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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29.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다섯째, 쓴맛

질경이로 끓인 물, 한약,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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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질경이로 끓인 물이다. 보리차처럼 마시던, 우리 집의 공식 음료였다. 아빠가 젊은 나이에 당뇨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 집에선 먹고 마시는 시스템에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났다. 엄마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아빠와 우리들을 건강히 먹일 방법을 연구하셨다. 엄마는 스스로를 낮추고 뒤로 물리는 성품이었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강단이 있었고 실행력이 뛰어났다.


윤기가 자르르하던 흰 쌀밥이 가장 먼저 없어졌다. 입에 넣으면 까끌하던 노란 조, 오래 씹어야 하는 현미와 토실한 보리, 동글동글 붉은 수수, 밥을 물들이던 검은 쌀 같은 게 그날 그날 자유로운 비율로 섞여 식탁에 올랐다. 가끔 집에 쟁여둔 잡곡이 똑 떨어져 그냥 흰쌀로만 밥을 짓는 날이면 우리 넷은 감격하곤 했다. 우와, 부잣집에서 먹는 밥이다.


쌀밥과 함께 그토록 구수하고 맛 좋던 보리차와 옥수수차가 사라졌다. 대신 질경이를 끓인 물이 등장했다. 물을 마시는 게 고통일 만큼의 쓴맛이었다. 아빠만 드시면 되지 왜 우리까지 이걸 마셔야 되느냐고 항변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그리 크질 못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따지다 목이 메면 그 물을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당뇨 진단을 받은 건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고 한다. 내가 2학년 때 아빠가 일을 모두 접고 요양 차 제주도로 내려가신 건 그 십여 년 동안 몸이 너무 안 좋아지셨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병을 얻으신 뒤로 태어난 나와 내 동생 역시 그 영향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많으셨다. 유전적 요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 병이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조그만 말랑이들이 나중에 같은 병을 얻는 건 아닐까,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스스로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아가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도 덩달아 쓴 물이며 잡곡밥을 먹어야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 물은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엄마는 질경이가 눈에 좋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정말 너무 맛이 없어서 그 충격으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맛이었다. 당뇨 환자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합병증이다. 끈적한 피가 돌다 보니 천천히 온몸 구석구석에 고장이 생기는데 특히 합병증 때문에 눈이 망가지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엄마는 시력 저하를 막아주고 각막을 보호해 주며 백내장이나 결막염 같은 것에도 효능이 있다는 질경이를 우리 가족의 매지컬 실드 아이템으로 선택하셨던 것 같다.


엄마는 경동시장 같은 곳에서 질경이를 구해 오시기도 하고 밖에서 캐어 오시기도 했다. 질경이는 사실 어디에나 흔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도 있었다. 발에 차이는 게 질경이였다. 당시에는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어디서 캐든 좋았다. 질경이는 밟혀도 밟혀도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고 늘 질기게 그 자리에 살아남았다. 뙤약볕에도 늘 매꼬롬하니, 별로 시드는 법도 없었다. 얼마나 생명력이 질기고 질겼으면 이름을 질경이라고 했을까.


