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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Apr 05.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여섯째, 고소한 맛

뒷산 우유와 순두부, 새우튀김, 참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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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는 서울 미아동에 살았다. 옆 동네는 번동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당시에는 산이 많고 그리 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약 20년간 서울 강북구에 존재했던 꿈의 동산 드림랜드를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내가 뒷산으로 기억하는 곳, 즉 드림랜드가 되기 이전의 그 부지가 이 글의 첫 번째 음식을 만났던 장소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왜곡되기 쉬워서 실제로 얼마만한 산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공간 지각력과 방향감각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학교 다닐  단과대 건물 입구로 들어가서 어느 쪽으로 꺾어야 과방이 나오는지 아니면 학생회실이 나오는지를 맨날 헛갈려서 결국 졸업할 때까지  비밀을 풀지 못했다. 대학원 다닐 때는 동문회관에 행사가 있어  전해 드리러  일이 있었는데, 호기롭게 길을 떠났다가 길을 잃어 후배들이 구조대를 파견한 경력도 있다. 참고로 내가 주로 생활하던 연희관에서 동문회관까지는 그냥 큰길만 따라가면 되는 구조라,  정신으로 길을 잃기에는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구간이다. 그래서 내가 뒷산으로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거기라는 자신감은 없다.  아님 말고.


어쨌든 내 기억으로는 동네 뒷산이 있었다. 들판 같은 평지와 산이 어울려 있던 지형이었는데, 겨울에는 거기에 스케이트장이 생겨서 동네 꼬맹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스케이트장이라고 구분 짓느라 쳐 둔 낮은 가림막이 있었고, 그 앞에서 팔던 달고나 냄새가 차가운 공기와 섞여 코끝에 스치던 곳. 겨울방학이라 못 보던 학교 친구들을 그곳에 가면 잔뜩 마주치곤 했다.


봄가을에는 주말에 가끔 온 가족이 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는 투견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싸움만 시키는 게 아니라 잡아먹기도 한다는 얘기를 반 친구들에게 들었다. 잔인한 장면을 미리 막아주시고 가려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그토록 그곳에 자주 갔으면서도 번동 사는 친구들이 봤다던 피 흘리는 개도, 잔인하게 맞는 개도, 불에 그을려지는 개도 본 적이 없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벌렁한 그 장면을 직접 봤다면 내 어린 시절은 그토록 평온하진 못했을 것 같다.


투견장 얘기를 왜 했냐면 아무래도 내가 이 음식을 만나던 곳이 투견장 부근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던 느낌. 하지만 그때는 그냥 가족들과 함께 산책 나온 개들이 서로 싸우나 보다 했다. 어쨌든 나는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가건물처럼 지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갓 짜낸 따끈한 우유와 갓 만들어낸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팔았다.


우유도 순두부도 평소에 자주 먹는 것들이지만, 이곳의 우유와 순두부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와 맛을 하고 있었다. 우유는 보통 유리컵에 차갑게 마시는 걸로 알았는데, 여기에서 주는 우유는 호호 불며 마시면 좋을 온도였고 마시기 전에 소금을 쳐 주셨다. 세상에 그렇게 고소한 우유는 처음이었다. 바로 짠 우유는 멸균과정을 거치지 않아 배탈이 나기 쉬우니 끓여서 팔았던 것 같은데, 끓일 때 나는 냄새부터 참 고소했고 무엇보다 소금이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나는 갓 짠 우유에 대한 환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따듯하고 고소하던 맛.


우유도 갓 짠 우유였지만 순두부도 갓 만든 순두부였다. 그곳에선 아주 커다란 솥단지를 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직접 순두부를 만들고 계셨다.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성기게 엉겨 붙은 모습이 조금 낯설고 신기했는데, 주문을 받으면 바로 한 국자 듬뿍 떠서 김가루와 깨를 얹어 주셨다. 어른들은 고춧가루를 더하시곤 했다. 숟가락으로 먹는 순두부가 아니라 양푼 대접을 들고 후루룹 마시는 순두부였다. 몽글몽글하고 연한 순두부가 목구멍을 타고 훌훌 넘어가면 입에는 고소한 맛이 퍼졌고 가슴께가 따뜻해졌다. 그 맛에 홀린 우리들은 산에 올라가는 일이 제법 힘겨웠음에도 군말 없이 올라 우유와 순두부의 맛에 행복해하곤 했다. 사실 순두부는 ‘고소한 맛’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아이템이다. 하지만 내게는 추억 속 고소한 맛으로 당장에 그 몽글몽글한 순두부가 몽글몽글 떠올랐을 만큼 참 고소했다.


