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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자 Oct 26. 2024

내 마음에 빨간 불이 켜졌네?

병원 갈 결심을 도와준 기록의 힘

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 있어 있어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 가족적 특성과 나의 성격기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 우리 가족은 대문자 T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조합이며, 들숨에는 사실을 날숨에는 판단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나는 타고나길 예민한 안테나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분과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나, 나의 반응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때도 많았다. 그들의 단점을 파악하고, 그걸 지적하는 데에 탁월했기 때문이다. 내 깐엔 부당함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송곳이 되곤 했다.


이러한 내게 회사에서 만난 너무나 소중한 언니가 있다. 어떤 까다로운 사람과도 부드러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늘 유머러스한 이 언니는 진짜 우주에서 보내줬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 직장동료‘라는 딱딱한 호칭을 떼고, 언니라 부를 수 있었을 때 너무 좋았다. 그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안을 느끼곤 했다.(내게 형제라고는 1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나보다 더한 T형 오빠밖에 없다) 언니는 시댁살이를 시작하며 시름시름 병들어가던 나에게 종종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때로 시부모님과 남편의 감정을 그분들을 대신해서 나에게 읽어주는 1타 강사 역할을 해주었다. 처음엔 친정부모님에게 이야기했으나 엄마는 내 감정과 심한 커플링이 되시길래 가급적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주변 지인들에게는 누워서 침 뱉는 기분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같이 욕해주면서 무조건 내 편만 들어주는 것도, 때로는 너의 그런 점 때문에 네가 힘든 거라고 질책하는 것도 아닌 객관적인 제삼자로서 말해주는 것이 그나마 나의 위태위태한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언대로 잘 되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언니가 헬스케어 스타트업 대표로서 런칭한 앱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열혈테스터를 자처하며 써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9월의 어느 시점부터 감정일기를 쓰는데 '어? 이거 심각한데?'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 당시 퍼플웨일 앱 내 내 감정일기 스크린샷 - 간단한 내용기록도 있는데, 너무 적나라해서 닫아두기로 한다.)


특히나 같은 날 저녁 2번의 감정일기를 남긴 저 날은, 긴 추석연휴를 앞두고 우리 모두 아이 키우느라 고생했으니 번갈아 1박 2일씩 여행을 가자는 시어머니의 제안에 시부모님 두 분이서 먼저 여행을 다녀오신 때로 기억한다. 나는 두 분의 부재인 상태에서 육아를 하면서 나의 부재를 고려해 이유식 만드는 등의 일이 배로 많아져 완전히 체력이 소진돼서 날카로운 상태였다. 그냥 진짜 다음날 쉰다는 생각만 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시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던 와중에 어머님의 ‘내일은 너희들이 여행 가는 날이네, 너희들도 우리처럼 새벽같이 나가버리는 건 아니지? 호호호’라는 말씀에 기분이 상했지만 참고 ’ 아니에요 두 분 힘드신데 어떻게 그렇겠어요. 저희는 12시 넘어 나갈 예정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길 그저 농담이셨다고, 더 즐기다 오라는 말을 반어법으로 하신 것이라 하였는데 나는 그런 식의 화법에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러자 옆에서 남편이 한술 더 떠서, ’ 내일 낮 12시에 나가서 다음 날 낮 12시에 들어올 예정입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무언가 이성의 끈을 툭 하고 끊기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말인데, 그때의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피곤하고 힘든 사람으로서 어찌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아니하고 저렇게 혼자 생색을 내는가에 대해 극도의 분노심을 가졌다. 두 분은 여행이라고 새벽같이 일찍 나가셔서 애들 다 재운 밤 10시에 들어오시는데 왜 우리는 이것마저도 눈치 봐야 하는 건가 이럴 바에 도움받지 않고 사람 쓰지 아님 애들 데리고 여행 가는 게 낫겠네 등등 별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남편과 방에 들어가 날세운 말로 서로 싸우다가 도저히 입장이 좁혀지지 않아서 애들 재우러 애들 방에 와서 울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언니의 앱이 생각나서 켜서 감정 일기를 적어보았다.


수많은 원형의 감정리스트에서 감정을 고르는데, 부정적 감정인 붉은색 감정리스트에서만 저렇게 많은 감정을 체크함에 놀랬고, 그 내가 고른 시뻘겋게 타오르는 감정들의 이름과, 그 감정의 강도에 두 번 놀랬다. 그리고 그때 내가 고장 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토실토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옆에서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데, 나는 왜 지금 죽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혼자 육아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도 있어서 여행도 가라고 하는데 왜 나는 우울한 거지? 언니에게 카톡을 했고 언니는 조심스럽게 내게 병원을 가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이런 정신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날 밝으면 예약해 보겠다 다짐을 했다. 이미 정신과 및 심리상담소 다년간 유경험자인 나인데 가서 한 시간 울고 오고 정신과 약 받아오는 것 외에 도움을 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마음 한 구석에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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