비록 질경이에 대한 적개심은 있었지만 엄마가 저게 질경이야, 하고 가르쳐 주신 이후로 나는 그놈을 예의 주시했다. 마당에 새로 질경이가 돋으면 그걸 캐서 엄마에게 갖다 주었다. 아빠가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했다. 어린 마음에 이걸 먹으면 낫는다니(낫는다곤 안 했다),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약초처럼 아빠가 씻은 듯 나을 수 있는 그런 신비의 질경이가 어딘가 숨어있을 것 같았고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주위를 조용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 뿌리 두 뿌리 달랑달랑 들고 오는 나를 엄마는 귀여워하며 안아주시곤 했다. 그렇게 질경이를 보다 보니 주변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이름이며 효능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마당에는 냉이며 쑥, 민들레, 엉겅퀴가 돋아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시만 해도 동네에 곧잘 있었던 빈 들판이나 뒷산에 가면 더 많은 약초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엄마는 풀과 꽃, 나무 이름에 능한 편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배우는 게 좋았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생명들이 생기는 그 조용하고 친밀한 느낌. 엄마랑 절에 갈 때나 숲길을 산책할 때, 산을 오를 때, 명이며 씀바귀, 고들빼기, 달래, 취, 차조기, 어수리 같은 이름을 배웠다. 그렇게 서울깍쟁이인 꼬맹이치고는 먹을 수 있는 풀, 몸에 좋은 약초를 보는 법을 꽤 알게 되었다. 아플 때 자연으로부터 치유를 받는 법이 있음을 알려주던 풀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가물가물한 것도 제법 있지만 질경이만큼은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질경이 끓인 물은 어린 나에게 세상에는 병이라는 것이 있고 그걸 고치기 위해서는 쓴 것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몸이 아프면 이렇게 쓴 걸 계속 먹어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건강한 몸을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질경이를 끓인 물을 다시 음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릴 때 그렇게 마셨던 덕분인지 나는 모든 종류의 씁쓸하고 향이 강한 풀들을 먹는 데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씀바귀며 고들빼기며 쑥갓 같은 쌉싸레한 각종 나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호불호가 갈리는 고수며 딜이며 모두 열광한다. 인생에서 자기만의 특별한 향기를 가진다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이 아이들이 각자의 특이한 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근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인간이 먹어도 좋은 풀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랑스럽기도 하다. 먹지 말라며 손발톱을 세우거나 독을 품지 않은 아이들,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들. 더군다나 먹어도 좋은 데서 끝나지 않고 각종 이로움을 주는 풀들의 존재라니. 맛이 조금 쓰긴 해도 먹으면 좋아질 거야, 하고 아픈 우리에게 웃어주는 고맙고 대견한 녀석들이다. 그리고 이건 단언할 수 있는데 이제는 하얀 쌀밥보다 잡곡밥이 훨씬 좋다. 물론 국밥이나 덮밥에 사용되어 매끄럽게 꿀떡꿀떡 넘어가는 쌀밥의 느낌이 흐뭇할 때도 있지만, 오롯이 밥 자체로 먹는 흰 쌀밥은 이제 좀 느끼하달까. 그러므로 씁쓸하고 퍽퍽한 것들로 건강한 식습관을 형성해 주고 싶으셨던 엄마의 장기 프로젝트는 나에겐 대성공이었다.  


아빠는 돌아가실 때까지 눈 쪽으로 큰 이상은 없으셨다. 물론 전체적으로 약해지긴 하셨고 백세시대에 걸맞지 않게 너무 일찍 가시기도 했지만, 그래도 세상의 모든 빛과 색과 형태의 의미를 놓치는 일 없이 오롯이 눈에 담다 가셨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내가 달랑거리며 들고 갔던 질경이 중 하나가 아빠의 눈을 평생 지켜줬다고, 그렇게 믿어보고 싶은 것이다.  


첫 번째 쓴맛, 질경이(를 끓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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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질경이 끓인 물이었다면, 연이어 떠오른 잊을 수 없는 쓴맛은 어릴 때 복용했던 한약이다. 엄마는 어떤 숙제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한약을 달여 먹이셨다. 어릴 때 먹어두면 평생 간다고.

어렸을 때 나는 우리 넷 중에서 가장 비리비리했다. 큰언니는 살집은 없어도 강단이 있어 보이는 외형이었고, 작은언니와 동생은 어릴 적에 빨간 볼이 토실하니 포동포동한 스타일이었다. 나는 비쩍 마른 데다가 밖에 나가 노는 일이라곤 없이 책만 파는 책벌레였다. 바깥공기도 좀 마시고 뛰어놀기도 해야 할 텐데, 내 몸에서 그나마 움직이는 거라곤 눈알뿐이었다. 나는 대체로 앉거나 누운 자세로 책 위에서 눈알만 빠르게 굴렸다. 책을 못 읽게 하면 장롱 안에 들어가 숨어서 읽었다. 고집은 또 더럽게 셌다. 그렇다고 편식을 하거나 밥을 안 먹은 건 아니었는데, 그땐 그냥 잘 먹고도 마른 체질이었다. 엄마 아빠는 요놈을 살찌워야겠다고 생각하셨다. 엄마 아빠 미워요.


