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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07.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둘째, 짠맛

새우젓, 병어조림, 김과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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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음식엔 기본적으로 짠맛이 별로 없었다. 음식 솜씨는 정말 좋으셨지만 자극적이지 않았고 간도 세지 않았다. 짜야하는 음식은 적절하게 짰고, 늘 좋은 재료를 건강하게 조리해서 식구들 먹이는 걸 긍지로 아셨다. 그런 담백한 음식을 차곡차곡 입에 넣고 자라온 나는 소금 맛에 대한 내성이 몹시 약한 인간으로 자라났다.

엄마의 담백한 음식,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역시 죽이었다. 전쟁을 겪고 자란 부모님은 젊은 날에 죽을 별로 즐기지 않으셨다. 별미로 먹던 수제비나 칼국수도 아빠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밥공기에 푸짐하게 담기는 토실하게 여문 쌀알들이 엄마 아빠의 자랑이자 위안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고 팥죽이며 호박죽을 찾게 되었을 때 나는 조금 슬펐다.

그래도 엄마가 죽을 끓일 때가 있었으니 우리를 불러 새알심을 빚게 했던 동짓날, 그리고 우리가 아픈 날이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때나 배앓이를 할 때면 입안이 까끌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작은 냄비에 보글보글, 흰 죽이 끓었다.


엄마의 죽은 정말 놀랍도록 아무런 맛도 없는 첫눈 같은 맛, 그야말로 순수의 결정체였다. 좀 먹어야 기운을 차린다는 말에 한 입 넣었지만 이렇게 따분한 맛이라니, 마치 저녁 일곱 시에 예정된 칸트 세미나 같은 맛이랄까. 의무감으로도 그 청명한 순수의 이데아를 내 안에 채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내밀어 주신 비밀의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양념 새우젓이었다. 새우젓이 소화를 돕는다는 말을 엄마는 꼭 덧붙이셨다.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새우젓을 한 숟가락 크게 듬뿍 떠내고 쪽파를 조금 뜯어다가 둘을 도마 위에 놓고 다진다. 그걸 작은 그릇에 담아 참기름을 듬뿍 두르고 깨를 넉넉히 올리면 끝. 너무 청순해서 그냥 바라만 보면서 지켜주고 싶던 흰 죽도 그 마법의 새우젓이 올라가면 기가 막히게 맛있어졌다. 고소하고 짭짤한 게 부드러운 죽과 어울려 얼마나 입맛을 당기던지. 그 새우젓만 있으면 얼마나 아프든 간에 나는 뚝딱 한 그릇을 다 비워내곤 했다. 그렇게 죽이 그득하게 들어간 내 작고 보드라운 배 위에는 까칠한 엄마의 손이 올려졌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 뱃속도 마음도 든든하고 따뜻했다. 짠맛은 그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맛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 아빠와는 달리 나는 평소에도 죽을 좋아한다. 죽이며 수제비, 칼국수를 모나지 않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취향이겠지. 그래서 누가 아프면 우리 집에서는 작은 냄비가 아닌, 큰 냄비에 보글보글 죽이 끓는다. 나도 이 죽을 같이 먹고 힘낼 거니까. 힘내서 너를 보살피고 문질러 주고 안아줄 거니까. 아프지 말라고, 어서 털고 일어나라고 온갖 좋은 재료를 다져 넣고 끓인 죽에 아이들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 나도 씩 웃으며 마법의 새우젓을 제조한다. 그렇게 만든 새우젓을 죽 위에 조금씩 얹어가며 한 입씩 떠먹이면, 아이들은 아기새처럼 받아먹다가 종내 자기가 숟가락을 쥔다. 아이들 숟가락질에도 모터를 달게 하는 기특한 짠맛, 꼭 필요한 짠맛. 아픈 아이가 잘 먹고 무리 없이 소화시키는 모습을 볼 때 엄마 마음에는 반짝, 불빛이 켜진다. 그렇게 엄마들은 새우젓을 만든다. 조금은 짠, 간절한 마음으로.   


첫 번째 짠맛, 새우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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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이 왔어요- 생선 들여가세요- 싱싱한 고등어가 왔어요, 갈치 삼치 꽁치- 동태 생태- 자반고등어 임연수가 왔어요."


