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깃] 후배 직원에게
직장에는 이상한 공식이 있다. 말을 많이 할수록 존재감이 올라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브리핑 때마다 아는 척을 쌓는다. 공로는 기를 쓰고 챙기려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무대의 중심이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발언권을 독점하는 동안, 조용히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긴다. 팀원들은 어떨까.
후배 직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회의에서 용기 내어 아이디어를 냈다. 선배들이 "응응" 하고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말은 공기 중에 증발했다. 다음 주 회의에서 비슷한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이번엔 팀장 입에서 나오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이다.
이런 식으로 1년이 쌓이면 어떻게 될까. 후배는 회의에서 입을 닫는다. 어차피 내 말은 기억 안 해주는데 굳이 말을 꺼낼 이유가 없다. 팀의 침묵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활기는 사라지고 지시만 남는다.
그러면 반대로, 내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선배가 이렇게 말한다면?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짧은 한 마디. 그런데 최 대리 입장에선 갑자기 회사가 살만한 곳이 된다. 이 짧고 강력한 '인용 기술'. 말 잘하는 능구렁이 부장들이 왜 이 구문을 습관처럼 쓰는지, 그 안에 어떤 원리가 숨어 있는지 살펴본다.
첫째, 기억은 가장 저렴한 선물이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누군가 기억해줄 때, 어떤 칭찬보다 감동을 받는다. 심리학에는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게 있다. 시끄러운 파티 장에서도 자기 이름이 들리면 귀가 번쩍 뜨인다는 원리다. 이걸 회의실 버전으로 적용하면?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최 대리의 뇌는 자동으로 집중 모드로 전환된다.
게다가 '기억'은 '노력'으로 읽힌다. 상대는 생각한다. 부장님이 내 말을 메모라도 해뒀나? 아니면 그냥 기억력이 좋은 건가? 어느 쪽이든 최 대리에게 부장의 이미지는 "나를 진짜로 보는 사람"으로 격상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신뢰다.
둘째, 인정욕망은 월급보다 강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걸 직장 언어로 번역하면 간단하다. 후배는 돈 때문에만 일하지 않는다. 내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내 이름이 불리고, 내 말이 실제로 쓰이는 경험을 원한다.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구문은 이 욕망을 겨냥한다. 나의 의견이 폐기된 게 아니라 '살아 있었다'라는 확인. 나아가 나의 말이 팀의 방향에 기여했다는 증거. 이 경험이 쌓이면 최 대리는 다음 회의에서도 입을 연다. 팀 분위기가 살아나는 건 덤이다.
셋째, 주도권은 챙기면서 공은 나눈다.
여기서 능구렁이 부장의 계산이 드러난다.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구문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인용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을, 언제, 어떤 맥락에서 끌어오느냐. 이 모든 결정은 부장이 한다. 공은 나눠주되, 무대를 내주지는 않는다. 부장은 두 가지를 동시에 얻는다. 후배의 충성심과 팀의 분위기.
(지난 주 최 대리가 "고객 응대 매뉴얼을 현장 직원들이 직접 만들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엔 흐지부지 넘어갔다. 오늘 팀장 회의에서 그 아이디어를 쓸 타이밍이 왔다.)
이사 : 우리 고객 응대 품질이 들쭉날쭉한데,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요?
부장 :(잠시 최 대리 눈을 보고) 사실 이건 최 대리가 먼저 말했던 것처럼, 현장 직원들이 직접 매뉴얼을 만드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매뉴얼보다 현장 언어로 쓰인 게 훨씬 체감이 빠르거든요.
이사 : 오, 그거 괜찮은데요. 최 대리 생각은 어때요?
최 대리 :(당황 + 기쁨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속마음: 부장님이 기억하고 계셨네?!! 세상에!!)
부장 :(끄덕끄덕, 표정관리) 최 대리, 초안 잡아볼 수 있겠어요? 내가 사이드에서 밀어줄게요.
최 대리 :(눈빛이 달라지며) 네! 해보겠습니다.
(미팅 자리에서 최 대리가 제안했던 납기 조정안이 당초엔 묵살됐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방식이 맞다.)