한의원은 묘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딱히 좋진 않은데 또 은근히 좋은 것 같기도 하던 냄새. 하나하나 서랍을 열어보고 싶게 생긴 약재함에서 아는 한자를 찾는 것도 재미있었고, 모양이며 색이며 향이 제각각인 약재들을 구경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한쪽에선 항상 작두로 감초를 써시는 분이 계셨다. 무섭지도 않은지 어떻게 그렇게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써시는 걸까. 경탄하며 구경하고 있으면 꼭 하나 입에 넣고 씹어보라고 감초 조각을 주시곤 했다. 은근슬쩍 쓴맛이 느껴지는 단맛이었다. 왜 감초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엄마는 녹용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셨다. 자식 넷 모두 어릴 때 녹용을 넣은 한약을 한 재씩 해 먹여야 한다는 게 엄마의 굳은 신념이었다. 멋있는 나뭇가지처럼 생긴 사슴뿔들이 우리 앞에 놓였다. 하지만 나는 뿔을 잃고 슬펐을 사슴이 가여웠다. 아니 인간은 왜 남의 뿔을 가져다 달여먹는 거야. "엄마, 사슴은 뿔이 없어서 어떡해?" 조그맣게 속삭이는 나의 걱정을 곁에서 듣던 약제사님께서 이건 저절로 뚝 떨어지는 뿔이라서 사슴이 안 아프니까 걱정 말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 예쁜 새 뿔이 또 돋아 난다고. 그 말을 듣고 와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얀 거짓말이었다. 녹각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 게 맞지만 녹용은 새로 돋은 연한 뿔을 잘라 쓰는 거라고.


그 하얀 거짓말에 안심하며 내어드린 나의 손목이며 얼굴, 혀 등을 살피시던 한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딱히 문제는 없고 건강한 편입니다."

"그래도 애가 너무 비실비실해 보여서, 살이 좀 쪘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기 사슴 밤비의 뿔에 정신 팔지 말고 그 대화의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똑 부러지게 반대 의견을 표시했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몸무게가 부쩍 는다는 한약을 지어왔다. 그리고 그 약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지인들이여 그 입 다물라.)


지금은 한약이라고 하면 간편하게 파우치에 든 걸 데워먹기만 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창호지 같은 종이에 한 번 달일 분량의 약재를 잘 접어서 한 첩씩 싼 걸 조로록 끈으로 묶어 와서 하나씩 약탕기에 넣고 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을 지어다 달여 먹인다는 건 단계마다 정성이요 사랑이었다. 먼저 항아리에 손잡이가 달린 것 같이 생긴 약탕기를 잘 부셔서 물기를 닦은 다음, 약 한 첩을 넣고 물을 크게 한 대접 듬뿍 붓는다. 약을 쌌던 종이로 약탕기를 덮고 입구의 둥근 모양을 따라 오글오글 접어 고정시킨 다음, 풍로에 올리고 불을 붙인다. 이 단계에서 왠지 부채질을 은근히 해 줘야 엣지가 살아난다. 가끔은 약재의 처방이 쓰인 종이가 약탕기 위에 올라갈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한자가 멋지게 쓰인 종이가 약탕기를 덮고 있으면 왠지 정말 신비의 명약이 제조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천천히 달여 물이 절반으로 졸으면, 사발 위에 올이 성긴 천을 깔고  위에 내용물을 쏟는다. 그걸 돌돌 말아서 막대기  개로 가위표를 그려가며 손목을 돌려 마지막  방울까지 놓칠세라 짜고 짜내면 완성.   달이고 남은 찌꺼기는   분량을 합쳐서    달여 먹고는 했다. 그러고도 나오는 찌꺼기는 화단으로 갔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냥 먹이기만 하면 되는 약을 시간 맞춰 먹이는 일만 해도 신경이 많이 가는데,  약을 정성스레 달여서 짜내고 해야 한다면 병은 이미  정성만으로 모두 나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성을 모르는 나는  약이 먹기 싫어서 투정도 부리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엄마의 정성이 방울방울 담긴 그 한약 덕이었을까, 몰라보게 포동포동해진 나는 겨울에도 감기 한 번을 안 걸리는 건강체질로 이후 이십여 년을 동글동글하게 살았다. 약효가 사반세기를 가다니. 참으로 용한 한의원이었다. 흠흠.


