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쿼터는 미국에서 쓰는 25 센트 짜리 동전을 말합니다.)
나의 신혼집은 필라델피아의 이탈리안 빌리지에 있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정착했던 곳이라 맛있는 식당이나 재밌는 가게가 많았고, 다양한 종류의 소시지며 치즈, 풍성한 과일류를 파는 커다란 시장도 있어 관광객도 제법 많은 곳이었다. 페스티벌이 열리면 젊은 예술가들과 식도락가들이 모여들었다. 거기서 두세 블록 옆으로 큰길을 건너면 베트남 거리가 시작됐다. 맛있는 쌀국숫집이 줄지어 있었고, 당시에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한 케이팝이 울려 퍼지던 대규모 중국계 베트남 마켓도 여럿 있었다. 그 동네엔 그래서 백인과 아시아인이 흔했다.
아이가 생기면서 조금 더 넓혀 이사를 갔던 곳도 교외의 부촌이었다. 한적하고 나무와 꽃이 많던 그곳에는 백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좋은 동네 도서관이 있었고, 그곳에는 신간을 뒤적이는 사람들과 책을 빌리러 온 아이들, 로비에서 친구를 만나 한가롭게 브리지 게임을 즐기던 은퇴하신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면서 작게라도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던 우리는, 남편 학교와 멀지 않은 도심의 주택가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졸업을 앞둔 남편은 논문을 완성하느라 늦은 시간에도 종종 학교에 가야 했고, 학생 신분에 독채를 구하려니 동네가 다소 허름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분위기가 꽤 달랐다. 흑인이 많은 동네였다. 길 건너 예배당에선 불교신자인 나도 들썩이게 만드는 경쾌한 가스펠이 울려 퍼졌고, 골목을 누비며 자전거 곡예를 연습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집을 기준으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위기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철창으로 손님과 주인 사이를 막아놓고 주류와 담배를 파는 가게가 있었고 집과 멀어질수록 정돈되지 않은 거리며 공터들이 늘어났다. 마당 없는 집들이 붙어있어 여름이면 온 가족이 집 앞에 나와 부채질을 하는 모습도 흔했다. 꼭 여름이 아니어도 그들은 날이 좋으면 대체로 집 앞에 온 가족이 나와 있는 듯했다. 아이들은 길에서 어울려 놀았고 이웃들은 정답게 담소를 나눴다.
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며 동네를 탐험하곤 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유모차를 밀고 여유롭게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와 아이의 안전에 민감했고, 신기한 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당황스러웠고, 마음은 이것저것을 재단하느라 바빴다.
이 블록 밑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 노는 아이들도 많은데 길에 깨진 유리가 저렇게 널려 있다니.
가족들이 길을 온통 차지하고 있어서 유모차가 지나갈 공간이 없네. 잠깐, 이 집은 아이가 대체 몇 명인 거지?
그런 부끄럽고 못난 마음속 독백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멀리서 한 아저씨가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나를 부르는 거지? 왜 그러냐 묻는 나에게 계속 큰 몸짓으로 이리 와 보라며 부른다. 왜요, 라는 표정을 유지하며 다가갔더니 나와 아이를 보며 웃는다. 그리고는 자기 주머니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돈을 달라는 건가?
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기에 바디랭귀지로 동전을 부탁하는 건가 싶었다. 물건을 사러 나갈 때도 가끔 당당하게 지갑을 안 들고 가는 나는 그때도 지갑이 없었다. 멋쩍게 "제가 지금 지갑이 없는데요..."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가 뒷주머니에서 찾은 쿼터 하나를 아이에게 내밀면서 환하게 웃었다. "너 정말 귀하고 예쁘구나. 이거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곧이어 뒤에서 등장한 아주머니는 녹을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보더니 유모차를 어루만지며 아이에게 축복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잘 왔다 아가야. 너는 이 생에서 좋은 것을 가득 누릴 거란다. 그리고 최고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거야. 신이 너를 축복하기를."
나는 이 동네에 온 것을 서늘하게 경계하고 있었으나 나의 아이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온 것을 따뜻하게 환영받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못난 마음조차 따뜻하게 비춰주던 그 반짝이던 쿼터와, 그보다 더 반짝이던 그들의 미소를 잊지 못한다.
- <좋은 생각> 10월호에 실린 글의 초안입니다. 실제로 실린 글은 지면을 맞추느라 여기에서 많이 줄었습니다.
기자님께서 이런저런 굿즈를 정성스럽게 담은 소포를 보내주셨네요. 책 읽는 곰돌이가 누워있는 저 “좋은 생각” 에코백 너무 귀엽지 않나요? 요즘 최애 에코백으로 사용 중입니다.
대학 시절에 군에 간 후배들에게 정기구독을 해 주곤 하던 잡지였는데 (왜 그랬을까요. 거기서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의미였나 아님 편지 써주기가 싫었나.) 원고 청탁을 받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덕분에 제 못난 에피소드 하나 세상에 내놓습니다.
아무나 붙잡고 사과하고 싶은, 그때의 부끄러운 생각들.
- 신혼집과 이탈리안 빌리지의 풍경들
- 몇 달러만 들고 가도 A4 용지만한 피자 조각을 입에 물고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들고 올 수 있었던 이탈리안 마켓
- 우리를 늘 웃겨주던 베트남 마켓 (한류 덕분에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이 높았고, 한국 제품이 믿을 수 있는 품질로 선택받던 탓에 벌어진 포장 대참사)
- 새로 이사 갔던 필라델피아 남쪽 동네 풍경들
- 동네 산책을 너무 좋아하던 자식 놈의 귀염 뽀짝 하던 시절
- 아저씨가 주신 그 쿼터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며 돌아온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