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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01. 2021

인생의 일곱 가지 맛 - 첫째, 단맛

드롭프스와 바나나, 그리고 생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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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남아있는 내 인생 첫 단맛을 기억한다.


드롭프스라는 거였다.

동그란 기둥 모양의 드롭프스. 과일이 그려진 겉포장지와 은박지 비슷한 내지를 조심조심 찢어 열면 그 안에 색색의 과일맛 사탕이 줄 맞춰 얌전히 들어있었다. 빨강 노랑 주황 하양 초록, 작은 도넛 모양의 사탕들. 코를 대면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쫍쫍파와 와작와작파로 갈렸는데, 나는 도넛이 실반지가 되도록 천천히 빨아먹는 쪽이었다. 엄지 손톱으로 살살 찍어가며 몇 개의 드롭프스가 남았는지 세어 보기도 했다. 빨간색을 먹으면 혀가 빨갛게, 초록색을 먹으면 혀가 초록색으로 물들곤 했다.


아직 나만의 책상이나 서랍이 없었던 때라, 남은 건 옷 서랍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사슴이며 바위 같은 것들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나무 문을 열면 벽장이 나왔는데, 이불을 개어 넣는 칸과 네 칸짜리 서랍이 든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네 칸짜리 서랍에 우리 네 남매의 옷이 칸칸이 한 서랍씩을 차지하고 들어 있었다. 단맛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려니까 조그만 자개장식이 붙어있던 벽장 서랍부터 떠올랐으니 그곳이 나의 달콤한 보물창고였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수북한 옷가지를 헤치고 서랍 밑바닥에 드롭프스를 보물처럼 파묻어두곤 했다. 그렇게 파묻어둔 누군가의 드롭프스가 없어지는 날에는 형제의 난이 일어나는 거였다.


지금은 입맛이 바뀌어 사탕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굳이 먹는다면 감기 걸렸을 때 칼칼한 목을 가라앉히려고 먹는 커프 드랍(cough drops) 정도. 드롭프스는 사실 저 drops의 우리식 발음이라는 걸 깨달은 건 극히 최근이다. 뽀빠이가 실은 튀어나온 눈을 뜻하는 Popeye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지금은 사탕보다 초콜릿을 갈구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언니들이 동전을 들고 비탈길 아래에 있던 옥지네 가게에 쪼르르 내려가 사 먹던 ‘우산 초콜릿’이며 ‘왔다 초코바’보다는 드롭프스가 그렇게 좋았다. 입에 넣으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지는 초콜릿보다는 단단하게 남아 오래오래 행복을 주는 쪽이 좋았던 모양이다. 깔끔쟁이였던 터라 녹아 들러붙는 초콜릿보다는 만지며 놀 수도 있는 반짝반짝 보석 같은 사탕들이 더 좋았을 지도.


그 당시 사탕이라고 하면 불세출의 베스트셀러 '사랑방 선물'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먹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어쩐지 정말로 사랑방에 있어야 할 것 같던 느낌의 캔디였다. 대체로 할아버지 방 앉은뱅이책상 위나 할머니 방 벽장 깊숙이 곶감 같은 것들과 함께 수호천사처럼 들어가 있는 아이템이어서, 맛도 왠지 약간 어르신들의 맛이라는 깜찍한 생각을 했더랬다. 그 시절에는 어르신들 방에 그 사탕 통을 끊이지 않게 챙겨 두는 것이 효도이기도 했다. 너덧 살 무렵의 나는 그런 것 말고 얄상한 그립감에 이름도 왠지 세련된(세련된 것 맞습니까) 것 같은 드롭프스가 좋았다. 얌전히 줄지어 누워있는 사탕의 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나씩 조심스럽게 꺼내 먹던 기억. 하나를 입에 물면 그 작은 도넛 모양처럼 내 안에 구멍이 퐁 뚫려서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행복감이 들었다. 세상의 달콤함이란 그렇게 맛도 색깔도 다양한 거구나, 그때 배웠지 싶다.

제 기억 속 드롭프스 사진은 도무지 찾기가 어렵네요. 대신 그 뒤로 저의 영혼을 빼앗았던 신호등 사탕, 그리고 유일하게 아직도 가끔은 돈 주고 사먹는 자두맛 사탕을 데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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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맛의 기억은 바나나다.