두 번째 쓴맛, 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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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통틀어 입에 넣었을 때 제일 쓰다고 생각했던 건 소주였다. 질경이 끓인 물은 쓰긴 했어도, 그래도 처음 맛볼 때 이건 인간이 먹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994년 2월.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고, 나는 술을 맛보는 중이었다. 정말로 그 날 난생처음 술을 입에 넣어 보았다. 어린 시절에 내게 술 가지고 장난치는 어른도 없었고, 나는 당시에 꽤 유행하던 수능 오십일주 백일주 같은 것도 마신 적이 없었다. 얌전한 모범생이라기엔 조금 껄렁껄렁한 데는 있었지만, 또 하지 말라는 걸 기를 쓰고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학교를 일찍 들어갔기에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나이이긴  했지만, 대학생이 되었으면 술 마실 나이가 되었다는 사회적 용인이라는 게 있었다(.. 고 믿는다).


맥주는 뭐 그냥 그랬다. 물 탄 피쳐를 마셔서 그런지 밍밍한 맛이었다. 게다가 첫 모금과 마지막 모금의 맛의 차이가 엄청났다. 첫 모금에는 그래도 탄산의 톡 쏘는 맛이 느껴졌는데 몇십 분 안 되는 시간동안 탄산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아 그래서 선배들이 그렇게 원샷을 하라고 난리를 치는 거구나, 김 빠지기 전에 후배들 맛있게 마시라고. 근데 이게 맛있는 건가? 뭐 목마르면 마실만은 하겠네. 그래서 뒤에 맛볼 소주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빨간 병뚜껑의 두꺼비들이 테이블 위에 도착했고, 선배들이 두꺼비 독을 제거해야 한다며 두꺼비 배를 손톱으로 긁어 따고는 팔꿈치로 소주병 엉덩이를 가격하는 희한한 의식을 선보인 뒤 조그만 잔에 꼴꼴꼴 따라주었다. 소리가 얼마나 예쁘던지! 이름도 진짜 이슬이라고 그러고, 저렇게 저세상 소리 같은 청아한 소리가 나는 건 분명 맛도 무지개에 적신 이슬 같을 거였다. 입에 털어 넣었는데 이슬은 개뿔,  와우 정말 과학실에 있던 알코올램프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어우 이게 뭐야. 사람이 이걸 마셔? 이걸 좋아서 마신다고? 그러고 나서 나는 그걸 좋아서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맥주가 사랑스럽다면 소주는 은근하다. 맥주가 언제든 보고 싶은 녀석, 활기차고 유쾌한 친구의 느낌이라면 소주는 눈빛으로 통하는 사이랄까. 평소엔 별 말 없어도 어떤 날엔 이 친구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속 깊은 친구. 차갑고도 뜨끈한 녀석이다. 두 가지 온도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 참 근사하지 않은가. 위벽을 긁듯 냉정한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안에 든 걸 토해낼 때 따뜻한 손으로 다정하게 등 두드려줄 것 같은 녀석.  

