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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계영 Dec 10. 2016

서면이나 문자로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하자면 그는 아마추어 작곡자인 셈인데 4곡 정도를 썼다고 했다. 몇 차례 부탁한 끝에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자기 연주를 보여 주었는데 건반 위엔 손만 보였으므로 우스갯소리로 ‘정말 자기가 맞냐?’고 물었다. 해맑은 웃음과 함께 돌아온 그의 대답이 머리를 쳤다. “연주를 잘 못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연주할 때 그 감정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져요! 보시는 분들은 느낄 수 없겠지만 …”
 
우리는 말과 뜻이 통하지 않아 서로를 원망하는 ‘소통의 부재’ 시대를 산다. 돌이켜보면 말을 배운 이후로 (의사)소통의 최소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거나 누군가와 생각을 나눠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개는 6하원칙(5W1H.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를 갖추어 말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배운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내용을 갖추어 말하면 대화(對話)가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건 ‘화(話, 일방적인 말하기)’와 ‘대화(對話,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를 구분하지 못하는 큰 착각이다.
 
근 몇 달 모든 이의 관심 한가운데 락인(lock-in)되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위 정치인이 ‘전화, 인터넷 같은 고급 통신 기술이 있는 시대에 서면 보고면 충분하지 대면 보고가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하면서도 자기도 멋쩍은지 어색한 웃음으로 두리뭉술 말꼬리를 흐리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대면 보고엔 있지만 서면 보고엔 없는 것—그것은 서로를 동시에 마주 대(對)하는 현장이다. 여기엔 우리가 배운 말하기의 필수 요소엔 나오지 않지만 (너무 당연해서 다들 쉽게 빠뜨리는)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실시간으로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점을 다시 물어 확인하거나 밀당을 하면서 차이를 좁히는 장면이 없다.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연주할 때 그 감정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져요! 보시는 분들은 느낄 수 없겠지만 …

대화는 실시간성을 요구한다. (청각 장애와 같은) 특별한 방해 요소가 없다면, 대화는 소리로 주고 받아야 한다. 소리가 빠지면 우리가 보통은 의식하지 못하는, 하지만 누구나 반드시 느낄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정보가 누락된다. 전문 용어로 ‘초분절적(suprasegmental)’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문 용어조차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특징들, 말에 실리는 감정—염려나 낙관, 내키지 않음이나 흔쾌함, 0.5초의 머뭇거림 등—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던지는 애매모호함, 비꼼, 이중적 태도 같은 고난이도 언어 전략은 실시간성이 없으면 도저히 처리 불가능하다. 사랑의 밀어로부터 거창한 정치 협상에 이르기까지 장기나 바둑을 두듯 서로에 대응하는 실시간성이 누락되면 그것은 소통의 지연 혹은 실패를 뜻할 뿐이다.


화자의 말이 입에서 나와 잠시 공기를 울리며 청자의 귀로 들어가는 짧고도 소중한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 머리속 임시 기억에서 그 소리의 울림조차 사그러져 버리면 잠시 후엔 ‘뭐라고 하셨었죠?’ 재차 요청하는 수밖엔 달리 방도가 없다. 이쯤에서 그 아마추어 작곡자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연주할 때 그 감정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져요! 보시는 분들은 느낄 수 없겠지만 …”


서면이나 문자로 소통할 수 있다고? 그건 정말 뭘 모르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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