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하게 돈을 만드는 그들은 잠자던 인간의 폭력성에 불을 지핀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함성소리. 피투성이가 되어 맞고 있고 다른 한쪽은 잡은 기회를 놓칠 세라 죽일 듯 달려든다. 상대는 눈두덩이가 부어 앞이 안 보이는지 링을 잡고 비틀거린다. 자비란 없다. 맹수처럼 약한 곳을 골라 상대가 거꾸러질 때까지 발로 차고 주먹질이다. 피투성이가 될수록 관중들의 함성소리는 하늘을 찌른다.
쓰러지는 줄 알았던 상대가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함께 싸워온 관중도 그를 용서할 수가 없다. 눈앞의 사냥감을 놓칠세라 링 밖에서도 선수를 다그친다. 가격하는 선수처럼 어금니를 깨문 채 양손을 불끈 쥔다.
“구역질 나, 빨리 돌리지!” 채근하는 마누라를 힐끗 보더니 TV 리모컨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이는 못내 억울한 눈치다. 채널을 돌리다 볼 것 없어 신문을 들었을 뿐인데 tv는 하필 격투기 채널에 고정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격투기 장면을 스친 듯하다. 짧은 순간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음산하고 불안한 기운이 강하게 몸 안을 파고들었다. 마치 내가 맞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얼얼해졌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이었다. 그저 오락일 뿐인데 번번이 몸이 굳어지면서 몸속의 장기가 반란을 일으키는 걸 보면 무자비하고 잔인한 인간의 냉혹함이 꽤 두려웠던 모양이다.
폭력의 장을 합법적으로 열어놓고 즐기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잘 싸웠다 칭찬하는 코미디 같은 광경을 남녀노소 누구나, 어디에서나 즐기는 재미난 세상이다. 우리는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부러 끌어내는 놀이를 공공장소에서도 버젓이 방영하는 살벌한 시대에 산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다.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말인가. 인간은 애초에 두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 천사와 악마가 한 몸에 어울려 산다. 그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기회만 엿보다가 주인이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와 세상을 활보한다. 갈수록 부의 논리와 영합한 악마가 더 많은 기회를 제공받고 있다. 과연 이런 흐름의 끝이 어디일지 두렵다.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탄생한 뒤틀린 문화는 차가운 심장을 길러내고 기계처럼 살다가 쿨하게 사라져 갈 것을 부추긴다. 뜨거운 심장이 주인을 잃고 남루한 여행객처럼 고단한 일상을 산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자극적인 놀이를 잦아들게 할 제동장치는 정말 없는가. 다행이다. 미미하지만 길고 오롯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외침은 가늘고 작지만 그래도 그들 때문에 미래를 기대한다. 얼마 전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을 읽었다. 그녀는 인간의 폭력성이 육식 문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그간 먹어왔던 고기들이 짓이기고 뭉개져서 몸 구석구석에 쌓여 악취를 풍기는 꿈을 꾼다. 그 후로 육식을 거부한다. 지금껏 먹은 목숨들이 끈질기게 명치끝에 들러붙어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육식을 제하고 보니 먹을 게 별반 없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그녀를 가족들은 정신병에 걸렸다고 단정한다. 보편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세상 사람들도 그녀를 조롱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꿔온 남편은 아내의 돌발행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쑤군거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고민 없이 아내와 타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이 소설처럼 극단의 상황으로 설정한다면 당연히 무리가 따르겠다. 주인공이 단지 꿈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며 육식을 거부하는 완강함도 눈에 거슬린다. 다만 잠깐이라도 무심히 행해온 일로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녀의 주장대로 우리는 무고한 목숨을 참 많이도 취해 왔다. 거리낌 없이 먹고 마시면서 목숨의 존귀함은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임이 사실이다. 애초에 가졌던 순수를 어디서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돌아보고, 이 위험천만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편승한 자신을 점검할 일이다. 언제부턴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는 우리의 심장을 되살려야 한다.
돈 사냥꾼에게 치고받고 싸우는 싸움판만큼 매력적인 수단이 또 있을까. 구경하면 싸움구경, 불구경이라 했다. 그들은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를 스크린에서나마 위안을 얻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비열하게 돈을 만드는 그들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더니 급기야 잠자던 인간의 폭력성에 불을 지핀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동화처럼 살다 가신 권정생 선생이 그립다. 그는 “하느님의 눈물”에서 주인공 돌이토끼를 통해 이렇게 애원했다. 돌이 토끼는 자기가 살려면 남의 목숨을 취해야 하는 서늘한 진리 앞에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괴로워한다. 우연히 하나님을 만나 그 해답을 듣는다. 하나님은 무엇을 먹고 사냐고 물었더니 보리수나무 이슬과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을 먹고 산단다. 밝은 낯빛으로 자신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청한다. 하느님처럼 먹게 되면 다른 목숨을 취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하느님은 조건부로 약속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돌 이토끼 같이 맑은 마음을 가지는 날, 그런 날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처럼 오늘도 하늘에서는 눈물방울이 멎지 않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점점 더 포악해지는 세상이니 하느님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겠다. 돌이 토끼가 소원을 이루기는 쉬운 일이 아니나 무고한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이 괴로워 종일 굶었던 돌이토끼를 이해하는 마음이 늘어나길 바란다.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이 오락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는 일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