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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22.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넷째, 매운맛

쫄면, 떡볶이, 엄마가 만드시던 고추장

#


5학년 때였고, 미아 삼거리에 있던 파레스 백화점이었고, 내 인생 처음 쫄면이라는 걸 먹었다.

그리고 죽을 뻔했다. 매워서.


맵고 짠 음식은 죄다 걸러 주시는 엄마 필터 덕분에 그때까지도 내 혀는 고춧가루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몰랑몰랑한 아기 혀였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쫄면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누가 맛있다고 했거나, TV에 나온 걸 보고 먹어보고 싶었거나, 아니면 그냥 쫄면이란 이름이 웃겼거나 했겠지. 내가 메뉴판을 보면서 쫄면을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지었던 표정이 기억난다. 걱정 반, 웃을 준비 반을 적절히 버무린 그 오묘한 표정. 그건 마치 원 페어를 들고 끝까지 콜을 외치며 당당하게 포커판에 앉아있는 미친놈을 바라보는 심정이었으려나. 괜찮겠냐며 걱정하다가 그래 한 번 먹어 봐, 하고 시켜주셨던 쫄면.


냄새는 딱히 맵지 않았다. 아마 참기름의 위장술 때문이었겠지. 둥근 그릇 안에는 굵고 쫄깃해 보이는 면발이 빨간 양념장 모자를 쓰고 깨를 맞고 들어앉아 있었고, 그릇을 빙 둘러가며 얇게 썬 양배추와 당근, 콩나물, 오이, 삶은 계란 반 개가 올려져 있었다. 잘 비벼서 한 입 넣었는데 와, 입 안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정말 입이 떨어져 나갈 만큼 매웠다. 혀 위에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고무줄 같은 면이 얼마나 질긴지, 잘 끊어지지 않아서 더 많이 입에 물어야 했다. 곧 입 안에도 입술에도 불이 붙었다. 하아 하아. 같이 나온 뜨거운 국물을 먹었더니 매운맛이 두 배로 증폭되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매운 음식에 뜨거운 국물을 곁들여 주는 건 사실 두 손 모아 너 한 번 죽어봐라 기원하는 고운 마음이 깔린 관습이 아닌가 싶다. 가라앉힐 거면 시원한 걸로 주든지 해야지, 이건 더운 여름날 심하게 탄 등짝에 핫팩을 대주는 꼴 아닌가. 게다가 친절하게도 후추가 가득 든 국물이었다. 좋아서 미쳐버리겠네. 어쨌든 나는 파닥파닥거리면서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쫄면을 영접했다. 조금 지나니 입뿐 아니라 위까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발 동동 구르며 눈물 콧물 쏙 빼던 그 맛.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매운 면을 자꾸 입 안에 밀어 넣어야 덜 매웠다. 쉬고 있을 때가 더 매웠다.


내 몫의 음식은 절대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는 가풍에서 자란 나는 그 매운 쫄면을 울며 불며 다 먹어치웠다. 엄마가 도와주셨는지 어쨌는지는 내가 불을 뿜느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릇을 비웠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렇게 매운 것도 먹고, 이제 다 컸네."


그렇다. 매운맛은 어른이 되는 맛이었다. 내 피 땀 눈물, 내 차가운 숨을 모두 다 가져가 버린 아릿한 쫄면이었지만 지금도 언제 어디에서 먹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 강렬한 경험이 유달리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 거다. 먹고 난 뒤 나의 처참한 모양새와는 관계없이, 왠지 한 뼘 자란 것 같고 성장통을 겪은 것 같던 그 뿌듯함. 이 날의 학습효과로 양념장을 약간 덜어내는 기술을 습득한 나는 그 뒤로도 굳은 결의와 함께 슬금슬금 쫄면을 시켜 먹었고, 아팠고, 울었고, 그렇게 5년의 경험치를 쌓아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학교 매점의 유일한 쌍둥이 음식이었던 쫄면과 우동 중에서 가끔 쫄면을 시켜 후루룹 먹어치우는 (여전히 맵긴 매웠다) 언니가 되었다.


