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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12.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셋째, 신맛

제주도에서 오던 귤, 레몬 소주, 자우어크라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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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시인은 <분홍 설탕 코끼리>라는 시에서 설탕, 하고 발음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고 했는데 나는 설탕보다는 식초, 하고 발음할 때 입안에 침이 고인다. 특히 시-를 발음할 때. 그럴 때 내 미간은 살짝 찌푸려진다.


신맛은 별로 좋아하는 맛이 아니다. 체질적으로 신맛이 잘 안 받는 느낌이다. 아이셔라는 캔디가 나왔을 때 나는 대체 왜 이런 몹쓸 것이 대 유행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바둑이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죽도록 그걸 사 먹는 친구에게 크리넥스를 내밀며, 아 그래 그렇게 네 턱 밑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침을 흘리면 구강 건강에 도움은 되겠구나 했다. 좋아하는 신맛은 시트러스 계열 과일의 신맛이다. 제일 좋아하는 건 라임, 그다음은 레몬, 그리고는 귤과 오렌지. 그냥 신맛보다는 향이 풍성하고 달콤의 존재감이 쫀쫀히 깔린 새콤달콤이 좋다. 그래서 같은 시트러스 계열이라도 새콤보다 달콤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가끔 쓴맛의 역습까지 있는 자몽이나 유자 같은 건 과일로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땐 한 알씩 입에 넣고 빨아먹던 유판 씨와 한 봉지씩 까먹던 레모나를 꽤 좋아했다. 내가 딱 좋아하던 인위적인 새콤달콤의 맛이 거기에 있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시던 아빠는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병을 얻으셨다. 심한 당뇨였다. 그것 말고도 뭐가 더 있었겠지만 어린 내가 아는 병명은 그랬다. 그렇게 즐시기던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셨다. 그리고는 제주도로 가셨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사업을 완전히 접으셨는지 뒤로 물러나신 건지 그런 자세한 부분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건 아빠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살지 않고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차 가 계시다는 점이었다. 셋째였던 내가 여덟 살에 일을 그만두셨지만 우리 넷을 딱히 부족함 느끼지 않게 키우시고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으니(게다가 언니들은 각각 재료비와 레슨비가 만만치 않은 미술과 음악이 전공이었다), 젊은 시절 자수성가하신 뒤 정말 너무 열심히 일하신 게 맞는 것 같다.


제주도는 원래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돈을 빌려주셨던 분이 돈 대신 그곳 땅을 넘기셨다고 한다. 엄마는 좋아하지 않으셨다지만, 원래 여행도 좋아하고 호인이셨던 아빠는 아마 뭐 그럼 그러라고 하셨을 게다. 그렇게 받아 두었던 땅에 집을 지어 아빠는 제주도로 가셨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스트레스 없이 지내시겠다는 말씀이었지만, 혼자 생활을 꾸리는 일이 더 힘들지는 않으셨을까. 사실 데카르트에 빙의하여 진지하게 의심해 보자면 아빠는 엄마 몰래 술이며 단 것들을 조금씩 드시고 싶으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라도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하셨다면 좋은 거겠지.


아빠는 서귀포 집의 풍경을 평생 그렇게 좋아하셨다. 해가 잘 드는 언덕 위 높은 곳에 있는 집이었다. 그곳에는 아빠가 심으셨다는 동백나무들이 종일 해님과 뺨을 부비며 행복한 윤기를 자르르 흘렸다. 그 곁에서 햇빛을 듬뿍 먹은 낑깡 나무가 앙증맞고 달콤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마당에서는 탁 트인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밤이면 오징어배 불빛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그 아래 바닷물이 매끄러운 은칠을 한 것처럼 반짝여, 보는 사람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곳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정말 눈 안으로 달려드는 엄청난 풍경이 있는 곳이었다.


