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참 미안하게 됐지만 (음?) 어렸을 적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예쁜이였다. 추석 무렵이면 아빠는 한복을 입은 나를 차 옆자리에 태워서는 마스코트처럼 데리고 먼 지역의 사업장을 돌아다니셨고, 엄마는 늘 누가 나를 유괴해 갈까 봐 불안하셨다고 했다. (효녀인 나는 그 마음을 안심시켜 드리고자 곧 복어처럼 몸집을 단박에 키워내 부모님께 이너 피스를 드리는 데 성공한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1학년이 되어 머리를 쫑쫑 땋고서 빨간색 쓰리세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내 뒷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뭉클하더란다. 요 예쁜 것이 가서 못 돌아오는 게 아닐까. 누가 덥석 집어가는 건 아닐까. 내가 셋째라 간질간질한 마음이 무뎌지실 법도 한데, 유독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잘 돌아오나 싶어서 일찍 나와 집 밖에서 서성이곤 하셨다고. 엄마가 내게 주신 사랑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다. 넷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에서 특별히 내게 주신 추억담이라 아마 더 기억에 남은 듯하다. 아직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던 엄마. 나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을 엄마의 그 모습과 그 안에 든 마음을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런 엄마가, 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바로 그 날 돌아가셨다. 2020년 9월 8일.
훨훨 날아와 아이의 입학식을 보고 싶으셨던 걸까.
작년에 엄마를 한 달 정도 보살펴 드리러 한국에 갔을 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엄마가 세상과 인사하실 때가 되면 나도 고국에 날아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안고 사랑의 인사를 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사망 진단서가 있지 않고서는 고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 아니 사망 진단서가 있어도, 대사관에서 격리 면제서를 받느라 기다려야 하고 또 대폭 줄어버린 항공편 때문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루를 살아야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울기만 하고 싶은 날에, 평소처럼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밥을 지으며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서럽고 억울했다.
내가 외국에 나와 공부하는 동안 엄마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셨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주위에 밝히는 것조차 싫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늘 주위에 따뜻하게 베푸시던 엄마였다. 어느 모임에서나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아주는 그런 역할을 하셨다. 어디서나 큰 어른으로 대접받던 엄마가 아이처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고, 그래서 사람들이 엄마를 예전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엄마를 꽁꽁 싸매드리고 싶었다. 그렇게나마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고국에 계신 엄마께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엄마는 알릴 때마다 진심으로 놀라셨고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때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것의 축하와 축복을 듬뿍 부어 주셨다. 매번 처음처럼 어쩔 줄 모르며 기뻐하시는 목소리를 듣는 건 벅찰 만큼 감동적이기도 했고 매번 눈물이 차오를 만큼 슬픈 일이기도 했다. 내가 엄마가 되려는 순간 그렇게 나는 나의 엄마를 서서히 잃어갔다.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내 마음은 뭉클함이 밀물처럼 차올랐다가 서러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텅 비고는 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아졌는데,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갈 곳을 잃은 마음만 한 해 두 해 쌓여갔다.
엄마의 머릿속에 든 안개는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짙어졌다. 엄마의 알맹이는 어디론가 점점 흩어지고 껍데기만 남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엄마가 보고 싶어 달려간 곳에는 분명히 우리 엄마인데 우리 엄마가 아닌 분이 누워 계셨다. 참 모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래도 나는 부지런히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안고 쓸고 뽀뽀하고 주무르고 말을 걸고 밥을 먹였다. 그래도 엄마는 날 보고 웃었다. 엄마라는 소리에 반응도 하고,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손도 잡고, 뽀뽀를 하면 뽀뽀도 해 주시고, 엄마가 늘 내게 불러 주시던 <You are my sunshine> 노래를 불러 드리면 노래에 맞춰 손도 까딱까딱하셨다. 그렇지만 가끔은 뭔가 힘이 풀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세상을 놓아 버릴 듯한 표정을 했다. 나를 알아보는 날보다 못 알아보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날이 많았다. 손녀가 옆에 놓아 드린 강아지 인형을 오래오래 천천히 만지작거리는 엄마. 내 앞에서 돌도 안 된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
김영하의 소설 <오직 두 사람>에는 각별했던 사이의 부녀가 등장한다. 소설 말미에 딸은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보며 저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복사된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말을 전혀 하지 못해요. 열한 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치고 나온 뒤로는 더 이상 제가 알던 그 아빠가 아니에요. ... 아빠를 복사한 누군가가 환자복을 입고 저기 누워 있어요. ... 주말마다 같이 영화를 보고,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철학에 대해 토론하고, 제 몸매의 단점을 가장 잘 가려줄 수 있는 패션에 대해 여자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때로는 아예 쇼핑까지 함께 나서던, 젊고 자신만만하던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요?
복사. 약간 불쾌한 감정마저 들어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감하던 부분이다. 이제야 인생을 조금 알 것 같은 막내딸의 등을 두드려 줄 나의 현명한 엄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안에 이렇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이 넘치는데, 그 마음과 사랑을 전해 받고는 빙그레 웃을 다정한 엄마는 어디에 간 거지. 늘 입을 엄마 볼에 붙이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엄마의 눈은 허공을 향해 있거나 맥없이 감겨 있었다. 뒤늦게 이런 마음을 전하는 당신은 누구세요, 하는 그런 공허한 눈빛. 그래도 그땐 그게 좋은 줄을 모르고 아파하기만 했다. 하지만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코로나는 자식들이 그 복사된 육신마저 만져볼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이젠 껍데기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육신마저 없어졌다는 게 이렇게 엄청난 느낌일 줄은 몰랐다. 세상이 텅 빈 느낌이고 눈물은 끝도 없이 새어 나왔다.