미국에 가서 우유를 처음 맛보고 뱉을 뻔했다. 화학적 처리를 거쳤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듯한, 약품 맛 같은 게 섞인 우유였다. 정말 오만상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1년 여의 좌절과 방황을 거친 후에 정착한 우유는 초원에서 행복하게 길렀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붙은, 우유갑에는 그야말로 만사가 잘 풀려 행복해 보이는 소의 얼굴이 그려진 우유였다. 나는 뒷산에 올라 마셨던 우유와 순두부를 통해 좋은 맛이란 자연의 방식대로 키우고 직접 소규모로 만들어 먹을 때 나오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갓 나온 따뜻한 것의 고소함이란 그 자체로 다른 이런저런 재료의 첨가 없이도 참 빛난다는 걸 알았다.


개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에게 따뜻하고 고소한 우유를 주던 소들도 아마 그 비명을 듣고 가끔은 개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인간의 잔인함이란 음식 분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때려서 잡아야 육질이 연해진다거나, 아니면 정말로 연하디 연한 어린 생명을 잡아먹는 게 맛이 좋다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좁은 곳에 두고 키워 비정상적으로 살찐 간을 얻는다거나. 이 글에서 이 민감한 주제를 길게 다루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 생각만큼은 슬쩍 놓아두고 싶다. 우리가 고소하고 달게 먹는 음식을 위해 다른 생명을 쓰라리고 잔인하게 대한다면, 그걸 그렇게 고소하고 달게 느끼고 싶지는 않다는 것.


우리는 먹이사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매일매일 세상을 조금씩 먹어치우며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안녕에 대해 완벽히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먹이사슬이란 것은 매정한 것이지만, 그래도 일부러 사슬에 가시를 박아두고 사슬에 온갖 똥칠을(피하고 싶은 표현이지만 이만큼 어울리는 단어를 못 찾겠다) 하면서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첫 번째 고소한 맛, 뒷산 우유와 순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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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튀김.

튀김이라는 음식이 존재함으로 인해 인생은 살만하다. 냄새부터 고소하고 소리부터 황홀한 튀김. 튀김이라는 조리법을 발견해 낸 사람에게 인류가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노벨평화상이라도 주었어야 하는 건데. 인생을 돌아보면 튀김과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튀김이 맛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찬란하신 튀김 중에서도, 단연 튀김 중의 튀김은 새우튀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새우튀김은 귀한 아이템이었다. 아빠 손님이 많이 오시는 날, 새우튀김은 주로 어른들 상에 안주로 올랐다. 우리에게는 깻잎튀김이나 고구마튀김, 야채를 채 썰어 반죽에 버무려 튀겨낸 야채튀김이 배당되곤 했다. 물론 맛있었다. 바사삭, 입에 넣을 때의 그 소리와 고소한 기름 맛. 그래도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어쩐지 술 냄새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감도는 그 자리에 갔을 때, 새우튀김이 남아있으면 나는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의 기분을 느꼈다. 심봤다.


새우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새우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는 편이다. 머리와 꼬리를  씹었을  느껴지는 풍미가 좋아서, 껍질을  것보다 부드러운 껍질이 적당히 붙은 새우를 좋아한다. 가까운 지인 중에는 새우가 징그러워서  먹는 언니가 있고 (특히 맵시 있게 길게 기른 수염에 기겁) 새우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는 동생이 있다. 아니 이렇게 맛있는   먹다니, 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내가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는 걸 안다. 사실 맛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메뚜기나 식용 바퀴벌레를 두고 누가 나더러 이 고소한 걸 못 먹는 게 안타깝다고, 머리와 다리를 꼭꼭 씹었을 때 느껴지는 풍미가 좋다고 한다면 나는 오 마이 갓, 그 안타까움을 부디 그냥 마음에만 간직해 주셨으면 하겠지. 내가 구수함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는 청국장을 내 이웃인 힌터홀쩌 부부에게 들이대고 같은 맛을 느끼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트라우마성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다니 너무 안됐다”라고 말하는 건 또 상대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로 고소한 맛이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피하고 싶은 맛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일곱 가지 맛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에게는 새우가 들어가는 것들은 대체로 맛있다. 엄마의 사랑과 비법이 담긴 양념 새우젓도 참 입맛 당기고, 대하 철에 굵은소금을 깔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대하를 올려서 찌듯이 구워 먹는 맛도 일품이고, 중식당에서 나오는 칠리 새우며  크림 새우에는 잠시 정신을 잃는 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새우 본연의 맛을 한껏 살려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새우튀김이라고 믿는다. 식용유 광고에도 거의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게 새우를 튀기는 장면일 만큼 새우튀김은 오감을 만족시키는 요리다. 차르르르 튀겨지는 황홀한 소리, 기름 냄새에 새우 향이 배어 고소함이 배가 되는 그 냄새, 빨간 꼬리로 포인트를 준 황금 같은 노란 자태, 입에 물었을 때 귓속을 파고드는 그 행복한 바사삭 소리, 단짠 단짠이 애초에 조화롭게 배치된 고소한 그 맛까지, 실로 종합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달콤하고 고소한 바다의 맛이라니.