아빠는 조그만 감귤 농장을 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겨울이면 늘 서울 집으로 감귤이 여러 박스 배달되어 오곤 했다. 제주 감귤은 임금님께 드리는 귀한 진상품이었고 임금님은 귤이 진상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눠주며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까지 시행했다지만, 그 임금님의 후손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러나 조선 후기에 돈이 많아 뭘 샀을지도 모르는) 전주 이씨 해안군파 18대손 이진민 어린이에게는 크게 감흥이 없는 시큰둥한 물건일 뿐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토산품이 진상되었지만 이를 기려 과거까지 시행한 것은 귤이 유일한데, 그만큼 얼마나 귀하고 각별한 과일이었는지는 알겠으나 그건 그분들 사정이었다. 나라면 복숭아나 수박을 기리는 과거를 열었을 거다.


귤 귀신인 작은언니가 주로 손발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었고, 나는 옆에서 동그란 귤에 표정을 그려 생명을 불어넣거나 누군가 먹고 버린 귤껍질에 예술혼을 불어넣는 따위의 놀이를 했다. 사실 제주 감귤은 해상도 높은 쨍한 신맛과 깊은 단맛이 조화롭던, 정말 맛있는 귤이었다. 다만 어린 내가 그 알알이 또렷한 신맛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귤보다 더 극악스럽게 신 것이 있었으니 아빠가 일본어로 나스미깡이라고 부르시던 하귤이었다. 여름 귤이라는 예쁜 이름과는 달리 크기는 자몽만 하고 피부가 곱지 않은 놈이었다. 노란 겉껍질에 검은 티가 많이 박혀 있고 울퉁불퉁한 데다 속껍질 마저 엄청나게 두꺼웠다. 나는 첫눈에 그 녀석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빠는 이 하귤도 한 박스씩 보내주시곤 했는데, 언니는 그놈에게도 열광하며 엄청나게 먹어댔다. 솔직히 언니 혀에는 신맛을 감지하는 신경이 끊어져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엄마는 귤을 권하진 않았지만 하귤은 몸에 좋다며 자꾸 입에 넣어주시려고 했다. 수고롭게 속껍질까지 말끔히 벗겨낸 과육을 통에 담아 두시고는 몇 조각 먹을 것을 명하곤 하셨는데, 입에 넣을 때마다 나는 전기가 흘러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아빠는 섬이 온통 하얀 귤꽃으로 뒤덮이고 꿀처럼 달콤한 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는 5월의 제주도를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당시 의무교육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던 우리가 5월에 제주도를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우리는 유채꽃이 제주도를 노랗게 색칠할 무렵에나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거지, 그 시절에 그렇게 대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아카시아 향 같기도 라일락 향 같기도 하다는 그 귤꽃 향을 나는 아직도 맡아보지 못했다. 황홀한 향기 속에서 아빠는 올망졸망한 어린 우리들이 보고 싶으셨을까. 지금에서야 아빠의 외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물론 엄마의 외로움에 대해서도. 한창일 나이에 병을 얻어 모든 걸 접고 가족과도 떨어져 여생을 조용히 보내기로 했던 아빠. 손 많이 가는 아동기에서 맘 많이 가는 사춘기까지,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오롯이 혼자 건사해내야 했던 엄마. 아빠의 삶도, 엄마의 삶도, 많이 시었을 것이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어릴 때와 커서의 온도 차가 제법 크다. 어릴 적에는 곁에 누워 팔베개를 해 주며 “아탕(사탕)이 좋으냐 쪼코레트가 좋으냐,” 뭐 이런 희한하고 따뜻한 노래를 곧잘 불러주시던 다정한 아빠였다. 농담도 잘 하시고 장난도 잘 치시고, 그림도 잘 그리셨다. 엄마를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려놓고 옆에 “공부하라!”라고 써뒀던 그 그림을 잘 간직했어야 했는데. 그 그림을 보고 우리 넷은 정말 숨 넘어가게 웃었다. 하지만 제주도로 가신 이후로 아빠는 가끔씩만 서울에 들르셨고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아빠가 보내주시던 귤을 제일 잘 까먹던 작은언니는 애교가 많아 아빠가 오시면 아빠 방을 떠나지 않았지만, 아빠의 귤에 덤덤했던 나는 아빠에게도 덤덤한 말 없는 딸이었다. 딱히 말썽 일으키는 법 없이 공부도 잘했던 녀석이니 아빠도 딱히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는 아프셨고, 점점 야위어가셨고, 점점 나이가 드셨다. 가끔 생각한다. 아빠가 병을 얻지 않으셨다면, 아빠가 제주도로 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살갑고 다정한 부녀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빠의 부재가 시었다.