이제 여섯 살, 네 살인 내 아이들은 아직 김치며 고추장을 입에 넣어 본 적이 없다. 매운맛이라 봐야 어쩌다 과자에 매운맛이 약간 들어간 정도다. 세상에 태어나 육 년이나 살았다는 자부심이 큰 첫째는 매운맛(주로 엄마 아빠가 먹는 순한 맛 라면)을 용감하게 시도하려는 성향이 있고, 아직 목소리도 삐약삐약한 둘째는 나의 입 속에 매운 건 먼지만큼도 넣지 말라는 단호함이 있다. 그럼에도 고추장을 퍼먹는 엄마를 볼 때 둘의 눈에 어리는 경외의 눈빛을 나는 안다.


"엄마, 몇 살 되면 아 매워(고추장)를 먹을 수 있어?"

"글쎄?"

"엄마, 미햐(본명 미하일. 열 살짜리 형으로, 아이들 마음속 '아주 큰 형아'의 기준인 듯하다)는 이거 먹을 수 있어?"

"음... 미햐도 이건 맵다고 할 것 같은데?"

"우와, 그러면 진짜 많이 커야 되겠네."


빨갛게 양념한 제육볶음이나 매콤달콤한 오징어볶음을 만들 때면 아이들이 어서 자라서 콧등에 땀방울 얹어 가면서 이걸 함께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또 막상 그날이 오면 서운할 거다. 반찬을 따로 하고 간도 따로 해줘야 할 만큼 세심하게 보살펴야 하는 여린 존재들은 참 성가시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귀엽기 때문이다. 나도 이 귀여운 녀석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이 세상에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또 있을까 싶게 빨갛고 빨간 마음으로, 빨간 볼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아이들. 내게 뽀뽀를 퍼붓는 그 작은 입 안에 서서히 빨간 것들이 들어가면서, 무조건적으로 나를 향했던 그 빨간 마음들 역시 조금씩 바래 갈 것을 나는 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매운맛은 사실 미각이 아니라 통점으로 느끼는 촉각이기 때문에 고통의 일종이다. 고통이란 건 왠지 어른의 영역이었으면 좋겠고, 요 보들보들한 녀석들에게는 맛으로라도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하지만 나의 애국심의 근원 되신 떡볶이며 더할 나위 없이 잘 익은 김치, 불맛이 황홀하게 배어있고 먹으면 정말 머리 뚜껑이 뾱 하고 열릴 것만 같은 매운 주꾸미 볶음 같은 나의 이 빠알간 고통의 취향을 내 사랑하는 아이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은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또 뭐람.


하지만 물고 빨고 쓰다듬는 사랑만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취향을 알고 그것을 기꺼이 함께 즐기는 것 역시 발그스름한 사랑의 마음이다. 그렇게 사랑의 모양을 바꾸어 가며 요놈들과 오래도록 빨갛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그리 많이 서운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첫째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꽃을 집어 와서 쇼핑 카트에 넣으며 "엄마, 이거 엄마 좋아하는 거-"라고 할 때 내 마음은 발갛게 물든다. 코너를 돌다 둘째 아이가 산처럼 쌓인 맥주 궤짝을 보고 "엄마, 이거 엄마 좋아하는 거-"라고 할 때 내 마음(과 얼굴)은 더 시뻘겋게 물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이 부지런히 인생의 경험치를 쌓아 나처럼 쫄면을 시도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또 바라지 않는다.


첫 번째 매운맛, 쫄면

#


쫄면이 어른이 되는 맛이었다면, 떡볶이는 탈선의 맛이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유난히 엄격하셨던 엄마는 당최 군것질이란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굣길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달고나며 뽑기를 하고 쥐포나 떡볶이를 입에 물 때, 나는 발걸음도 고고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엄마가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말라고 했어. 저런 걸 먹으면 나쁜 어린이야.