지금은 바나나처럼 흔하고 싼 과일이 없지만 어릴 적에 바나나는 굉장히 귀한 과일이었다. 만화 <검정 고무신>에도 바나나 에피소드가 나온다. 바나나 한 입이 그렇게 먹어보고 싶어서 심하게 앓던 기영이가, 결국 친구와 가족들의 사랑으로 바나나를 처음 먹어보고 행복해하는 에피소드. 무슨 맛이냐고 궁금해하는 가족들에게 기영이가 말한다. "우선 꽉 깨물 때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아카시아 꽃 향기가 나고... 참기름처럼 고소오-하면서...그리고 하늘땅 하늘땅 하늘 땅땅땅 만큼 맛있어!!!" 기영이는 바나나를 먹으며 감격해서 눈물 콧물을 흘리고, 바나나를 나누어 먹은 만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환희에 차서 하늘을 난다. 그 시절 우리에게 바나나란 그런 맛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넉넉한 편이었다. 아빠가 젊은 날에 병을 얻어 요양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그래서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전까지 아빠는 자수성가하여 사업체를 직접 운영하셨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살았고, 그래서 어린 시절에 바나나도 꽤 자주 먹고 자랐다. 바나나는 정말 달고 부드럽고 맛있었다. 특히 남동생이 어렸을 때 바나나를 좋아해서, 늘 입던 조그만 갈색 카디건을 입고는 빨간 볼을 하고 동그란 빨간 털 의자에 폭 들어가 앉아 바나나를 오물오물 먹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두 번째 단맛의 기억은 바나나 자체보다는 아빠와의 외출이라는 달콤한 기억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내 나이가 너덧쯤 되었을까. 육교 계단을 하나씩 오르던 게 버겁던 기억이 있으니 아마 그 무렵이 맞을 거다. 아빠는 늘 바쁘셨다.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시거나 얼큰하게 취해 들어오시곤 했다. 그래서 아빠 손을 잡고 둘이서만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그날 나는 무슨 일이었는지 아빠랑 둘만 외출을 했던 것 같다. 유독 이 날의 기억이 생생한 건 아마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경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대문 시장이었나 남대문 시장이었나. 아무튼 더운 날이었다. 나는 타월 재질이라 보송보송한 감촉이 좋은, 민소매의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 시장 구경은 늘 짜릿했다. 골라 골라, 신나는 노래 같은 리드미컬한 호객 소리가 압도적으로 울려 퍼지던 공간. 알록달록한 물건들이며 군것질거리에 정신이 팔리곤 해서 길을 잃지 않도록 어른 손을 꼭 잡아야 했다. 시장은 북적북적 활기찬 곳이었지만 조금은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전쟁을 겪고 겨우 삼십 년을 지났을 때라 그랬는지 팔다리가 없는 분들이 많으셨다. 그런 분들이 먹고살기 위해 시장에 좌판을 펼치러 나오셨던 것이다. 잃어버린 팔다리 부분을 가리는 검은색 고무를 어렵사리 땅에 짚어가며 엎드린 자세로 애써 시장 바닥을 헤엄쳐 다니던 그분들. 지금에서야 새삼 생각한다. 푹푹 찌던 여름날에 그 검은 아스팔트며 검은 고무의 열기가 오죽했을까. 엄마는 그런 분들 바구니에 넣어주고 오라며 내게 곧잘 동전을 주시곤 했는데, 나는 안이 텅 비어있을 검은 고무가 두려웠고 짤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드는 분들의 충혈된 눈과 마주치는 게 무서웠다. 겁먹은 눈으로 동전을 넣고 도망치는 꼬맹이를 보는 그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웃어 드렸다면, 아니 그냥 무서움 없는 눈으로 눈을 마주쳐 드렸다면 그 빌어먹을 열기가 1초라도 잠시 가시는 느낌을 드릴 수 있었을까. 어렸던 나의 삶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없이 달콤했기에, 다른 인생의 짜고 매움을 알기 힘들었다.   


시장에는 과일을 파는 리어카도 많았다. 잘 익은 참외며 농익은 복숭아가 내뿜는 그 아찔하고 향긋한 냄새에 사람들도 파리들도 몰려들었다. 그날은 아빠 손을 잡고 육교를 건너고 있었는데 아래쪽으로 샛노란 리어카 하나가 보였다. 바나나가 수북하게 담긴 리어카였다. 바나나 맛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극도로 뭘 사달라는 게 없는 꼬맹이였다. 물욕이 없었나 싶어 생각해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뭔가 사달라는 말은 왠지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더운 날씨에 육교의 계단은 조금 고됐다. 다리를 크게 크게 내디뎌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다. 아빠는 천천히 속도를 맞춰 주셨다. 계단에도 뭔가를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커다란 고무 대야에 이런저런 학습지며 문제집을 담아 팔고 있던 분이 계셨다.