첫 번째 신맛, 제주도에서 오던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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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로는 1994년, 세상에 레몬 소주라는 것이 등장했다. 곧 열풍이 불었다. 숫자에 약해 거의 제2외국어처럼 인식하는 내가 연도를 기억하는 건 내가 94학번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연식을 드러내다니). 어릴 적 엄마가 가끔 물에 타 주시던 주스 가루, 탱의 그 포실포실한 새콤달콤과는 좀 다른 종류의 녹진한 새콤달콤함이었다. 이 새콤달콤함이 소주 안에 스며들었더니 마시기에 한결 좋았던 것이다. 실은 최근에 레몬 소주계의 이데아처럼 느껴지는 새로운 레몬 소주를 영접하게 되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를 위해 좀 아껴둘 생각이다.


술의 신이 나를 보호하사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술 문화가 굉장히 다채로워졌다. 막걸리 주점의 70년대와 학사 주점의 80년대를 지나, 트렌디한 호프며 재미있는 컨셉의 민속주점, 로바다야끼와 소주방 같은 게 반짝거리며 생겨나던 시기였다. 소주도 빨간 병뚜껑의 독 두꺼비를 피해 살곰살곰 도수가 낮은 소주들이며 청하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했고, 시중에 녹색 소주병이 처음 선보이는 등 뭔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술에 진심인 마케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맥주계에서는 93년에 지하 암반수로 만들었다는 하이트가 출시되어 새내기인 나를 깨끗하게 맞아 주었고, 94년에는 지금껏 장수하고 계시는 카스가 출시되었다. 동시에 버드와이저나 밀러, 하이네켄 같은 수입 맥주도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공손히 그들을 품에 안았다.


레몬 소주는 칵테일 소주라고 총칭되던 친구들의 대표주자였다. 체리 소주, 키위 소주, 포도 소주, 오이 소주, 요구르트 소주 등 별별 소주가 다 나왔지만 이 새로운 옷을 입은 소주계의 최강자는 역시 레몬 소주였다. 빨간빛이 수줍던 체리 소주도 제법 선전했지만, 엑스 세대의 상징이라면 나는 역시 레몬 소주가 아닌가 한다. 예쁜 피쳐나 아담한 병, 또는 귀여운 주전자에 담겨 오는 이 소주를 꼴깍꼴깍 부담 없이 마시다 보면 종종 부담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20대에 가장 많이 들이부었던 음료가 아마 맥주와 레몬 소주였을 거다. 그렇게 20대는 탄산 터지듯 팡팡 터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시큼시큼하던 나이였다.  


지금은 종류 불문 한 잔에 볼이 빨개지고 두 잔에 취하기 시작하지만, 당시의 나는 꽤 술을 잘 마셨다. 단맛 편에 등장했던 학구열 총량의 법칙과 더불어 내가 믿는 법칙 하나가 음주 총량의 법칙 내지는 천부술독론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술독이 있다는 이론이랄까. 나는 주신의 은총으로 내 몫으로 꽤 넉넉한 술독을 받아 태어났지만, 그걸 젊은 날에 다 채워 버려서 지금 이 모양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아빠로부터 꽤 훌륭한 알코올 분해 유전자를 받은 나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퍼마셨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오셨던 아빠가 여자도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면서 권하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서 망설이는 기색 없이 쭈욱 비우는 통에 당황하신 적이 있다. 얌전하고 조용한 막내딸 코스프레를 조금 할 걸, 술을 보고 내가 너무 기뻤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시체로 벽을 쌓을 만큼, 94년 연고전 과교류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고대인들을 (뭔가 고대 유적을 남긴 원시인의 느낌이 나는 건 그냥 기분 탓일 거다) 수줍게 구경할 만큼 잘 마셨다. 주신이 나를 예뻐하시느라 그때 두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이 모두 정외과 출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과 교류 행사에 술이 미치도록 풍성했다. 고려대 잔디밭은 술과 토가 흐르는 땅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새콤한 레몬 소주 대신 시큼한 막걸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가 있던 동아리에서는 보통 해당 기수마다 기장을 한 명 뽑고 술 주(酒) 자를 쓰는 주장을 한 명 뽑는 문화가 있었는데, 나는 주모를 담당하기도 했다. 주장 대신 주모가 있었던 건 처음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달고 짜고 시고 맵고 쓴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그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효가 되고 폭폭 썩어서 시큼한 냄새를 피우곤 했다.  