새우튀김은 맛있다고 무한히 먹을 수는 없는 아이템이었다. 일단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콜레스테롤도 많다니, 뷔페 같은 곳엘 가도 부모님께서는 많이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세 개 이상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콜레스테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콜레스테롤이 새우다(대체 이게 무슨 문장인가 싶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나는 새우튀김에 관한 야망을 소원으로 구체화시켜 두었다.


소원. 바라고 원하는 것.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품성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게 꿈이라던 마틴 루터 킹 목사, 우리나라가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던 백범 김구 선생님께는 왠지 면목 없지만 나의 소원은 돈 많이 벌어서 새우 한 상자를 사서 그걸 다 튀겨 먹는 거다. 나는 고등학교 때 마음에 품은 이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한 채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말았다. 사실 그냥 꿈으로만 갖고 있는 소원이긴 했다. 그냥 그런 거. 실현될 거라는 생각은 딱히 없이 그냥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니콘이나 무지갯빛 고래 같은 그런 존재.


그런데 어쩌다 이 얘기가 장난처럼 나왔을 때 “얼마면 돼. 그거 내가 해줄게!”를 냉큼 외치는 친구가 있었다. 수산 시장 가면 그거 비싸 봐야 몇십만 원일 텐데 까짓 거 한 상자 사서 다 튀겨 줄 수 있어.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그렇게 큰소리를 팡팡 치는 친구 녀석이 왠지 흠뻑 고마웠고 그 말을 듣는 게 참 고소했다. 그냥 말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새우튀김을 양손에 잔뜩 들고 있는 그런 기분. 친구 사이란 그런 거다. 나 고기 먹고 싶어, 하는 말에 내가 적금을 깨서라도 너 소고기 사 줄게, 하고 답해주는 사이. 그러면서 서로 미소로 배부르고 마음으로 등 따스운 사이.   


단맛은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람, 내 귀여운 아이들과 관련된 느낌의 맛이고 짠맛은 엄마가 생각나는 맛이라면,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맛은 고소한 맛이다. 친구들을 만나 다정하고 쓸데없는 헛소리들을 나누며 웃는 시간은 참 고소하다.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는데, 좋은 친구와는 별 헛소리 잡소리를 해도 그게 그렇게 맛있게 느껴지는 게 서로 닮았다. 고소한 내 친구들. 오래오래 천년만년 그렇게 같이 헛소리를 하고 미소와 주먹질을 나누며 살면 좋겠다. 근데 새우튀김 같은 내 친구들과 그렇게 오래도록 지내려면 새우튀김을 덜 먹어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인생은 이렇게 늘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두 번째 고소한 맛, 새우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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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맛의 마지막 주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고소한 맛을 맛 중에서 제일 좋아하기에,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아서 사실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말로 고소한 맛의 반경이 워낙 넓기도 하다. 어렸을 때 엄마가 석유곤로에(추억은 그대로 두는 게 좋아서, 난로나 풍로로 바꾸지 않고 여기선 곤로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노릇노릇 볶아주시던 노란 메주콩과 호박씨, 그리고 죽 중에 가장 열광하는 잣죽은 좋아하기도 좋아할 뿐 아니라 추억도 많아서 끝까지 고민스럽던 아이템들이었다. 그걸 제하고도 리스트가 넘쳤다. 나의 사랑 너의 사랑 잣 막걸리와 가끔은 이건 그냥 바밤바가 녹은 거다 싶은 밤 막걸리, 음식에 사용하기에 앞서 한 숟가락씩 퍼먹기 바쁜 들깻가루, 팬에 기름 누르고 노릇노릇 구워 먹는 인절미, 바삭바삭 고소하게 부쳐낸 녹두빈대떡, 피칸이며 캐슈너트며 좋아하는 견과류를 듬뿍 넣고 굽는 파이와 타르트, 치즈를 듬뿍 갈아 넣고 만드는 까르보나라, 코코넛 가루 잔뜩 넣고 반죽해 굽는 바삭하고 오동통한 팬케이크, 입에서 팡 터지는 반숙 계란, 갓 구워 따뜻하게 먹는 아몬드 티 쿠키며 타히니 숏 브레드 쿠키, 겹겹이 고소한 크루아상과 각종 씨앗이 듬뿍 든 젬멜, 발라 먹는 게 아니라 씹어먹을 만큼 좋아하는 버터, 역시 발라 먹는 게 아니라 퍼먹는 아이템인 피넛버터 등. 그런데 참기름이라는 최강자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참기름은 뭔가 차원이 다른 아우라를 지닌 아이템이다.