그러다 나의 그 엄격한 도덕적 구분에 대혼란이 온 사건이 있었으니,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이 주말마다 음악 문제집을 한 단원씩 풀게 해서 백점을 받으면 학원 앞 떡볶이 천막에 데려가 종이컵에 든 떡볶이를 상으로 주셨던 것이었다. 나쁜 어린이들이 먹는 떡볶이가 백점 받은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되었을 때, 나는 잠시만 혼란했고 길게 기뻤다. 엄마는 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동안 몹시 궁금하던 이 떡볶이 맛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꼬맹이들에게 주는 거라 고춧가루는 희끄무레하게 살짝만 묻은, 아기 손가락만한 떡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모든 분야에서 꽤 유능했던 엄마가 유난히 약한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분식이었다. 라면은 거의 이유식 느낌으로 면발이 흐물흐물하고 국물이 바다처럼 많았다. 와, 이게 라면이야 우동이야 죽이야. 엄마한테 떡볶이를 해달라고 졸랐을 때 엄마가 '아유 이런 게 뭐가 좋다고-' 하시면서 마지못해 해 주시던 떡볶이는 내가 알던 걔가 아니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앞다퉈 들어간 각종 채소의 등쌀에 떡과 어묵이 당최 기를 펴지 못했다. 지나치게 밍밍하고 건강한 맛의 떡볶이를 받아 들고 나는 좌절했다. 이건 그냥 고추장을 조금 넣은 떡 채소 볶음이잖아. 게다가 집에서 직접 담근 고추장이라는 존귀한 아이템으로부터는 무엇보다 그 팜므파탈스러운 맛이 나지 않는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떡볶이와 사랑에 빠진 나를 본 엄마는 나랑 시장에 들를 때면 떡볶이를 한 접시씩 사주시곤 했다. 처음엔 매워서 물에 빨아먹기도 했지만 나는 서서히 그 매콤달콤한 맛에 익숙해졌다. 기다란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떡볶이 일 인분, 녹두 빈대떡 하나 주세요, 할 때의 그 설렘. 엄마랑 내가 둘이서 가면 늘 먹던 메뉴였다. 네모지게 자른 녹두 빈대떡을 가져다 빨간 떡볶이 양념에 굴려 먹으면 매콤달콤 바삭바삭한 게 참 맛있었다. 나는 떡볶이를 입에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엄마가 사주시기도 하고 엄마도 드시는데, 나쁜 음식이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탈선을 시작했다. 학교 가는 길에 사 먹지 말라고 했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날롬날롬 사 먹었다. 후후, 여러모로 짜릿한 맛이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걸 한다고 해서 돌이 되거나 산타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떡볶이를 통해 세상의 비밀을 하나 배웠다.  


떡볶이라고 한다면 피해 갈 수 없는 취향의 차이가 있다. 탕수육 소스를 끌어안고 서로 간에 연을 끊을 수도 있는 부먹과 찍먹 간의 그 치열한 대립까지는 아니지만 쌀떡파와 밀떡파의 대립이 있는 것. 사실 전통적으로 떡볶이는 쌀떡이었고, 부자들의 음식이었다. 남는 쌀로 떡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을 수 있어야 했으니 곳간이 좀 넉넉하신 분들만 드실 수 있었고, 그래서 궁궐이나 양반가에서 먹는 고급 음식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기름을 두르고 채소와 떡을 간장에 볶아내는 떡산적 같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 후에 밀가루 원조를 받으면서 밀로 떡을 뽑았고, 또 찹쌀 대신 풍부한 밀가루로 고추장을 만들어 내면서 대표적인 서민형 간식이 된 것이다. 빨갛게, 매운맛이 첨가되어서.


내가 어렸을 때 만난 떡볶이는 모두 매끄럽고 똑똑 끊어지는 밀떡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쌀이 남아돌기 시작하면서 쌀떡으로 만든 떡볶이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나는 처음에 사랑에 빠진 게 밀떡이라 그런지 밀떡이 좋다. 말캉하고 매꼬롬한 식감이며 오래 끓일수록 야들야들 양념이 잘 배는 그 맛도 좋지만 아기 손가락만한 그 사이즈도 사랑스럽다. 가래떡을 너무 큼직하게 썰어 만든 떡볶이는 왠지 밥을 꽉꽉 눌러담아 먹는 느낌이라 부담스럽다. 쌀떡이라면 떡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얇게 썬 걸로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둥근 가래떡이 커다랗게 뚝뚝 잘려 들어가면, 보기엔 탐스러워도 양념과 떡의 비율이 맞지 않아 나중에는 하염없이 떡만 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대 앞 버스 정류장 근처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아쉽게도 커다란 쌀떡이었지만 걸쭉한 양념이 황홀했다. 날을 넘기고도 씩씩하게 달려와 주던 고마운 12번 좌석버스. 버스 메이트인 동아리 선배와 버스를 기다리며 종종 그 포장마차에 들르곤 했다. 알코올의 지배를 받는 뇌는 그동안 뭘 얼마나 처먹었든 간에 너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히딩크 감독님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는 법이다. 그날도 뭐 밥에 찌개에 튀김에 과일에 마른안주까지 분명히 미치도록 많은 먹이를 섭렵했을 텐데, 우리는 맛있는 냄새를 폴폴 풍기는 포장마차 앞으로 불나방처럼 빨려 들어갔다. 보통은 버스가 오면 입에 구겨 넣고 바로 달려갈 수 있게 어묵 정도를 사 먹는데 그날은 히딩크 감독님의 작전 지시가 유독 강했는지 우리는 미친 텐션으로 떡볶이를 시키고 말았다. 장사를 마감하실 시간이라 남은 걸 득득 긁어주시는 바람에 우리는 2인분인 듯 3인분 같은 1인분을 받아 들고 몹시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망할, 딱 한 개를 입에 넣은 순간 막차일 것 같은 버스가 도착했다. 이걸 버리고 뛰어야 하나. 와 이걸 버리라고? 쌀 한 톨 안에 든 농부의 피땀이 얼만데, 소중한 쌀이 두세 공기 정도 든 것 같은 이 귀하디 귀한 음식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잠깐 동공 지진을 교환한 우리는 산뜻하게 버스를 포기했다. 막차가 아닐 수도 있잖아. 음식을 남기고 지옥에 가느니 깨끗이 먹고 돼지가 되자.


