해둔 것은 천안문 투어 하나뿐이었다. 그곳에 가서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무엇을 사유하고, 마침내 무엇을 쓰게 될까?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내가 써야 할 글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 채, 베이징으로 떠났다.
베이징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천안문을 찾아갔다. 내가 천안문을 찾아간 길은 우훙의 행로와는 달랐다. 그는 천안문의 ‘뒷면’부터 접근하였고, 그 결과 천안문이 다른 전각들이나 문루들과 거의 구별되지 않아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반면 나는 천안문의 앞쪽에서, 압도적인 문의 규모와 그에 응하는 놀라운 크기의 마오쩌둥 초상화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천안문에 대한 첫인상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우훙의 고백으로, 천안문이 내국인에게 얼마나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보든, 뒤에서 보든, 국가의 파사드로 기능하며, 다른 모든 것들과는 구별되어야만 했다.
내국인이 아닌 내게 천안문이 특별한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지하도를 건너 천안문 광장 안에서 천안문을 바라보던 그 순간부터였다. 중국인에게 천안문은 오랜 교육과 반복된 이미지 노출을 통해 특별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을 테지만, 외국인에게 그 특별함은 오히려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의 감각, 몸으로 맞닥뜨린 순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꽤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며, 그들이 지키고 싶어하는 힘을 강렬히 내뿜고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너무 큰데, 또 너무 가까워서 마치 VR 안경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크기에 멀리 있어도 충분히 가깝게 다가오는데, 그래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실제로는 저 멀리 있어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그런 가상현실의 공간 같았다.
그건 내가 서 있는 천안문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이 광장도 너무나 광대하기에 그토록 큰 천안문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게 가능했던 것이었다. 천안문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심 광장 중 하나이며,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행정과 정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원래 나는 마오쩌둥 초상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천안문 정면 한가운데에는 무게가 약 1.5톤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마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1년 내내 이 초상을 전담해 그리는 화가들이 있을 만큼 이 그림은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실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의 얼굴로 부활했으며, 이 초상은 그가 누렸던 권력을 비호하는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초상화 자체보다, 그것이 걸린 장소에 더 압도당하고 말았다. 다시 맥그래스의 리서치 방식을 소환해본다. 막상 그 물리적 현장에 도착하자, 책에서 익힌 이미지 대신 눈앞의 구조물과 몸 사이의 거리, 공간의 밀도, 그리고 그 얼굴과 마주한 찰나의 감각이 나를 움직였다. 그렇게 이야기의 중심은 마오의 초상에서 초상이 걸린 천안문, 이윽고 천안문 광장으로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태는, 중국 현대미술사를 공부하며 배경지식 차원에서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그것은 국가에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항쟁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면, 이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아주 낯선 장면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비극은 닮아있지만, 결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천안문의 그날은 이후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그들이 원했던 자유와 권리는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태’라는 단어는 검색되지 않으며, ‘6월 4일’ 날짜 또한 검열의 대상이다. 검열을 우회하기 위한 은어인 ‘5월 35일’ 역시 검색 결과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왜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을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그것은 물리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서 있었던 천안문 광장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언뜻 보기에도 수백 명의 인파가 모여있었다. 그런데도 광장은 거의 채워지지 않은 채 넓고 또 넓었다. 이토록 광활한 공간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여 메웠을지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국가는 그날의 사망자 수를 200여 명이라 발표했지만, 그 광장에 직접 선 자로서 그 숫자가 허구에 가깝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압도적인 크기의 공간은 아무리 많은 사람으로 채워도 비어 보이는 착시를 만들어냈고, 지금은 그때 그곳을 점령했던 이들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안문 광장은 이처럼 ‘비어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천안문 광장의 중심을 정확히 관통하는 ‘직선’, 천안문 광장의 정중앙부터 천안문의 중앙문과 마오의 초상, 그리고 그 뒤 자금성의 태화전까지 이어지는 이 ‘국가의 정렬된 시선’은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일직선은 단순한 구성 요소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질서를 시각화한 상징적 축선이다. 인민의 얼굴을 지운 뒤에야 비로소 완성된 하나의 얼굴처럼, 정중앙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마오를 보게 한다. 이제 이 광장에서 시민은 사라졌고, 그들이 원했던 것들은 유령이 되어 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얼굴, 영원불멸한 마오가 텅 빈 광장을 응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