어느 늦여름이었나. 학교 정문에서 체리 소주와 레몬 소주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오래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곧 망했던 상품 같은데(글을 읽은 친구가 두산경월에서 출시했던 리믹스라고 알려주었다!!!), 투명하고 작은 맥주병 같은 것에 노란 레몬 소주와 빨간 체리 소주가 들어 있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하기에 왜 이러세요 둘 다 주세요, 해서 받았다. 날도 덥고 해서 노랑이를 따서 레모네이드 마시듯 쫍쫍 마시며 백양로를 올라갔다. 나는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순수하게 목이 말랐던 것뿐이었다. 마침 트위스트 형식의 돌려 따는 마개였는데, 이거 그러라고 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병나발을 불며 올라가는 여학생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 사람 봐, 실연당했나. 그때 처음 알았다. 아. 사람이 대낮에 한 손에는 체리 소주, 다른 손에는 레몬 소주를 들고 병나발을 불며 돌아다니는 것은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는 일이구나. 실연당하기는, 시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실연이면 깡소주지 무슨 이런 달달한 소주를. 레몬 소주는 연애할 때나 마시는 거라구. 


그렇다. 연애하면서 가장 많이 마신 것도 아마 레몬 소주가 아니었을까.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여학생들 입맛에도 새콤달콤하니 잘 맞아 공식 연애주로서 더욱 호황을 누렸던 것 같다. 연애도 그렇게 꿀에 재운 향 좋은 레몬처럼 새콤달콤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대체로 시큼털털한 연애들을 했다. 자몽 속껍질처럼 쓴맛에 가까운 연애도 있었다. 이미 입에 넣었으니 참고 삼키려고 해도 씹을수록 쓴맛이 올라와 뱉고 싶은. 생각해보면 마음껏 행복한 연애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사랑의 감정을 잘 몰라서 사랑으로 착각했거나, 떠밀려 사귄 느낌이라 내가 행복하지 못했거나, 주위의 반대가 있었거나, 사귀는 걸 주변에 밝히지 못했거나.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을 자꾸 입었던 그런 연애들. 제대로 된 배려를 받아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이십 대에만 할 수 있는 연애들이 있는 건데 나는 처음부터 너무 할머니 같은 연애를 했다. (세상 모든 할머님들께 죄송합니다. 비유를 하자니 그렇다는 거지 할머님들 연애도 풋풋하고 불꽃같다는 거 저도 알아요. 모두 평생 사랑하시며 사시기를.) 돌아보면 좋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어찌 그리 시큼한 맛만 골라 주워 담았는지. 사실 모르겠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 언니의 명언이 있듯이, 나도 서툴렀으니 그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을지도.


내 어린 시절이 달콤했다면 젊은 날은 약간 시었다.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쫓아 열심히 따라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치에 닿기 전에 사람에 닿는 일에 소스라쳐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을 만족시키느라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고, 나의 가장 생기있는 시간들을 나를 위해 쓰지 못했다. 그래도 필요한 신맛이었다. 다만 시다는 것을 빨리 깨닫지 못했을 뿐. 아마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해서였을 거다. 아직 어른이 아닌데 어른인 줄 알고 어른인 척하느라.


나의 젊은 날이 시었다.