어릴 적에는 생선을 싣고 마을을 돌며 확성기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생선 트럭이 있었다. 동네를 천천히 돌며 비린내를 풍기는 트럭에는 쌍둥이네도 경일이네도 옥지네도 모여들었다. 그렇게 트럭이 찬찬히 마을을 핥고 지나가면 그날 저녁에는 온 동네에 생선 굽는 냄새가 가득했다.  


지금은 생선이면 환장을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생선보다는 그저 소시지나 고기반찬이었으니, 생선은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생선을 참 좋아하셨다. 엄마는 도톰한 갈치를, 아빠는 껍질이 별미라는 임연수와 포동포동한 삼치를 좋아하셨다. 식탁에 갈치가 오르면 아빠는 엄마 보고 꼭 갈치같이 생긴 여자가 갈치만 좋아한다고 농을 치셨고, 엄마는 피식거리며 갈치가 얼마나 맛있고 발라먹기도 쉽냐며 항변하곤 했다. 우리는 엄마가 갈치를 닮았다는 말에 까르르 웃곤 했다. 나는 임연수라는 놈이 늘 신기했다. 어어어 자로, 치치치 자로 끝나곤 하는 생선들 중에서 임연수라니, 물고기 주제에 왜 이리도 이름이 기품 있는 것인가. 사람 이름 같기도 한 것이 왠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자매는 그 생선이 이 씨인 이면수인지, 임 씨인 임연수인지 심각하게 토론하곤 했다. 부모님이 공통으로 좋아하시던 건 짭짤한 굴비였다. 명절이면 굴비가 한 두름씩 들어오고는 했는데, 각자 다른 표정으로 작은 이빨을 드러내며 굳어버린 작은 생명들이 나는 어쩐지 좀 가여웠다. 가엾은 와중에도 기어이 손가락을 그 조그만 입에 넣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나였다.  


어린 마음에 생선을 딱히 환영하지 않았던 건 우선 비린내 때문이었다. 얘들은 그냥 있을 때도 냄새가 고약했는데, 구울 때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미션 임파서블의 탐 크루즈 저리 가라 할 강력한 침투력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휘저었다. 생선에 더욱 마음의 벽을 느끼게 하는 것은 냄새보다는 사실 가시의 존재였다. 먹기도 불편하고, 어쩌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가시가 입천장을 찌르거나 목에 걸릴 때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옆에는 늘 정성스럽게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서 도톰하고 먹음직한 흰 살만을 내 밥그릇 안에 쏙쏙 넣어주시던 어른들이 계셨다. 사실 생선은 어린이가 먹기 어려운 음식이다. 옆에서 그렇게 도와주는 엄마 아빠, 혹은 다른 어른들의 사랑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생선을 사랑의 마음으로 기억한다. 어린 내 입에 들어갈 가시를 제거해 주시던 다정한 존재들. 행여 다칠까 길 위의 깨진 유리를 치워 주듯, 보드라운 것만 입에 넣으라고 애써 주시던 마음들. 그렇게 나는 사랑의 마음과 다정한 도움으로 생선에 하나하나 맛을 들여갔다. 고소한 갈치도 부드러운 삼치도 맛있었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굴비도 제법 먹을만했다. 엄마 말대로 갈치는 과연 가시를 바르기에 더없이 이상적인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청어 같은 녀석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의 하찮은 자신감과 전투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대체 어디에서 가시가 나타날 줄 모르겠던 그 놀라운 바디. 지금은 이상형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고 있기도 하고 또 이상형이란 게 딱히 의미도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음?), 어쨌든 한때 나의 이상형은 생선 가시 잘 발라주는 남자였다.
 

내가 생선요리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병어조림이었다. 엄마는 달큰한 무를 잔뜩 넣어 솜씨 있게 병어를 조려 주곤 하셨는데, 생선에 그다지 큰 취미가 없던 때부터 이미 나는 병어조림이라면 눈이 반짝 빛나는 어린이였다. 사납게 생긴 다른 생선들과는 달리, 병어는 생긴 것도 약간 큐티했다. 충혈된 눈에 무서운 이빨, 징그러운 내장, 나는 대체로 생선이라면 별로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병어는 달랐다. 만화에 나오는 물고기처럼 동그란 눈에 앙증맞은 입, 동글동글한 몸통. 엄마가 병어를 손질하실 땐 귀엽다고 생각하며 구경하곤 했다. 병어는 동글납작한 몸에 비해 뼈나 내장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먹을 게 푸짐했던 홍익생선이었다. 자작하게 국물이 졸기 시작하고 엄마가 냄비를 기울여 국물을 생선 위로 끼얹기 시작하면 거의 완성되었다는 표시! 정말 얼마나 맛있었는지. 토실한 살을 입에 넣으면 버터처럼 부드럽게 입에서 녹았다.
 