지금은 공부는커녕 누워있기 바쁜 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런 걸 너무 좋아했다. 한글도 일찍 깨쳐서 언니들이 한 장씩 풀던 일일공부를 선망의 눈으로 보곤 했다. 지금의 마음가짐과 이토록 다른 걸 보면, 학구열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서 어린 시절에 그렇게 공부의 기운을 다 소비하고 이제는 망한 건가 싶다. 어쨌든 넋 나간 눈으로 그 학습지를 보느라 내가 아마 걸음을 멈췄나 보다. 아빠가 그런 나를 보시고는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고르라고 하셨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지! 그 기쁨이 너무 커서 그날이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다. 수영모자를 쓴 채 자유형을 하는 사람 그림이 있고 네모 칸이 두 개 붙어있어서 그 안에 ‘수, 영,’이라고 써야 했던 첫 페이지마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마음으로 아빠가 사주신 학습지 책을 꼭 쥐고 육교를 내려왔는데 세상에, 아빠가 거짓말같이 그 바나나 리어카 앞에서 멈추셨다. 바나나를 두 개 사서 하나를 내게 주셨을 때 나는 행복해서 마음이 얼얼했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노란 바나나를 까먹으며 노란 햇빛을 받던 그날의 기억이 나는 참 달콤하다. 평생을 두고 막내딸에게 감정 표현이 많지 않으셨던, 선생님 같은 아빠였지만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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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프스, 바나나에 이어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달콤한 기억이라면 역시 어린 시절의 생일이다. 단맛의 추억에 생일 케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기억 속 단맛의 top 3가 모두 어린 시절인 것을 감안하면, 인생의 단맛이라면 역시 유년기가 아닐까 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 같았던 그 시절. 늘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것도 많았던 날들. 인생의 단맛을 서슴없이 유년기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내 어린 시절을 달게 만들어 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달콤쌉싸름하게 올라온다. 이제 나는 그때의 엄마 아빠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렸고, 인생은 더 이상 달콤하지만은 않다.


우리 넷은 큰언니 빼고는 생일이 겨울에 몰려있어서, 어릴 때는 엄마가 합동 생일파티를 열어주셨다. 예쁜 한복을 내어 주시고 머리도 특별히 예쁘게 빗겨 주시던 . 초코볼, 캐러멜, 크림빵이며 곰보빵, 엄마가 토끼 모양으로 잘라 소복하게 담아주셨던 사과들, 접시에 수북하게 담겼던 캔디들, 맛있는 김밥, 그런 것도 좋았지만 역시 하이라이트는 생일 케이크였다. 지금은  주고  먹으라고 해도 손이   가는 초코 버터크림 케이크가 그때는 그렇게 황홀했다. 반들반들 매끄러운 고동색 크림에 공주님 옷에 달릴 법한  레이스 장식이 있던 케이크. 합동 생일 파티라고 그날만큼은 평소에 제과점 진열장에 코를 박고 눈으로만 보던 2 케이크를 먹는 호사도 누렸다. 우리는 케이크 위에 올라간, 지금 생각하면 먹는  아니지 싶은 장미꽃들을 서로 입에 넣겠다고 투닥거렸다. 케이크 위에는 비현실적으로 새빨간, 왠지 아티피셜 레드라고 부르고 싶은 색깔의 동그란 젤리가 듬성듬성 올라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도 특별했다. 초코 케이크 위에 빨간색 구슬이 올라가서  예쁘다고 생각했다. 맛도 더할 나위 없이 아티피셜하던  젤리들.   


케이크라는 건 이 세상에 잘 왔어, 네가 태어나서 참 좋아, 축하해-라는 달콤함이 층층이 쌓인 물건이다. 달콤한 유년기를 지나 쑥 커버린 나는 이제 인생의 짜고 시고 맵고 쓴 오만가지 맛을 알게 되었지만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둔 순간만큼은 인생이란 그래도 달콤한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사르르 녹는 맛. 평생 그렇게 부드럽고 달콤하게 나이를 먹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가끔은 짭짤한 라면이 당기고 때로는 혀에 마비가 올 것 같은 매운 주꾸미 볶음이 당기듯이, 달콤하기만 한 인생은 그렇게 큰 재미도 보람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음식을 하거나 빵을 구울 때도 단맛을 돋보이게 하려면 설탕 한 스푼이 더 필요한 게 아니라 소금 반 스푼이 필요하듯이. 원래 인생은 그런 건가 보다.  