그렇게 먹은 떡볶이는 참 맛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양념과의 적절한 비율을 맞추기 위해 떡을 잘게 잘랐다. 하루 종일 졸아서 끈적끈적해진 매콤달콤한 양념.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주는 은근한 긴장감도 그렇게 매콤달콤했다. 아까 그 버스는 막차가 맞았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천천히 떡볶이를 다 먹고 나서, 걱정하실 엄마한테 우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제 들어갈 테니 걱정 말고 주무세요. 이제 선배랑 택시 탈 거야. 응 괜찮아, 술 많이 안 마셨어.' 나는 귀가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속 썩인 법이 없어 허튼 짓은 안 하고 다닐 거라는 엄마의 강한 신뢰 아래 나는 그렇게 착실하게 허튼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 우리는 남은 돈을 긁어 모아 택시를 탔다. 조금 모자랄 법했지만 떡볶이를 든든히 먹고 배가 부르니 왠지 세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선배가 먼저 내리고 우리 동네까지 가야 했는데, 역시나 돈이 뚝뚝 떨어지더니 잔고는 바닥이 나고 말았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 주세요.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 가서 돈을 더 가져다 드렸어도 되는데 그날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혹시 엄마가 주무시면 택시비 때문에 깨우는 게 미안했고, 떡볶이를 많이 먹어서 배도 불렀고, 무엇보다 평소에 안하던 짓을 또 하나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질거렸다. 좌석버스 노선대로 큰길로만 가면 외진 곳 없이 환해서 무섭진 않았다. 이 시간이면 오히려 수없이 많은 변태를 만났던 12번 좌석버스 안이 더 위험했다. 누구랑 같이 타면 괜찮은데, 혼자 자리에 앉아 마음을 놓고 잠시 눈이라도 붙일라치면 정말 온갖 미친놈들을 만나곤 했다. 엿처럼 끈적끈적 달라붙던 그 엿같은 자식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매운 걸 제법 먹는 어른이 됐어도 그 상황에선 그저 놀라 얼어붙기 바쁜 어린애였다.


물에 씻긴 듯한 여름밤이었다.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엔 역시나 걱정스러운 얼굴의 엄마가 서 있었다. 분명 택시를 탄댔는데, 내가 중간에 내려 걷느라 시간이 훨씬 걸렸으니 아마 놀라셨나 보다. 졸아서 끈적끈적하던 그 빨간 떡볶이 양념처럼 마음을 졸이고 졸여 끈적한 얼굴을 하고 서있던 엄마. 그래도 엄마는 걱정을 뚝뚝 묻힌 채 다행이라는 얼굴로 날 보고 환하게 웃었다. 질책의 눈빛은 좀 매웠지만 웃음은 달콤했다. 떡볶이로 슬금슬금 엄마 말을 거스르기 시작했던 꼬맹이는 그렇게 또 떡볶이로 엄마를 걱정시키는 못난 딸이 되어 있었다. 커서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노느라 바빠 엄마랑 떡볶이 한 번을 먹으러 안 갔으면서. 요즘도 떡볶이를 먹다가 종종 엄마 생각을 한다. 그럼 잠깐이지만 살짝 더 매워지는 느낌이다.   