내게 고국은 참기름 냄새다. 긴 비행 후에 공항 안 구내식당에서 솔솔 피우는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아, 내가 한국에 돌아왔구나,’ 하는 고소한 안도감이 피어난다. 어쩌다 외국살이가 길어진 나는 그렇게 제일 먼저 코로 고국을 느낀다. 나는 그 냄새가 좋다. 편안하면서도 마음이 두근거리는 냄새다. 곧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선이 고운 장소들을 눈에 담을 수 있고, 맛있는 한식을 잔뜩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냄새.


엄마한테서는 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코가 행복해지는 분 냄새가, 생활인으로서의 김치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엄마한테 코를 묻고 킁킁거리면 압도적으로 참기름 냄새가 날 때가 많았다. 내가 엄마의 분 냄새를 더 좋아했는지, 참기름 냄새를 더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둘 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냄새였다. 엄마에게 안겨 블라우스에서 분 냄새를 맡으면 우리 엄마가 예쁘고 고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좋았고, 엄마 다리를 안고 앞치마에서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아, 우리 엄마다, 하는 생각에 행복했다. 우리나라 공항에서 나는 참기름 냄새에 내가 포근한 안도감을 느끼는 건, 그렇게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맡던 내음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에는 방앗간에서 직접 참기름 들기름을 짜 왔다. 커다란 갈색 병에 넣어 마개를 막아 왔는데도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참기름은 참기름대로, 들기름은 들기름대로 황홀한 맛이었다. 면이든 반찬이든 비빔밥이든 풍미를 급상승시켜주는 마성의 아이템. 참기름 병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는 걸 좋아했던 꼬맹이는 지금도 가끔 참기름 병을 열어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행복해하곤 한다. 남편이 저 여자가 왜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나의 행복이다.


둘째를 낳고 백일이 되어갈 무렵에 캐나다에 있는 큰언니네 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언니는 누군가 직접 짜서 보내셨다는 정말 맛있는 들기름을 매일 한 숟갈씩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좋은 거라고, 약처럼 먹으라면서. 참기름 냄새가 나던 엄마, 들기름을 먹여주던 언니를 가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막 넘어서던 때였는데, 그 고소한 향이 위로가 됐고 매끄러운 기름이 내 삶의 씁쓸함도 매끄럽게 넘겨주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엔 유난히 한식을 좋아해서 엄마도 아빠도 모두 독일식 잡곡빵과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있는데 꼭 ‘밤(밥)’을 달라고 떼쓰는 네 살 배기가 있다. 찬이 없어 밥만 줘도 맨밥에 사과를 먹으며 맛있다는 아이다. 맨밥을 먹는 게 안쓰러워 참기름에 깨소금을 비벼 그 조그만 입에 들어갈 작은 크기로 동글동글 주먹밥을 만들면, 첫째도 곧 빵을 버리고 주먹밥에 달려든다. 이 아이들에게 엄마는 참기름 냄새로 기억되지 않을까. 내게 모국이 참기름 냄새이듯, 그리고 내가 나의 엄마를 참기름 냄새로 기억하듯, 나의 아이들에게는 아마도 엄마인 내가 참기름 냄새일 것이다. 내 아이들은 나에게 있어서 눈으로 마음으로 먹는 단맛이지만 (매일 한 입씩 실제로 먹어본다) 내 아이들은 엄마인 나를 그렇게 고소한 맛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고소한 엄마이고 싶다. 단 엄마도, 짠 엄마도, 신 엄마도, 매운 엄마도 아닌.


세 번째 고소한 맛, 참기름

고소한 맛.

내 인생에서 만난 고소함들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특별함, 그리고 소원’인 것 같다.

고소한 맛은 갓 만들어 따뜻한 것이 내는 특별함, 친구들이 내 삶에 주는 특별함, 고국이 나에게 의미하는 특별함이다.

또 고소한 맛은 다른 생명체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마음에 독선이 옅어지기를 바라는 소원, 서로의 소원을 따뜻하게 챙기는 우정이란 고소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소원, 훗날 나의 아이들에게 친구같이 고소한 엄마가 되고 싶은 소원이다.


오늘도 킁킁, 참기름 에센셜 오일 향 가슴 깊숙이 집어넣고 고소한 하루를 지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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