얘가 병언데요. 정말 귀엽지 않나요.

어렸을  자주 먹던 병어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예전처럼 흔히 먹을  없는 생선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잡아버려서 씨가 말라 그렇다고 한다. 유학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쪼르르 귀국했을 , 엄마는 내가 유독 좋아하던 병어조림을 해주고 싶으셨던  같다. 함께 장을 보러 갔는데 엄마가 "아유,  비싸졌네-"하시면서 병어를 살피시는  봤다. , 병어조림! 콧노래가 절로 나왔지만 가격을 보자 내적 비명이 절로 나왔다.

엄마, 나는 오히려 구이가 먹고 싶은데. 우리 갈치 구워 먹자.”

미국에서 조림은 가끔  먹지만 연기며 냄새 가득 피워가며 생선 굽는  오히려 눈치 보였다는  뻥을 엄마는 믿는 눈치였다. (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냄새에 지극히 관대하였고, 김치를 좋아해서 나에게 김치를 직접 담그라 명하던 친한파였다.) 마침 도톰한 제주산 은갈치가 세일을 하기에 엄마 손을 잡아 끌었다. 엄마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진짜냐며 재차 확인하시다가 이내 기쁜 표정으로 갈치를 고르셨다. 그날 우리는 밀가루를 묻혀 얌전하고 먹음직스럽게 구워낸 갈치로 점심을 먹었고, 엄마는 예전 그때처럼    밥그릇 안에다 도톰한  살들을 부지런히 넣어주셨다. 그래도 그때 얻어먹을  그랬나. 내가 다시 공부를 하러 바다를 건너간 이후로 나의 사랑하는 엄마는 서서히 기억을 잃으셨고, 나는  뒤로 다시는 병어조림을 먹지 못했다. 다정하게 가시를 발라주시던 엄마는 그렇게  안에 커다란 가시처럼 걸려 버렸다.  안의 작은 가시는   덩이로 꿀꺽 넘겨버릴  있었지만, 마음 안에 깊이 걸린 가시는 고슬고슬한 쌀밥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을 찌른다.


두 번째 짠맛, 병어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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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려 석쇠에 구운 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릴 적에는 집에서 직접 그렇게 김을 재워 굽곤 했다. 외국에서 내가 직접 그렇게 구우려니 여간 귀찮은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직접 재워서 굽는 따뜻하고 고소한  맛을 따라갈 수가 없다.  부엌은 인덕션에 프라이팬이라서 석쇠 직화구이의  황홀한 불맛에는  미치지만, 그래도 이렇게 구운 김은 시판 김보다 삼천 오백 배쯤 맛있다. 무엇보다 일단 이렇게 참기름과 소금을 사용해서 김을 구워 먹는 방법을 발견해  조상님들께 예를 갖춰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

엄마랑 나는  재우기 콤비였다. 뒷줄부터 차례로 걷어온 시험지 뭉치처럼 도톰한 생김  묶음을 단정히 도마 위에 올리고, 엄마는  손에는 참기름병을, 다른 손에는 소금통을 드셨다. 나는 때로는 기름 솔을, 때로는 북어 꼬랑지를 들고 보조를 서곤 했다. 엄마가 김에 참기름을 알맞게 뿌리면, 창호지에  바르듯  기름을 꼼꼼하게  바르는 역할은 내가 했다. 김이 찢어지지 않게 적절한 강도로 빠르게 펴는 기술이 필요했다. 엄마는 옆에서 그냥 손가락으로 쭉쭉 펴바르며 내 느린 스피드를 보조하곤 했다. 김이 참기름을 먹으면 엄마달인 같은 손목 스냅으로 고운 소금을 촥촥, 알맞게 뿌렸다. 김이 앞뒤로     쌓이면서 골고루 간이 배면 엄마는 김을  장씩 겹쳐 빠르게 구워내셨다. 김이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에 홀려 옆에서  나간 표정을 하고 서있다가, 노동의 대가로  구워진   장을 받아 통째로 입에 쑤셔 넣을 때의  행복이란. 양념 새우젓이  그릇을 비우게 하는 마성의 아이템이었다면 김은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김만 있으면   그릇을 단숨에 꿀떡 먹을  있었다.