두 번째 매운 맛,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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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이 없고 요리할 의욕도 없을 때, 고추장에 밥만 싹싹 비벼도 참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해외 동포들을 마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보살피듯 은혜롭게 살피시는 삼위일체의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김과 참기름, 그리고 고추장이다. 김과 참기름은 없어도 잠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데 나는 고추장이 없으면 나라 잃은 백성처럼 서럽다.


다른 나라엔 없는 한국 음식만의 독특한 맛이 있다면 바로 고추장 베이스의 매운맛이 아닐까 한다. 간장은 아시아 전역에 비교적 널리 사용되지만 고추장은 대체로 우리만 쓴다. 마늘을 많이 넣는 것도 한식의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마늘을 안 쓰는 것도 아니니 한식만의 독특함을 꼽으라면 역시 고추장 맛이 아닐까. 바다 건너 밖으로 나와보니 세상에는 차원이 다른 매운맛들이 있었고, 고추도 차원이 다른 다양한 고추들이 존재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아는 매운맛이란 건 정말 특별한 고향의 맛이었구나. 일식의 고추냉이처럼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도는 휘발성의 매운맛도, 서양의 타바스코 소스처럼 뭔가 새콤하게 톡 쏘는 그런 매운맛도, 목캔디 안의 멘톨처럼 냉점에 작용해서 화한 맛을 내는 매운맛도 아닌, 매콤달콤찐득하고 정겨운 고추장 맛. 쫄면으로 강렬하게 영접하고 떡볶이로 사랑을 쌓아 올린 내 매운맛은 사실 모두 한국식 고추장 맛이었다.

  

어릴 적에 우리 집엔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 김치와 장아찌 같은 것이 든 장독이 줄지어 있었고, 엄마는 장을 직접 담그셨다. 간장과 된장, 고추장 중에 엄마가 가장 오래까지 손수 담그셨던 게 고추장이었다. 우선은 좋은 고추를 사서 말리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엄마와 이모들은 다음 대통령으로 누굴 뽑을지를 논하는 듯한 진지함으로 어디에서 좋은 고추를 들여올 것인지를 논하곤 했다. 쌀자루에 가득 담겨오던 새빨간 고추들. 엄마는 그걸 돗자리며 채반에 고르게 펴서 노란 가을 햇빛에 널어 말렸다. 예전에는 시래기며 늙은 호박이며, 밖에다 말리는 게 참 많았는데 엄마가 추석 전에 가장 중요하게 말리던 것이 바로 고추였다. 그 무렵엔 집집마다 마당이며 옥상에 빨간 고추들이 햇빛을 쬐러 나와 있어서 온 마을이 발그스름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태양초 고추장'의 태양초는 바로 이렇게 햇볕에 말린 고추를 말한다고 한다. 해의 맛을 머금어서 그런지 기계로 말리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고. 그렇게 고추를 말리는 며칠 사이에 비라도 내리면 큰일이었다. 빨래는 비를 좀 맞더라도 온 가족이 동원되어 고추를 먼저 챙겼다. 덜 마른 고추는 호다닥 걷어 방에 넣어놓고 불을 때서 바싹 말려야 했는데, 아랫목에 팔자 편하게 몸을 지지는 고추님들 때문에 그 방에는 뜨끈하게 매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말린 고추를 엄마는 하나하나 마른 헝겊으로 잘 닦아서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셨다. 고운 색의 고춧가루를 가져와 손으로 만져 보면서, 이번 고춧가루는 이렇게 좋다면서 자랑스러워하시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올해 우리 애 수능 점수가 이렇게 잘 나왔어요, 뭐 그런 비슷한 감정이었지 싶다.  


