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트로
랑카위에 처음 도착했던 날을 기억한다. 비행기 밖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한 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겁고 축축한 밤공기가 훅 덮쳐왔다. 랑카위 아니 말레이시아라는 낯선 땅의 첫 느낌이었다.
비행기 계단에서 내려와 랑카위에 첫 발을 디딜 때, 랑카위가 말레이시아의 섬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첫 책, <트루 뉴욕 브루클린>의 취재를 막 마친 참이었고, 취재 원고를 정리하느라 새로운 삶이 펼쳐질 곳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날 불러준 사람만 믿고 왔으니까.
오고 나서야 알았다. 랑카위는 1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이며, 말레이시아 최북단의 섬으로 태국과 지척라는 것, “부미”라고 불리는 원주민 무슬림이 90%에 달하지만 대부분의 상권을 중국계 말레이시안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물속이 훤히 비치는 에메랄드 빛 바다 대신 석회질 가득한 불투명한 옥색 바닷물로 에워싸인 섬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낯선 밤으로 부터 5년이 지났다. 한국과 랑카위를 오가며, 때로는 다른 나라로 취재 여행을 떠나기도 하면서 5년을 채웠다. 인생의 큰 변화를 가져왔던 랑카위행,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이 랑카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5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랑카위다. 지난 몇 년 동안 서 너번 정도 이런 저런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방문객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은 것은 한국에서 랑카위까지 이어지는 직항이 없는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해 랑카위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아침 9시 비행기를 타고 가장 빠르게 랑카위에 도착한다고 해도 저녁 7시다. 총 10시간이라는 긴 시간과 다른 도시를 경유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올만한 곳인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반반?
랑카위는 미디어에서 소개된 것처럼 해양스포츠의 천국도 아니고, 다른 동남아 지역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비교하면 조촐하기 짝이 없다. 무슬림이 90%나 되고, 섬이라는 단점이 다채로운 식재료를 사용하고 공급하는데 제약을 가져와 먹을거리도 다양하지 않다. 포장하려고 들면 바다가 있으니 해양스포츠의 천국으로, 100여개의 군도로 이뤄져 있으니 그림같은 비경으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말레이시아의 섬이니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가진 것으로 마음껏 할 수 있다. 꽤나 합당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랑카위에서 5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하나도 동의 할 수 없는 과대포장일 뿐이다.
그래서 랑카위에 오지 말라고? 그건 아니다. 랑카위에 대한 기대를 바꿔라. 해양스포츠의 천국도 아니고, 그림같은 비경도 없고, 먹을거리도 그다지 많지 않으니 그런 기대는 내려놓고 다시 보자.
랑카위는 쉼표다. 드라마틱한 느낌표의 여행을 원한다면 이곳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쉼표를 품고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빠름의 속도감을 내려놓고 오라.
7시에 뜨는 해를 보고 일어나 7시에 지는 해를 보며 칵테일 한 잔을 들이키는 여행, 바닷가의 비치 베드 하나를 빌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보며 스르륵 낮잠에 빠져들어도 좋은 여행, 차 한대를 빌려 닫는대로 달리다가 차를 세우고 주변을 돌아보기를 반복해도 하루가 부족하기 않은 여행을 하러 오라. 지루해질 때쯤 제트스키를 타고 랑카위의 군도를 돌아보는 투어를 하거나, 배위에서 와인과 함께 랑카위의 일몰을 즐기는 선셋 투어를 즐길 수도 있겠지.
랑카위는 쉬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쉼표, 느낌표 보다는 쉼표를 찍고 돌아가기에 좋은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