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리뷰
감정에는 희한한 특성이 있다. 우선, 감정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계량화 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사람마다 감정의 양과 질이, 맥락과 발현이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어와 문장, 즉, 언어를 통해 감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 아래 여러 감정들을 묶는다. 그를 통해 서로 공감한다. 어쩌면 비정상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다른 누군가 역시 느낀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슬픔, 분노, 혼란, 두려움,... 그런 단어가 무척이나 크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 감정을 다 설명할 수 없는 듯한 느낌. 당연하다. 이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 느끼는 건지, 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건지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지 않은가? 조금 더 섬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설명이 늘어날수록 공감하는 사람은 적어질지 몰라도 공감의 깊이는 깊어진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 준 책이 바로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이다.
이 책은 '사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책이다. 그는 여러 감정들에 정성껏 이름을 붙였다. 여느 사전처럼 단어를 먼저 알고 뜻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책을 읽듯 읽다 보면 언젠가 느꼈던, 찾고 싶었던 감정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어원부터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단어,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보다 섬세한 사전을 본 적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코웃음이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아, 정말! 뭘 그렇게 하나하나 복잡하게 생각해?”
어쩌겠어? 모르긴 해도 이 사전의 페이지마다 내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 있는 것 같은 것을.
요즘 내 마음을 읽은 것만 같았던 단어 몇 가지와 이 책을 좀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공감하기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사는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단어 아래에 사는 동안 한 번은 느낀 적 있는 상황이나 감정들이 묘사되어 있다.
'어,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소름!'
나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니구나, 하고 신나는 느낌을 즐긴다. 옆 사람을 붙잡고,
“이거 이거! 진짜 내 마음 같아! 넌 이런 거 느껴본 적 없어?“
하고 말하기도 한다.
오즈유리(OZURIE)
당신이 원하는 삶과 당신이 살고 있는 삶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기분
어원 : Oz(오즈) + the prairie(대초원),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끼인 you(당신).
사실 위 단어에 대한 설명은 훨씬 더 길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가 나의 감정을 투영하는 대상이 된다. 현재 살고 있는, 평화롭지만 동시에 재미없는 캔자스와 어딘가 재밌어 보이는, 하지만 미지의 것 투성이인 오즈 사이를 오가는 도로시의 마음이 꼭 나 같다. 어떤 특정한 삶의 모습을 원할 것, 그러면서도 현실에 충성할 것을 다방면으로 강요받으며 혼란 속에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이라면 '오즈유리'를 느끼지 않을까?
극복 방법 생각하기
대하기 어려운 감정에 대해 그것을 극복하는 사고방식을 구상하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라웃워시(routwash)
여러 해 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는 적은 성과만을 확인하고서, 즉 줄곧 기술과 인맥과 경험을 모았음에도 결국에는 그중 대부분이 거의 무가치한 것, 소액 현금의 가치밖에는 되지 않는 것, 이력서에 쓸 한 줄, 약간의 칭찬, 한 줌의 작두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공포를 느끼는 순간.
어원 : rout(패주) + wash(근소한 투자 수익률) + outwash(녹은 빙하에서 흘러내린 자갈투성이의 퇴적물).
이런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왜 없을까? 십수 년 공부해 겨우 얻은 대학 졸업장 쪼가리, 수십 년 일하다가도 퇴사하면 어디에도 내밀지 못할 명함 한 장 등 한 줄 요약도 가능한 나의 업적들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순간이 있다.
이럴 땐 따지고 보면 모두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쟤도 나랑 같은 졸업장, 걔도 나랑 다를 바 없는 명함이라면, 원래 그런가 보지. 이 종이의 가치가 나한테만 야박한 게 아니면 됐지. 종잇장의 무게가 생각보다 대단한가 보지. 내 것만 크기가 작은 건 아닌데 뭘. 작은 걸 이리저리 많이 쌓아봐야지 어쩌겠어. 그 안에 나의 꽉 찬 이야기가 있는데 어쩌겠어.
다른 이름 붙여보기
내가 단어의 창조자가 되는 방법이다. 이 책은 존 케닉의 끈질긴 노력, 감정을 가장 잘 묘사할 만한 어원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독자로서 단어를 창조해 보려는 노력을 해보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와일드(idlewild)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 이를테면 공항의 게이트, 기차의 침대칸, 장거리 자동차 여행 중에 밴의 뒷좌석에서 몇 시간 동안 앉은 채 - 발이 묶이게 된 것에 고마워하는. 늘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일시적으로 덜어버리고 머리를 해방시켜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고작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는 일이라고 해도.
어원 : 뉴욕에 있는 케네디 국제공항의 원래 이름인 Idlewild(아이들와일드 공항).
'Open Hand(열린 손)'은 어떨까? 손가락이 열려 있어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누군가 억지로 뭔가를 쥐어주더라도 스르륵 빠져나가는 상태. 할 일을 안 해도 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반영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이밖에도 '삶의 현시점에서 여전히 실현 가능한 모든 기회의 저수조'를 의미하는 ’틸(the Til)‘,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절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뜻하는 ’틱록(TICHLOCH)‘ 등 여러 가지 용어와 의미가 나온다. 슬픔, 기쁨, 그 포괄적인 단어에 묻혀버린 상세한 감정들에 붙은 이름을 확인할 때 오는 안도가 있다. 없는 감정이 아니다. 언뜻 특별해 보이는 나의 감정을 누군가는 느끼고 있고, 그렇게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만 힘든 건가 싶은 사람에게, 딱히 힘든 건 아니더라도 내가 느낀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참고로 이 책에 나온 감정들이 모두 슬픔인 것은 아니며, 책의 형식이 사전인 만큼 무덤덤한 언어로 서술되어 있으니, 심연에 빠질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오히려 '산더(sonder)'를 느끼고 위안을 받지 않을까(*).
* 산더(sonder) : 모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깨달음
출판사에서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