고추가 마를 동안 어디선가 메주도 나타나 함께 볕을 쬐었다. 우리는 그 네모난 메주를 보며 서로 널 닮았다고 다정히 덕담을 나누곤 했다. 막판에는 메주도 조그맣게 부숴서 햇볕에 바싹 말린 다음 곱게 빻았다. 나는 찹쌀밥을 하고 엿기름을 우려서 끓일 때 집안 가득 퍼지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좋았다. 메줏가루가 반드시 근처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좀 구리구리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콤하고 구수한 식혜 같은 냄새가 훈훈하게 퍼졌다. 그전에 엄마가 면보에 엿기름을 넣고 물에 우린 다음 바락바락 주물러 뽀얀 엿기름 물을 내는 걸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엿기름물 자체는 별로 맛이 없었지만 나중에 찹쌀밥을 섞어 갈고 조청을 섞으면 행복한 맛이 났다. 그렇게 끓여서 식힌 엿기름물에 메줏가루, 고춧가루, 소금, 물엿이며 간장, 소주 같은 걸 넣고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면 완성. 재료들이 섞여서 빨간 고추장으로 변하는 모습은 늘 신기했다. 엄마는 새끼 손가락부터 엄지까지 다섯손가락으로 한 번씩 찍어먹으며 모자란 것들을 보태 간을 맞췄다. 그렇게 만든 고추장을 독에 담고 볕이 잘 드는 곳에서 가끔씩 뚜껑을 열고 햇볕을 쪼여주며 숙성을 시키면 됐는데, 그렇게 숙성된 고추장은 파는 고추장과는 달리 뭔가 깊이감이 있어 보이는 검붉은 색이었다. 거기에 쇠고기랑 잣 같은 걸 넣어서 볶음 고추장을 만들 때가 제일 좋았다. 엄마는 고추장이 묵으면 맛도 영양도 좋아진다고 했다. 음식 주제에 나이를 먹어가며 그렇게 커가는 녀석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에게 어른이 되는 매운맛을 선사하는 고추장은 그렇게 스스로가 먼저 어른이 되는 녀석이었다.


세 번째 매운 맛, 엄마의 고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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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은 자극이고 고통이다. 열나고 불나는 맛, 눈물이 핑 도는 맛. 그러나 살다 보면 매운맛이 당길 때가 종종 있다. 얼얼하게 매운 걸 먹고 살짝 땀을 흘리면 왠지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도 난다. 검도장에서 사정없이 날아들던 죽도로 얼얼하게 두들겨 맞고 나서 호구며 머릿수건을 벗을 때 느끼던 그 상쾌함과 비슷하달까. 오랜만에 귀국이라도 하게 되면 다정한 친구들이 그동안 뭐가 먹고 싶었냐고 묻곤 하는데, 가장 생각나는 음식들은 주로 매운 것들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안이 얼얼해지지만 왠지 그 온기가 가슴에까지 전해지는 따뜻하고 빨간 느낌. 단맛이며 신맛, 짠맛은 그립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데 매운맛은 참 그리운 맛이다.


요가를 할 때 주로 정리하면서 하는 자세 중에 사바아사나(Savasana)라고, 송장 자세 혹은 시체 자세라고 부르는 자세가 있다. 그냥 바닥에 편안하게 누워 완전히 이완하는 자세로, 나는 요가 수업 시간에 가끔 이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대로 잠든 적이 있다(어디다 머리만 대면 자는 타입). 선생님은 인간이 취하는 자세 중 가장 편안한 자세가 바로 이 시체 자세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몸을 일으켜 앉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상당히 불편한 자세가 된다는 말이다. 걷고, 뛰고, 공부하고, 일하는 건 오죽하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건 시체들이고, 산 사람은 모두 힘이 든단 얘기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다. 하지만 앉는 자세, 서 있는 자세에 대부분이 딱히 고통을 느끼지 않듯 우리는 그 고통에 익숙해진다. 힘드는 자세를 하고 있어도 힘든 줄 모르고 웃고 행복해 한다.


우리가 별 의심 없이 '맛'이라고 느꼈던 것이 '고통'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삶에 큰 위로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통도 맛이라는 것. 그 맛을 아는 것이 어른이 아닐까. 많이 힘들어도, 눈물이 나고 아파도, 이것도 인생의 맛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일. 그게 바로 우리가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통스러운 맛도 무얼 만나느냐에 따라 달콤하고 고소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매운 양파도 볶으면 달달해지고, 맵싸한 마늘도 익히면 보드랍고 고소해지듯이.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어른이 아닐까.


매운맛.

어른이 되고 탈선이 되는 빨간 맛.

우리는 빨간 것들을 먹고 빨간 것들을 보고 얼굴 빨개져 가며 그렇게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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