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밀어버렸다

by 작은나무

항암을 하기 전 병원에서 항암을 했을 때 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오심, 설사, 변비, 피부 건조, 구내염, 두통, 근육통, 체력 저하 등 설명해 준 온갖 부작용이 다 온다면 내 몸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메스꺼움 외에 다른 부작용은 1차 항암을 한 지 2주일 넘어가는 시점이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 하나 있다. 탈모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항암을 한 환자들 100%가 겪는 부작용이다. 다른 부작용은 완화해 주거나 미리 방지하는 약이라도 있지만 탈모는 약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내려놓기를 하는 마음가짐이 약이다.


내 성격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상황이 닥치면 수용이 빠른 편이다. 누군가에겐 포기가 빠르고 타협을 잘하는 걸로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지금처럼 일반적인 상황이 아닐 땐 제법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어차피 항암을 하고 14일 차가 되면 대부분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 이때 그냥 평소처럼 몇 가닥씩 빠지는 수준이 아니고 한주먹씩 빠지고, 손으로 머리를 쓸기만 해도 한 뭉터기씩 빠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빠지지 않은 머리카락들과 서로 엉키기도 하고 지나간 자리마다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놓은 듯이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런 후기들을 보면서 나는 1차 항암을 하고 바로 가발과 쉐이빙 예약을 해두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항암을 한 지 11일 차에 머리를 밀어버렸다. 남편과 함께 가발샵에 갔고 거기서 쉐이빙도 해주었다. 내 머리 길이는 거의 허리까지 오는 인생에서 제일 길었던 시기였다. 남편은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길었던 내 머리는 가위질 한 번에 똑 단발로 변했고, 그다음은 이발기로 두상을 따라 나머지 머리카락도 다 밀었다. 나는 얼굴을 아래로 약간 숙이고 있었고, 조용한 가발가게에서는 음악소리와 징-징- 하는 이발기 소리만 한동안 들렸다.


머리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고 거울을 보니 낯선 모습의 내가 있었다. 뒤에서 남편 훌쩍이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을 참은 것도 아니고 그냥 눈물은 나지 않았다. 왜냐면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항암이 끝나면 다시 날 것이고, 그전엔 좀 불편하겠지만 가발과 모자라는 도구가 낯선 외형을 조금 가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얼굴형도 긴 편이고, 뒤통수가 너무나 납작해서 두상이 그대로 드러났을 때 너무 이상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생각보다, 걱정보다 괜찮았다. 그래서 눈물이 안 났던 것도 같다.


미리 골라두었던 가발을 써보았다. 오, 진짜 내 머리 같았다.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봤다. 자연스럽다고 했다. 근데 내가 봐도 진짜 자연스러웠다. 기분이 한결 좋았다. 원래는 이번 기회에 평소 도전해보지 못한 단발머리 가발을 하려고 했지만 써보니 너무 안 어울려 포기했다. 남편도, 가발가게 사장님도 말렸다.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여 내 스타일과 비슷한 스타일의 가발로 골랐는데 잘 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산 가발은 내 옷, 가방, 신발 등 나를 꾸며주는 물건들 중 가장 비싼 물건으로 무려 130만 원이다. 가격만큼 값어치를 해줄 거라 생각한다.


올해는 내 머리카락 대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이 가발을 쓰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야 한다. 가발 없이 내 머리카락만으로 다닐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하루하루 조금씩 더 건강해져야지.




머리를 미는 날 아침,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내 머리카락을 누군가 만진다. 올해 초4, 초2가 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한다.

"오빠, 엄마 오늘 머리 진짜 다 깎는 거야?"

"그래. 그렇대. 오늘 우리 엄마 머리 만지는 거 마지막이야."

"그럼 엄마 머리카락 몇 개 보관해 두자."


갑자기 머리 몇 군데가 따끔한다. 그렇다고 머리카락을 뽑다니ㅠ

"얘들아. 엄마 머리카락 오늘 다 없어지는 건 맞지만 너무 속상해하지 마. 머리카락은 다시 나잖아. 엄마 몸의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평생 못 쓰는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은 다시 나고 몇 달만 대머리로 살면 되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그리고 머리를 밀고 온 오후. 아이들에게 가발을 쓴 모습을 보여주고, 가발을 벗은 모습도 보여줬다. 비니를 쓰고 비니 사이로 까끌거리는 내 머리를 먼저 만져보게 하고 가발을 아이들도 써보고 남편도 써보며 가발이 진짜 안 어울리는 남편 모습에 서로 깔깔 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초4 아들의 질문,

"엄마 그런데 이 가발은 진짜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으면 머리카락을 준 그 사람은 지금 대머리예요?"

엉뚱하고 귀여운 질문이다.


그러게. 그 사람은 누구일까 모르지만 아무튼 감사하게 가발 잘 쓰고 다니겠습니다. 하고 속으로 인사 한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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