유학시절에도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김이었다. 내 나라 말로 읽어도 죽겠는 철학책들을 외국어로, 외국인들의 속도로 읽어내려니 늘 허기가 졌고 식사 준비에 쏟을 에너지는 항상 부족했다. 그럴 때도 김만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 한 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소포로 받은 물건들 중에 가장 자주 받았던 것도 김이었다. 가벼운 데다 완충재로도 손색이 없는 이 기특한 검은 종이들. 내가 가장 최근에 받은 사랑스러운 소포 안에도 김이 가득했다. 김이란 건 그런 물건이다. 먹을 것 마땅치 않은 타지에서 바쁘고 힘들더라도 끼니 거르지 말고 힘내라는. 그렇게 바다에서 난 검은 종이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바다를 건넌다. 짠한 마음, 응원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담고.


세 번째 짠맛,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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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을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 아마 많은 엄마들이 그럴 것 같다. 이 짠 국은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기에는 왠지 마음이 짠해지는 것이다. 엄마와 동의어가 되어버린 국.


미역은 보들보들하고 짠 게 엄마를 닮았다. 우리는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먹는 국이기도 하다. 고통과 눈물과 탄생과 기쁨, 그런 삶의 비릿함이 미역 줄기 안에 굽이굽이 엮여 있다. 미역국이 식탁에 올라오던 날이면 아빠는 왜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미역국을 먹는지에 관한 얘기를 꼭 들려 주시곤 했다.

“한 해녀가 바다 밑에서 고래를 만났는데, 보니까 이 고래가 새끼 고래를 낳고 피를 엄청 흘리고 있더래. 근데 그 엄마 고래가 뭘 우물우물 먹더니 그 피가 거짓말처럼 멈추더라는 거야. 그게 뭔가 싶어서 보니 미역이었다는 거지. 그래서 사람도 아기 낳고 미역국을 먹는 거야. 미역은 피를 맑게 해주는 좋은 음식이니까 많이들 먹어라.”
용감한 해녀님과 고래 산모님의 만남이 다큐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것을 먹으며 아이를 낳고 사는구나.


나도 아이를 낳고 피 흘린 고래처럼 미역국을 먹었다. 두 아이를 타지에서 엄마 없이 낳아야 했던 내게, 이 매끌매끌하고 짠 해초는 많은 위안이 되었다. 고국의 맛, 엄마의 맛, 엄마가 되는 맛. 남들처럼 엄마가 내 출산을 지켜주고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주시진 못하셨지만, 그래도 미역국을 먹을 때는 엄마와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엄마도 나를 낳고 이렇게 미역국을 드셨겠지.


 것들은 모두 바다를 먹고  것들이다. 바다에서 나는 소금은 짜고,  소금이  푸른 물에서 오는 것들도 짜다. 바다는 엄마 품을 닮았다. 드넓은 품으로 만물을 품어주지만 자신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 소금이란  엄마 마음을 햇볕에 말려 얻은 결정 같은  아닐까.

눈물은 맛이  다르다고 한다. 어떤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는지에 따라 성분이 조금씩 다른데, 분하거나 슬플  나는 눈물에 염분이 가장 많다고 한다.  슬프고 억울할  가장  눈물이 나온단 얘기다. 살면서  크게 억울해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대신 슬픔을 느끼는 회로가 약간 미쳐있는 나는 정말  우는 편이다. 엄마와 법정에서 만나던 일을 농담처럼 덤덤하게 말하던 친구의 속이 오죽했을까 싶어서 오가는 사람이 많던 뮌헨의 커피숍에서 눈물을 주르륵 쏟은 적도 있고, 아이가 속상해서 나를   때렸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내가  심하게  적도 있다. (아이가 당황한 모습이 귀여워  그치긴 했다.) 별생각 없이 이를 닦다가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서 엉엉  적도 있고, 라이브 공연을 하던 술집에서 우리나라 재즈 1세대라는 멋진 할아버지들의 공연을 보다가 눈물이 터진 적도 있다. 정말 흥겨웠었는데 하필 "You are my Sunshine"이라는, 엄마가 나에게 자주 불러주셨던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햇살이라며 노래를 불러주던 바다 같은 엄마는  안에 커다란 가시가 되어 남았고, 나는 가끔 엄마를 생각하면서 내가   있는 가장 , 바닷물 같은 눈물을 흘린다.   


짠맛은 엄마의 맛이다.


네 번째 짠맛,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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