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초등학생 때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여덟 살에서 열한 살 무렵까지의 기억이 흐릿하다. 잘 지내던 동네에서 8살 초등학생 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 봐야 차로 2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나 먼 곳이었다. 가기 싫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내가 가장 관심 가졌던 일은 마당 화분에 봉숭아 씨앗을 뿌리고 바람과 햇살을 주어 이쁘게 기르는 일(3학년 일기에 적혀있다)이었다. 꽃과 강아지, 병아리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감성적이고 따뜻한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새로 이사를 간 동네는 너무 낯설었다. 이사를 간 후로부터 엄마까지 일을 시작하시면서 방과 후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만화 '개구리 왕눈이'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고 '개똥벌레'는 나를 위로하는 노래였던 것으로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고 낯선 곳이어서 그런지 친구도 쉽게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서 텔레비전을 자주 봤다.
그런 내게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동네 친구들이 생겼다. 아마 여덟 살 때부터 열한 살 사이에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새로운 곳에서 외로웠던 나는 친구가 생겼음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놀고 싶지 않을 때조차 만나기를 강요받았고, 그들은 나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빵셔틀처럼 나를 휘둘렀다.
어느 날 그 무리는 우리 집에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수영장 놀이를 해야겠다며 욕실과 싱크대에 있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콸콸 틀고 잠그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 당시 반지하였는데 유난히 욕실의 턱이 높았다. 영화 기생충에도 보면 욕실은 조금 더 높은 걸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턱이 높은 욕실에서 물이 흘러넘쳤다. 물은 마룻바닥 위에 채워져 마치 풀장을 연상캐했다. 그 무리는 물이 가득한 우리 집 마룻바닥 위에서 첨벙 대며 신나게 놀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가지를 들고 그 물을 욕실 하수구에 퍼 담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집으로 가야겠다며 다들 우리 집을 떠났다. 8시면 엄마가, 9시면 아빠가 집에 오신다. 그전까지 물바다가 되어버린 이 집을 어떻게 해서든 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홀로 남아 집에 있는 모든 바가지를 동원해서 물을 퍼 버리고 걸레로 닦기를 반복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신 어머니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물음에 깜빡하고 욕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어디를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걸레의 물기를 짜며 바닥으로 눈물을 떨궜던 것 같다. 나는 언니들이 무서워 부모님께 사실을 말하지 못 했다.
그 이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악마 같은 아이들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한 무리가 이사를 가고 난 뒤에는 같이 놀지 않던 다른 집 언니가 나를 괴롭혔다. 그 년(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으니까)은 내가 한 무리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나를 새롭게 괴롭혀온 인물이다. 놀러 가기 싫은데 주말마다 놀러 올 것을 강요받았다. 상대가 나를 난처하게 하고 힘들게 하더라도 항상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었다. 고작 8살에서 11살까지의 일인데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상처로 남아있는 걸 보면 꽤나 큰 아픔이었던가보다.
어른이 된 아이
그날의 상처가 내가 성인이 되서까지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들은 알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가해자는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도 피해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까. 나는 이름도 얼굴도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심지어 두 명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 그럼에도 정말 다행스러운 건 그 이후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누군가 나를 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런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해봤다. 사람의 습성은 그리 잘 바뀌지 않는 듯 매번 실패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연애도 해봤던 거고, 가스 라이팅도 당해본 게 아닐까. 혼자인 시간은 사실 나 자신에게나,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어주는데 나는 그 '혼자'가 무척 외로웠다.
외로움은 정말로 나쁜 사람들을 쳐낼 힘이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게 집착하거나, 상대가 나를 막대해도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는 편이 훨씬 덜 괴롭다고 느끼니까 자신에게 독이 될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간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하자면 혼자인 게 두려운 사람이겠지.
오랜 시간 돌고 돌아 나는 스물여덟의 나이가 되어서야 어린 시절의 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제는 잘 웃고 밝은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도 좀 내려놓고 살아도 되려나. 지금은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 눈이 생기고, 그런 이들이 곁에 없어도 혼자인 시간을 견딜 힘이 좀 생겼으니까. 나는 아직도 혼자인 시간이 두렵고 싫지만, 그렇다고 내가 또 완전히 ‘혼자’인 건 아니니까. 조금은 덜 두려워해도 되지 않을까.
나와 비슷한 결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