코로나는 결국 엄마가 마지막 가시는 길의 단 한 장면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발인 날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여섯 시간 넘게 공항에 발이 묶여,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었을 때에서야 겨우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아끼던 막내딸이 너무 마음 상하지 않도록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렇게 나를 만나고 싶으셨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의 유품 중에서는 조끼 한 벌과 반들반들해진 작은 염주 하나를 챙겼다. 조끼에 붙어있는 얇은 머리카락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으면서 눈물이 나서, 황급히 그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끼를 단단히 돌돌 말아 챙겼다.
엄마를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봤다. 사람들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아 따끈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마법이 우리를 위로해주는 알록달록한 이야기가 고팠다. 실제로 메리 포핀스에 나오는 <A Spoonful of Sugar>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Just a spoonful of sugar helps the medicine go down in a most delightful way”라는 노래 가사처럼, 마음속 응어리를 살살 가라앉혀 줄 꿀 한 숟가락이 먹고 싶었달까. 그렇게 본 영화에서 아빠인 마이클 뱅크스 씨가 이런 말을 한다. (생각해 보니 그 집 자식들도 모두 엄마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생각이 짧은 나여.)
맞아. 엄마는 없어진 게 아니야. 엄마는 조지의 미소에, 존의 걸음걸이에, 애너벨의 눈에 있어.
(Of course, you are right, George. Your mother’s not gone. She is in your smile. And in your walk, John. And Annabel’s eyes.)
엄마는 늘 내가 아빠를 더 닮았다고 했지만 내 얼굴 어딘가에, 내 몸짓 어딘가에, 그리고 내 기억 속에 계시는구나. 웃으며 위로를 받자고 본 영화에 그렇게 또 못난 얼굴을 하고 질질 울며 뭉클한 위로를 받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 그토록 나를 서럽고 억울하게 만들었던 것이 일상이었는데, 돌아와 다시 일상의 담백한 품에 안기는 것이 또 위로가 되고 있다. 엄마가 돌아왔다고 차에서 앞다투어 내려 반갑게 달려오는 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오묘한 표정이 뭉클했고, 착 안겨서 두 손 두 발에 모두 힘을 주어 엄마를 꼬옥 안아주는 아이들에게서 에너지가 급속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없는 동안 폭탄 맞은 집을 보는 것도 그냥 좋았다. 2주간 고군분투한 남편의 흔적과 못 본 새 반 뼘 정도 자라난 아이들의 흔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리도 대 보고 발도 대 보고 하느라, 시차 때문에 일찍 깨버린 시간들이 무겁지 않게 채워진다. 구석구석 돌보며 엉망으로 놓인 것들을 들어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 주면서 엉망이던 내 마음도 슬그머니 제 자리를 찾고 있다.
돌아와서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엄마 생신을 지우고 기일을 기입했다. 그리고 아이를 한글학교에 데려가는 남편에게 뮌헨 시내의 한국 식품점에 들러 쌀가루를 사 오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해 주셨던 것처럼 아이들과 송편을 빚어볼 생각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송편을 빚던 추억은 내 유년기의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송편을 만들면서 엄마가 어린 나에게 해주셨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엄마가 내게 남겨 준 따뜻하고 고소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겨줄 것이다.
지난 겨울, 엄마를 한 달 정도 돌보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야 했던 마지막 날. 엄마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열심히 기운을 쥐어짜 내게 건넨 말이 있었다.
“다 잘... 다 잘...”
“가서 다 잘하고... 잘 키우고...”
깜짝 놀라 엉엉 울어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마법처럼 나의 엄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다 잘하고, 잘 키워볼 생각이다.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지지 못한 것을 곁눈질하느라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이 빛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도록.
그것이 나에게 생을 주신 분께 감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경황이 없어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발행했던 글들은 예전에 써서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것들이었고요. 이 곳의 좋아하는 작가님들 글도 정말 오랫동안 제대로 챙겨 읽지를 못했네요. 이제 정신 차리고 서서히 읽고 쓰는 삶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엄마와의 이별에 대한 글을 이렇게 빨리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냥 며칠 전 어느 새벽에 마음이 스르르 흘러나와버렸습니다. 이슬아 작가의 강연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을 내 속에 초대해서,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내뱉은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일이라고. 롤랑바르트 역시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하죠.
글 속에 나의 엄마를 담아두는 일, 그 작업을 천천히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한 시간들을 꺼내어 먼지를 툭툭 털고 말갛게 닦아서, 나도 내 아이들도 다른 이들도 볼 수 있게 불멸화하고 싶다는 생각. 글로 엄마와 다시 만나고 천천히 인사하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썼습니다. 또 마음이 차올라서 주르륵 흘러나오면 한 편 두 편 써보고 싶습니다.
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따뜻한 추석 보내시기를.
사진은 국화 대신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꽃으로 골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