  

소설가 권여선은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돼지비계나 막창이 극강의 안주로 거듭나는 데는 차고 쌉쌀한 소주 한 잔이면 충분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내가 서른 가까이 되어 난생처음 접했던 돼지껍데기, 껍질에 털이 슝슝 박힌 그 박력 넘치는 비주얼에 놀란 마음을 숨기고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차고 쌉쌀한 소주 덕이었다. 소주가 들어가서 약간 알딸딸해지면 젓가락을 쥔 오른 주먹에 용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그렇게 평소에 맛본 적이 없어서 조금 겁나던 음식들을 소주 안주로 하나씩 섭렵했다. 이를테면 순대, 순댓국, 알탕, 수육, 곱창 같은 것들. 그리고 그렇게 맛본 음식들은 꽤 맛있었다.  맥주랑은 뭔가 궁합이 안 맞는다 싶은 음식들이 제법 있었지만, 차가움과 뜨끈함을 동시에 가진 소주는 안 어울리는 게 거의 없는 신묘한 녀석이었다.


내가 이 놈의 술을 다시 입에 넣으면 사람이 아니고 멍멍이다, 싶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더라. 그렇게 속을 뒤집고 세상을 뒤집었던 소주지만, 이 쓰디쓴 액체는 내게 약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가 될 때까지 나는 평소에 감정 표현이 크지 않고 극도로 말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땐 명랑했지만 집에서조차 거의 말이 없었다. 오죽하면 친척들이 내 목소리 들어보는 게 소원이라고들 하셨다. 얘가 말도 하냐고, 너 아무 말이나 좀 해 보라고. 대학 동기들도 대체로 나를 묵언수행 하며 지하 세계에 있던 인간으로 기억하지 싶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 나는 한없이 발랄해졌다. 말도 많아졌고 웃음도 많아졌고 에헤헤거리며 사람을 덥석덥석 안았다. (유학 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술을 마시면 심지어 영어도 유창해진다고 한다. 늘 우리를 불러 술을 먹이던 클라우디아가 그랬다. 너 논문 심사받을 때 꼭 물 대신 술 놓고 하라고.) 그렇게 술로 단련하기를 1년 정도가 되자 나는 술 없이도 잘 웃고 말도 제법 하는 인간이 되었다. 소주는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며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말들이며 감정을 차례차례 밖으로 꺼내고 조금씩 흘려보내 주던 약이었다. 맥주를 마신다고 안에 든 알맹이가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지만, 소주 한 병이면 안에 똬리처럼 맺혀있던 매듭들이 하나씩 쑤욱 딸려 나오곤 했다. 또 이 쓰디쓴 소주가 말할 수 없이 단 날이 있더라. 약이라고만 하기엔 위장을 개박살 내곤 했지만, 몸이 갉아먹히는 대신 마음은 조금씩 보드랍게 풀어져 갔다.  


소주가 아니었어도 나는 오늘날의 무던하고 편한 인간이 되어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많이 답답하고, 덜 웃고, 속은 좀 더 곪아 있는 사람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20대에 그렇게 공복에 장복한 소주는 내게 약이었다, 분명히.  


세 번째 쓴맛,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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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것들은 대체로 약이었다. 쓴맛을 꼽는 이 글에도 죄다 액체들이 등장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쓰디쓴 메인 요리라는 게 나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반찬으로 씀바귀나 고들빼기, 도라지, 혹은 건강식품으로 케일, 인삼 같은 게 떠오르지만 그것들도 대체로 곁들여 입맛을 돋우거나 약처럼 먹는 음식들이다. 인간이 쓴맛을 그리 좋아할 리가 없는데 입에 넣는다는 건 어떤 이로움이 있기 때문이겠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벤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철학자들이 인간은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그렇게 누누이 일러왔는데, 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까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으니 오만상을 써 가며 입에 넣는 것이렷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을 입에 넣고 곰곰이 씹어본 적이 있다. 이십 대 때였나. 쓴 걸 삼키고 단 걸 뱉어야 다이어트가 되는 거지, 하며 히죽거리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과연 단 건 삼키고 쓴 건 뱉으며 살아야 하는 건가, 뭐 그런 생각들. 그때 내린 결론은 그랬다. 쓴 것도 기꺼이 먹으며 살아야지, 그래도 살면서 쓴 걸 입에 넣을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쓴맛 날 일 만들지 말고 살자.


