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나의 성격은 파워 J였기에 계획을 철저히 세워 지키려고 했고, 모든 것을 기한 내에 한참 전에 미리미리 다 끝내놓는다. 과제가 주어지면 그것이 2주가량 남았더라도 나는 그 주 주말에 다 했다. 수행평가는 내신 전 또는 내신 후에 몰아치는 경향이 있는데, 보통은 컴퓨터를 사용한다. 기숙사에서는 전자기기 반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노트북 지참이 불가일 뿐만 아니라 열람실에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도 없고 블루투스 키보드로 타자를 치는 것도 방해되는 행위이기에 하면 안 되는 행동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열람실 옆에 있는 컴퓨터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1,2,3 세 학년이 모두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학년별 자리도 정해져 있고, 자리의 공정성을 위해서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 순서대로 자신의 이름을 쓰고 야자를 시작하면 먼저 적은 순서대로 자리에 착석한다. 보통은 여유롭게 다 들어가고, 열람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중이 잘 되지 않거나 잠이 오면 조금 더 밝고 개방된 컴퓨터실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희망자를 다 수용할 수 있지만 수행평가 시즌이 오면 자리가 남아나지를 않는다. 어떤 때는 사감선생님이 오시기 전부터 컴퓨터실 앞에 줄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기가 너무 싫었고, 화이트보드에 이름을 미리 써두는 것도 신경 쓰기가 싫었다. 그래서 모든 과제는 주말에 집에서 다 해두었고, 그래서 나를 컴퓨터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체로 열람실 자리에서 공부했다. 컴퓨터실이 싫었던 건 아닌데 그냥 귀찮았을 뿐이다. 인터넷 강의도 다운로드하여서 아이패드로 시청할 수 있어서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다. 더욱이 컴퓨터실은 다닥다닥 붙어 앉는 구조였고,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한눈에 보여서 신경 쓰였던 것 같다. 그런 나를 애들은 신기해했지만 나도 그들이 신기했다. 서로 신기한 상황이었다. 나처럼 미리미리 해두는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우리 둘은 어쩌면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내일이 수행평가 마감일이면 하루 전인 날 밤까지 북적이는 컴퓨터실이었다. 다 못한 친구들이 많은 경우에는 사감 선생님이 아침자습 시간에도 컴퓨터실 문을 열어두시고 퇴근하실 때 잠가 주시기도 했다. 당일 아침까지 과제 마감을 빠듯하게 해내고야 마는 친구들이 대단해 보였었다. 나 같으면 마음이 급해서 못할 짓이다.
그런 내가 이 학교에 오고 나서 많이 바뀌었다. 느긋해지고 기한이 다가와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을 장착하게 되었다. 좋은 변화인 것 같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좋게 생각한다. 또 다른 변화는 더 많이 웃게 되었고 성격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같이 생활하고 함께 방을 쓰는 친구들이 다 긍정적이라서 나도 행복해지고 밝아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래는 나 혼자 생활하는 게 편하고, 처음 보는 친구들에게 낯설어서 말도 잘 못 걸고, 어색해했는데,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어색함도 많이 풀어지고 행복해진 것 같다. 학교에서 처음 보는 친구들을 만나도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처음에 6인실 방을 쓰면서 그 친구들과 거의 가족처럼 지냈다. 기숙사에 입소하기 전에는 극 I인 나였기에, 기숙사 생활을 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화장실에서 말고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나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과 혼자만의 공간이 중요했는데,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붙어있는 환경이어서 걱정도 되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재밌게 지냈다. 고1 3월의 첫 달 동안 많이 힘들긴 했어도 그 힘듦을 이겨내고 버틸 수 있었던 건 6인실 친구들 덕분이었다.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고 존중하며 각기 다른 색이 하나의 무지개처럼 모여 반짝였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아이패드로 사진 찍어 남기고, 모의고사를 친 날 밤에는 우리끼리 모여 음료수와 과자를 사 와서 비교적 넓은 바닥과 1층 침대에 둘러앉아 과자파티를 했었다. 지나고 보면 그때만이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였던 것 같고, 그때 찍었던 사진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내왔기에 더욱 애틋함이 남아있다. 6인실 멤버가 나와는 모두 다 다른 반이어서 우리 반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마주치기만 해도 가족을 본 것처럼 반가웠다. 복도에서 달려와 안기고 포옹했다. 추운 겨울에는 온기가 따스하게 충전되는 것만 같았다. 나만의 인간 핫팩이었다. 6인실에서 만난 건 정말 운명 같은 일이었다. 우연한 만남인 만큼 더 정이 갔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출발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다.
방과 후 시간에는 국영수 중에서 수업을 신청해서 들었는데, 나는 수학 심화반을 선택했다. 공부를 좀 한다는 애들은 다 모여있었다. 첫날에 모둠을 짜고, 조금 뒤에는 문제 만들기를 한다고 했다.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모든 모둠이 자기 팀 문제를 풀지 못하면 치킨 기프티콘을 주겠다고 하셨다. 꽤나 유혹적이어서 도전정신이 불타올랐을 것 같다. 나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시중에 어려운 문제집 문제도 그 반에 있는 친구들이라면 다 풀 수 있는 난도였기에 더 어렵게 머리를 써서 출제를 해야만 했었다. 나는 결국 모르겠다고 했고, 같은 팀이었던 남자애의 문제로 하기로 하고 설명을 들었는데, 그 설명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머리 좋은 친구들이 많구나를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의고사 제출을 하면 1등급이 나오는 친구들도 굉장히 많았고, 실제로 모의고사를 쳐도 과목별 1등급을 받는 친구들이 꽤 있어서 모든 선생님이 우리 학년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부장 선생님의 기대가 너무 높으셔서 모의고사 때마다 우리를 심하게 압박했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가도록 만들었다. 모의고사 때마다 지난 모의고사 대비 성적이 오른 학생들을 순위대로 선발하여 격려 선물을 주는 시간도 마련하셨다.
내신 시즌에는 서로 공부하다가 질문이 생기면 물어보고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 과정이 특목, 자사고 부럽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성장하는 시간이 재미있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각자 잘하는 과목이 있었는데, 과학은 누구, 수학은 누구에게 물어볼지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각자 알아서 잘 주인을 찾아갔다. 경쟁심리 없이 우리 반톡에 필기도 공유해 주고, 공부 분위기를 형성했다. 따듯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내가 생각했던 고등학교 내신은 정말 전쟁일 것 같았다. 1점 차이로 순위가 바뀌고 등급이 바뀌는 치열한 싸움터인 만큼 필기도 보여주지 않고, 물어봐도 공유해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우리 학교의 분위기가 너무 만족스러웠다. 나 역시도 경쟁을 싫어하기 때문에 각자 공부하고 숨기고 그런 것 보다도 함께 공유하고 성장하는 분위기가 더 잘 맞았다. 내신 시험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전교권들도 허풍을 떨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은 전교 1등과 같은 반이 되었을 때 그 친구가 시험기간에 우리 반 채팅방에 지구과학 관련 질문을 했다.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질문을 남기는 모습이 멋있었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써서 남겼다. 다 기록하기 힘든 만큼 정말 멋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독려하고 알려주고 그러면서 자기도 성장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