협력업체 담당자 : 납기를 한 번에 몰아치는 건 저희도 솔직히 부담입니다. 분산하면 어떨까요?
부장 :(3초 침묵, 최 대리 쪽으로 슬쩍 눈길)
맞습니다. 사실 저번에 최 대리가 이미 짚었던 포인트인데요. 분산 납기를 적용하면 우리 검수 일정도 여유가 생기고, 업체 쪽 생산 스케줄도 안정화됩니다.
최 대리, 그때 얘기했던 구체적인 수량 배분 방식 설명해줄 수 있어요?
최 대리 :(깜짝 놀라며) 아, 네!
(속마음: 그걸 기억하고 계셨다고?!) 저는 월 2회 분납으로, 각각 60%·40% 비율로...
협력업체 담당자 :(최 대리를 다시 보며) 오, 그거 현실적이네요.
최 대리의 존재감이 올라가고, 나는 자연스럽게 팀을 잘 운영하는 사람이 된다. 모두가 이기는 구문이다.
부장 :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이번 캠페인은 SNS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최 대리 :(눈을 깜빡이며) 저... 그런 말씀 드린 적이 없는데요?
부장 : 어? 그래요? (당황)
최 대리 :(속마음: 박 대리가 한 말인데... 이 분 우리 팀원들 구분을 못 하시는 건가?)
물론 사람이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실수가 누적이 되면 세심한 리더가 아니라 '건성인 사람'으로 각인된다.
부장 :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5분 후) 역시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또 10분 후) 이것도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최 대리 :(처음엔 기쁘다가, 나중엔 의심이 생긴다)(속마음: 잠깐, 저 말들 내가 다 한 말이 맞나? 어... 세 번째 건 내가 한 말 아닌 것 같은데?)
남발하면 '세심한 리더'가 아니라 '아부꾼 상사'가 된다. 희소성이 사라지면 감동도 사라진다. 회의 한 번에 최대 한두 번. 그 이상은 금물이다.
상황에 따라 같은 의도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저번에 최 대리가 언급했던 그 얘기 있잖아요..." → 타이밍이 애매할 때, 회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부드러운 버전.
"그거 최 대리가 먼저 짚었던 포인트인데요..." → 공이 명확히 후배에게 돌아가야 할 때. 특히 협력업체나 타 팀 앞에서 쓰면 효과가 배가된다.
"최 대리가 그때 그렇게 봤는데, 결국 맞았네요." → 시간이 지난 후, 후배의 예측이 실제로 맞아떨어졌을 때 쓰는 버전. 후배에게 '나는 예지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 버전의 파급력은 가히 조용한 핵폭탄급이다.
(1) 이 구문을 쓰려면 진짜로 들어야 한다.
기억하는 척하다가 틀리면 신뢰가 무너진다. 즉, 이 구문을 잘 쓰고 싶다면 상대의 말을 귀담아 듣는 습관이 먼저다. 회의 때 핸드폰 만지작거리면서 "응응" 하다가 나중에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써봤자 빈 공연이 된다. 이참에 '사람'한번 되어보자.
(2) 메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이게 오히려 "꼼꼼한 부장"이미지를 강화한다. 폰 메모장도 충분하다. 요점은 "최 대리가 이걸 말했다"는 출처를 정확히 붙잡아두는 것이다.
(3) 대화의 흐름속에 자연스럽게 쓰자.
능구렁이계의 초심자의 흔한 실수. 후배직원의 환심을 사려고 한 나머지, 자그마한 건수에도 끼워맞추기 식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듣는 후배도 민망해진다. 대화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얹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최 대리가 말했던 것처럼". 후배의 인정 욕구를 정확히 충족시키고, 팀의 발언 문화를 살리며, 동시에 나의 리더십 이미지를 올리는 1석 3조의 구문이다. 공은 나눠줄수록 팀이 강해지고, 팀이 강해질수록 나도 강해진다.
실전 미션.
팀 회의나 일상 대화에서 후배 혹은 동료가 한 말 하나씩 메모해두자. 단 한 줄이면 된다. 이름과 핵심 포인트만. 이것을 사용할 순간은 쉽게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