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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련 Oct 29. 2022

바람의 길

에어컨 바람은 살갗을 에이 듯 날카로우나 마음에 닿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


에어컨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다. 바늘처럼 가늘고 송곳처럼 강하다. 몸을 쪼갤 대로 쪼개어 공기 본래의 성질을 빼앗은 탓이다. 서로의 어깨에 매달리고 부딪히며 저들끼리 한가로이 살다가 사람들에 의해 몸피를 바꿨다. 냉매라는 낯선 놈을 만나 사람에게 유용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그들을 마구 흩어놓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자신이 생경했으나 주어진 생을 살 작정이다. 도린곁만 헤매다 끝나게 되면 어디에 대고 신세한탄을 할지 아직 모르겠으나 우선 찾아다녀야 할 곳이 산더미다. 

 바람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도 시원치 않아서 웬만해서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은 살갗을 에이 듯 날카로우나 마음에 닿지 않고 겉돌기만 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은 바람의 종류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저 너머의 여름이었다. 숨을 틀어막는 폭염에 두 손 두 발 다 들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에어컨에 눈이 갔다. 

 자연풍을 골랐으나 이름과 달리 거칠고 불손하다. 엑스레이처럼 직진 본능을 가져 금지구역도 서슴없이 넘나들고 파수꾼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부를 뚫고 거침없이 다가가 조용하던 장기를 훑고 지난다. 평화롭던 장내는 이물질의 급습에 바짝 긴장하여 움츠러들기도 하고 서로의 등에 포개어 바람이 지나가기를 숨죽여 기다린다. 그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다. 급작스런 변화에 자리를 이탈한 그들의 반란은 고스란히 통증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들대로 살아남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긴 터널에 갇힌 것 같아 더욱 답답하다. 온몸이 거부하는 에어컨 바람인데 그것에라도 의지해야 여름을 날 것 같으니 앞으로 어쩜 좋을지. 

  예전의 나의 여름은 언제나 열정을 앞세워 왔다. 싸매두었던 가슴을 열면 마음이 먼저 바다로 산으로 내달리던 여름이었다. 아지랑이 노니는 도로는 적당히 익어 성급한 달음질도 사뿐히 받아주고, 햇빛이 쏘아댈 때는 얄밉기도 하지만 그늘에 서면 순한 양이 되었으니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처음 찜질방에 들어설 때처럼 몸을 감싸는 노곤한 안식은 여름에만 맛보는 즐거움이었다. 폭염이라도 에어컨 바람보다 견딜 만 했다. 더위 속에 스며들면 요상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몸에 난 구멍을 낱낱이 찾아 열어 재꼈고 그 속으로 스며든 후끈한 열기가 긴장한 뼈와 살갗을 다독였다. 몸 후미진 곳에 배인 습기를 소리 없이 말리고 나면 온갖 장기가 새로워져 몸이 한결 가벼웠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여름이 더 독하게 달아오른다. 우리가 만든 문명의 이기가 바람이란 바람은 죄다 먹어치운다. 점점 몸집을 불린 화마가 우리를 열돔에 가둔다. 산소통 없이 진공상태를 견디는 기분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겠는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일으킨 바람이라도 그 그늘 밑에 있어야 숨 가쁘지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에어컨이 제 일을 하는 동안 하늘에는 온실가스가 두텁게 쌓여간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폭염은 더욱 독해질 거고 온실가스는 지구에 두터운 장막을 칠 게다. 에어컨의 진화와 지구의 운명은 오랫동안 숨바꼭질일 게 분명하다. 돌고 돌고 또 돌고. 

 마침 ‘지오스톰’이라는 영화를 봤다. 세계 정부 연합은 인공위성 조직망을 통해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더치보이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기상이변을 막아줄 더치보이가 우주 정거장에 설치된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기면서 걱정했던 일이 봇물처럼 터진다. 두바이의 쓰나미와 홍콩의 용암분출, 리우의 혹한, 모스크바의 폭염까지 세계 곳곳이 아수라장이 된다. 힘센 나라에서 통제권을 가졌는데 운영자의 욕심이 더치보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으름장이 필요했던 그는 몇 군데 위성을 의도적으로 고장을 낸다. 더치보이에 의해 꽁꽁 묶였던 기상이변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구를 덮친다. 손으로 둑을 막아 마을을 살렸다는 이야기의 주인공 더치보이, 그의 이름을 딴 그것이 지구를 구해주길 바랐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되었다.

 섬뜩했다. 당장이라도 영화 속 장면이 나를 덮칠 것 같다. 뇌가 먼저 기억하고 현실처럼 재현해 낸다. 폭염이 살아 꿈틀거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태양비가 땅속까지 스며들어 용광로가 된다. 그것이 뿜어내는 열기는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만나 성난 하마로 변한다. 한없이 뿜어대는 불 바람에 땅이 갈라지고 땅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은 땅 밑으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으흑.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더치보이도 없다. 더치보이를 만들기 전에 폭염은 해마다 단계를 높일 것이고 에어컨은 유래 없이 바빠질 게다. 불감증에 걸리면 보이는 게 없다. 들리는 것도 없어서 그저 편안하다. ‘거대한 지구가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겠지.’ 그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외면해버린다. 간간히 들려오는 아우성은 엄살이라 생각하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땀으로 얼룩진 식사시간 대신 우아한 밥상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행복이 오늘의 밥상에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생의 단면 아니던가.  

  그러나 더한 고통을 견뎌야하는 날이 오기 전에 실천할 일이다. 사계절 뚜렷한 우리나라의 특징도 고쳐 써야 할 판이다. 봄, 가을은 여름과 겨울에 밀려나고 말았다. 여름이 6개월로 늘어나고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버린 한반도, 그를 살릴 방법이 내게도 있는데 미력하여 힘이 가지 않는 게 문제다. 당장 보기에는 볼품없으나 하나로 뭉치면 큰 힘을 만들 수 있음을 믿어야겠다. 바람이 원래의 성질을 찾아 우리의 얼굴을 간질일 날을 꿈꾼다. 지구가 아프면 우리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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