삶을 사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맛에 집중하는 방식과 쓴맛을 피하는 방식. 아이의 삶의 방식은 전자에 가까울 것이고 어른이라면 아무래도 좀 더 쓴맛의 후폭풍을 신경 쓰게 될 것이다. 물론 둘을 잘 버무려 단맛 집중 60에 쓴맛 대비 40 정도의 황금률을 구현하는 현자들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맛을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뗄 것인가, 나는 그게 늘 아리송했다. 철학을 전공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회의주의가 상당량 장착된, 그리하여 맨날 누워 있으면서 생각은 더럽게 많은 나는 기본적으로 후자의 입장을 유지해 왔다. 거스르는 일 없이, 내 몸매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즉 가늘고 길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지인과 나눈 대화가 마음에 잔상을 많이 남겼다. 살면서 단맛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 쓴맛을 피해야 하는 건가, 다소는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전자요, '라는 대답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 반응 속도가 놀라워서 아니 생각을 좀 하고 답을 하시라고 웃었지만 상대의 답변은 명료했다. 좋은 것만 보고 가는 게 안 좋은 걸 피해 가는 것보다 결과는 결국 같아도 마음이 좀 더 낫더라는,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단 순간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는. 머리로는 맞다고 생각하면서 진짜로 내가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사실 안 했다. 그저 상대의 그 확신이 부럽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마 그동안 달콤한 카오스와 비겁한 평화 사이에서 일관적으로 후자를 선택해 온 관성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 자체가 뭔가 단맛을 쫓아가며 살아온 적이 없다. 단 건 대체로 남의 입에 넣어주고 나는 물러나 있었다. 그저 심하게 쓰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쓴맛에 관한 글을 쓰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 저 말이 떠올랐다. 그러네, 단맛에 집중한다는 건 단맛을 본다는 거지만 쓴맛을 피한다는 건 내 입에 뭐가 아무것도 안 들어온다는 얘기네.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걱정만 한단 얘기네. 끊임없이 나를 뒤로 물리느라 이십 대가 시었다고 말했으면서, 아무 맛도 없는 그런 맛에 만족하겠단 얘기네.

 
최근 몇몇 분들과 함께 하루에 시 하나씩을 필사하고 단상을 나누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받아보는 시의 압도적인 내용 역시 비슷했다. 너 나중에 죽을 때 되면 한 것보다 안 한 것들을 후회하게 될 걸, 이런 내용들로 아우성이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는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고,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고, 기형도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아픈 고백을 남겼다. 킴벌리 커버거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고,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고 고백했고, 유병록은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 짧은 봄에 대해 얘기했다. 마크 트웨인도 나를 미소 짓게 만든 건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했다. (Never regret anything that made you smile.)


그러므로 달다면, 뒤이어 올 쓴맛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문인들이 저렇게 붙잡아 놓은 말들처럼 씁쓸한 후회들이 흘러넘쳐 강을 이룰 거라면, 그리고 쓴맛이 어차피 약이라면 말이다. 혹시라도 단맛에 집중해서 얻는 결과가 쓴맛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우리에게 약이 될 테니까. 약이 우리를 치유해 주듯이, 우리는 또 그렇게 치유될 거니까. 메리 하트만의 시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그러니 살면서 쓴맛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계속 쓴맛을 피하는 방식의 고요한 삶에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않았을 것 같다. 마음이든 행동이든 어디로 애써 가지 않는 것, 그냥 이 자리에 조용히 있는 것이 사실 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 약 먹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좀 더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쪽으로, 단맛 쪽으로 꿀벌처럼 움직여볼까 싶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조금 더 탐내고, 누려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괜히 나를 뒤로 물리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울 때 울더라도 좀 더 활짝 웃고. 나답지 않은 방식이려나 싶어 살짝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게 쓴맛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인 것보다는 기쁨이, 행복이, 설렘이, 희망이 나를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쓴맛이 약이라서 다행이다. 우리는 그 약을 먹어가며 충분히 달콤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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