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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Sep 20. 2022

경황은 있으신가요

나를 돌보는 시간


"선생님, 오늘은 수업을 하나요?"

" 아 네~ 아고,

제가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네요. 오세요 오세요!"


요일마다 듣는 수업이 있다. 최근에 수업시간을 조정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을 조정하고 첫 수업이 있던 날,

학원 벨을 눌렀는데 응답이 없다.

전화를 드렸더니, 주무시다 깬 음성이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주무시고 계셨단다. 먼저 연락도 못 했다며 미안해하신다. 그렇게 헛걸음으로 돌아온 후 다음 수업이니, 미리 전화를 걸어 확인해본 것이다.

'경황이 없어서...' 또 잊힐뻔한 수업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요즘 두통을 심하게 앓고 계신다고 한다. 이비인후과, 내과, 신경과를 투어 하셨단다. 뇌 MRI까지 찍었는데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하신다.




[ 경황(景況):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나 형편 ]

景(볕 경, 그림자 영) / 況(상황 황, 하물며 황)


'경황이 없다'는 말은 몹시 괴롭거나(정신적 여유의 부재) 바쁘거나(시간적 여유의 부재) 하여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볕을 뜻하는 한자에는 陽(볕 양)도 있다. 지혜로운 선조들이 양황이라 하지 않고 경황이라 이름 붙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景자는 '볕 경'이기도 하지만 '그림자 영'으로도 쓰인다. 況자는 상황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물며'라는 뜻도 갖고 있다. 볕이 들어야 볼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그림자까지 드리워져 여유나 형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을 경황이 없는 상황으로 풀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풀이하면 그런 상황을 명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조적인 상황의 느낌을 살려 경황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선생님의 경황은 전자인 '정신적 여유나 형편'에 해당한다. 남편분과의 사별. 당시 선생님은 어린 딸과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것이 30대 중반의 일이고 지금은 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모든 고통이 시간의 흐름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해서, 당시에는 고통을 느낄 틈도 없다가 뒤늦게 반응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러느냐'는 말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 감정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감정이 갖는 모든 이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수용하고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가질 때, 그제야 안녕하고 그 감정을 보내줄 수가 있다.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살아오다가, 몇 해 전 선생님은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고 올 가을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냥 살아도 될 일이지만, 현재 남편이 되신 분은 초혼인지라 멋진 결혼식의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무리하여 결혼식을 올리셨다고 한다. '무리'라 함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두 번째 입는 웨딩드레스가 너무나도 버겁게 다가왔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이목을 날 것으로 느껴야 하는 부담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결혼식을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니 행복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동안 쌓여있던 삶의 고단함과 슬픔,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 같다고 하신다. 결혼식을 올린 후 선생님은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신경과 의사는 뇌에는 이상이 없다며 공황장애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신경정신과로 한 번 가봐야겠다는 것이 몸의 증상에 대한 결론이다.


자신의 감정을 돌볼 겨를이 없이 달려온 시간 동안, 그 감정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깊이깊이 내면화되어 버린다. 떠나보내지 못하고 오래도록 간직해온 부정적 감정은 나의 일부가 되어 몸을 공격하는 신체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체화 현상은 생존 본능의 일환인 것도 같다. 미해결 감정을 처리해 신체와 정신을 정상화하기 위한 외침. 그 외침에 귀 기울여줘야 한다.

그런데 내면의 감정을 온전히 끌어안아주는 일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기차가 달리고 있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창 밖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슝슝 지나간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이미지는 여타 사물들처럼 슝슝 지나가지 못한다. 뇌에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각인된 강력한 이미지에 대해서는 뇌가 프로세싱을 멈춘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 충격은 잊혀지지가 않고 남아있게 된다. 하나의 트라우마가 형성되는 것이다.

어느 심리상담사는 말한다. 80대 노인 분들이 상담실을 찾아와 '내가 일곱 살 때...' 어떠어떠했다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나 안타까울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돌볼 겨를이 없어 평생을 상처를 껴안고 살아온 것이다. 그로 인한 이러저러한 파장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이겨내며 살아온 것이다. 돌봄을 받지 못한 아픈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평생을 간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그냥저냥 살아진다. 대부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특정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의 패턴이 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면 그 패턴에 묻어있는 감정을 찾아봐야 한다.

마음을 동그랗게 그려본다. 살아오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대상을(해결하지 않아도 그만인 관계 말고,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대상) 떠올려 X자를 그린다. X에 우선순위를 매겨본다.

호흡을 깊게 5번 정도 한 후 눈을 감는다. 한 명의 X를 눈앞에 떠올려본다. 그때의 내 느낌이 어떠한가. 상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얘기하면 상대는 무어라 생각하고 무어라고 말할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얘기해주고 싶은가. 내 욕구는 무엇인가.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가. 상대에게 표현해본다. 이런 대화를 반복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과 상처와 대화를 많이 나누어보길 바란다.

나의 선생님도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한 말들(괜찮아 난 더 강해졌잖아. 괜찮아 내겐 이 있잖아 등) 억눌린 슬픔을 누르지 않으시면 좋겠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 슬픔을 애도하는 의식을 통해 슬픔을 잘 흘려보내시길 바란다. 총알을 몸에 지니고는 살 수 없으니.

곧 건강하고 가벼워진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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