두 번째 신맛, 레몬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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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의 마지막을 담당할 음식은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다. 대표적인 독일 음식으로, 양배추를 얇게 썰어서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 참고로 나는 아무 연고 없이 어쩌다 독일에 정착해 살고 있는 독일 교민이다. 신맛이라는 뜻의 자우어(sauer)와 양배추라는 뜻의 크라우트(kraut)가 합쳐진 자우어크라우트는 과연 이름대로 입에 넣으면 시큼한 맛이 강하다. 처음에는 식초에 절이는 피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만들 때는 소금만 쓴다고 한다. 신맛이 나는 이유는 발효를 거쳐 유산균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독일의 김치 같은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소시지나 기름진 고기 요리에 곁들여 먹는다. 동부와 북부에서는 차갑고 아삭거리는 걸 먹는데, 서부와 남부에서는 주로 데쳐 먹거나 볶아 먹거나 한다. 우리는 독일 남부 뮌헨 근처의 시골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따뜻하게 먹는 지역이긴 한데,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왔으므로 우리의 뿌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보통은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고 피클 느낌으로 먹는다. 사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반려인이 김치 대용으로 가끔 사 온다. 라면의 좋은 친구라고.   

왼쪽이 차갑아삭파(동부와 북부), 오른쪽이 뜨뜻물컹파(서부와 남부). 주로 저렇게 소시지나 고기의 침대로 쓰임.

자우어크라우트는 솔직히 달고 짜고 시다. 굳이 설명하라면 개인적으론 중국집에서 먹는 식초 뿌린 단무지 같은 느낌이다. 독일에 살고 있는 이상 운명 같은 음식이긴 한데, 딱히 정이 가는 맛은 아니다. 나는 단무지에도 냉면에도 식초를 뿌리지 않는 취향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자우어크라우트를 한 번 물에 씻어서 먹으면 낫다고 하는데, 뭔가 김치를 물에 씻어 먹는 느낌이라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자우어크라우트가 기특해지는 지점이 있으니, 바로 한국 음식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대로는 신맛이 너무 강해서 일단은 물에 한 번 잘 헹궈서 물기를 빼야 한다. 이걸 부침가루 반죽에 넣고 빨갛게 고춧가루를 풀어 부쳐내면 김치전과 비슷한 맛이 난다. 딱 김치전은 아니지만 김치전의 오랜 절친 같은 맛이 난달까. 이 레시피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머리 위에 핀 조명이 똑딱 켜지면서 단박에 자우어크라우트에 대한 애정이 퐁퐁 솟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분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고춧가루와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처럼 끓여 드시기도 했다고 한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영화 <국제시장>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고. 요즘 교민들은 요놈을 가지고 부대찌개도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우어크라우트는 나에게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맛이다. 타향살이가 시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춧가루 넣어가면서 그 팍팍한 신맛을 정겨운 매운맛으로 바꾸어 가며 사는 일. 자우어크라우트가 약간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교민들에게 김치 대용으로 쓰인다는 점 말고도 그 자체로 김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염장 발효 식품이라는 것도 그렇고, 독일 사람들이 양배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겨우내 먹을 자우어크라우트를 만드는 풍경도 우리네 김장처럼 꽤 정겨운 풍경이다.


해외에서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로, 소수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삶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막 행복해 죽겠는 그런 삶도 아니다. 나는 난민도 아니고, 값싼 노동력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담당하러 이 땅에 온 가스트 아르바이터(Gastarbeiter)도 아니지만 외국살이는 기본적으로 시다. 언어도 음식도 문화도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부대끼는 일은 그 자체로 기운이 드는 일인 데다, 고국에 있는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를 때는 마음속에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독일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을 짧게 가지치기 해 두었다. 원래 외국살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가족들을 비롯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아니면 아무런 일이 없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산다는 것.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지만 그렇게 가지를 자를 때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국 시간을 일고여덟 시간 뒤에서 쫓아가는 유럽의 시간대는 마음이 좀 더 허전해지기 좋은 새콤한 환경을 제공한다. 밤이 찾아올 무렵, 즉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누구에겐가 이유 없이 말을 걸고 싶을 때, 고국의 소중한 이들은 모두 새근새근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라는 건 마치 자우어크라우트처럼 나를 짠물에 담가 발효시켜 신맛이 살곰살곰 피어오르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추억이며 장소며 음식이며 사람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한 방울 두 방울, 조용히 거품처럼 보글보글 피워내며 산다.


외국살이가 시다.

하지만 김치전으로 바꾸어 먹으며 오늘도 꿋꿋하게 산다.


세 번째 신맛, 자우어크라우트(를 이용한 김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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