케이크 취향을 아는 사이란 각별하다. 적어도 생일을 여러  축하해  적이 있는 사이여야  사람의 케이크 취향이 각인된다. 반려인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가장 좋아한다.(.. 한다. 치즈 케이크를 가장 좋아하는  알았는데, 각별하지 않은 사이임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낭패다.) 콜레스테롤 수집욕이 있는(   수집하고 자빠졌) 나는 좋은 동물성 지방으로 만든 부드럽고 고소하고 신선한 크림을 잔뜩  케이크가 좋다.  위에는 뭐가 올라가도 좋고 올라가지 않아도 좋다. 사실 과일 종류가 좋긴 한데, 빵집 딸이었던 친구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과일은 물러질까   씻지 않는다는 얘기를   뒤로 마음이 약간 복잡하다. 나에게는 아이가  있는데, 여섯 살짜리는 이미 확고한 케이크 취향을 확립했고  살짜리는 아직 갈팡질팡 흔들리는 중이다. 첫아이는 스스로 자기 생일 케이크를 고르기 시작한 뒤로는 변함없이 딸기를 올린 케이크를 주문한다. 딸기가 풍성한 계절에 태어났기에 어렵지 않게 딸기를 듬뿍 올려줄  있어 기쁘다. 작은아이는  쿠킹 앱을 즐겨 보면서 먹고 싶은 케이크를 고르곤 하는데, 주로 초코를 흩뿌릴 것인가 처바를 것인가 사이에서 격렬하게 고뇌한다. 매사에 까다롭지 않아서 딸기만 올라가면 오케이인 형과는 달리, 꼼꼼한 동생은 주문마저 디테일하다. 지난 생일에는 내가 생전 만들어  적이 없는 피치 크림 케이크, 그것도 시트는 쿠키 크럼블이고  위에는 바닐라 커스터드가  , 복숭아를 갈아 넣은 분홍빛 크림이   들어가고 윗부분에는 생과육을 올려 젤라틴으로 굳히는 케이크를 인자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주문하는 바람에 나는 서왕모가 되어 동네 마트를 전부 돌며 단단한 육질의 복숭아를 찾아야 했다.


아이들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의 느낌은 참 특별하다. 지금의 내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존재인 내 아이들. 그 아이들이 내 안에서 나온 날. 가능하면 오래, 힘닿는 때까지 아이들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잘 왔어, 네가 태어나서 엄마는 참 좋아. 후일 세상에 나가 그 어떤 맛을 보더라도 사랑이 듬뿍 든 이 단맛을 오래 기억해 주기를.    

첫째(베리 러버)의 생일 케이크들. 돌 땐 손님들과 나누기 좋게 컵케이크를 만들었고, 그 이후는 취향에 따른 주문의 결과물입니다.
둘째(초코 러버)의 생일 케이크들. 마지막 사진이 문제의 피치 크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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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은 우리를 북돋아 주는 맛이다. 꼭 산타 할아버지처럼 복슬복슬한 흰 수염이 정겨웠던 나의 지도교수님은 오후 세미나가 서너 시간씩 길어지면 초코과자가 가득 든 바구니를 교실에 돌리곤 했다. 바사삭, 그 초코과자 하나에 힘을 얻어 우리는 다시 머리를 굴리고 입을 열었다. <메리 포핀스>에도 설탕 한 숟가락이 쓴 약을 부드럽게 넘길 수 있게 해 준다는 기운찬 곡이 있다. "Just a spoonful of sugar helps the medicine go down, In a most delightful way!"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울먹이는 날에는 제일 좋아하는 청포도맛 사탕을 조그만 입에 쏙 넣어주고 집을 나선다. 눈썹 끝에 눈물방울을 매단 아이는 볼을 터질 것처럼 볼록하게 해서는 (미치도록 귀엽다) 내 손을 잡고 별 말없이 아장아장 걷는다. 단맛의 힘이다.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맛, 힘든 일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맛.


단맛은 우리를 구원하기도 한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폭탄 소리가 들려오는 대피소에서 의료진의 도움 없이 혼자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 고이 간직했던 초콜릿 한 조각을 내밀었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초콜릿 조각을 받아 입에 넣은 산모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안에도 사탕을 챙기는 소녀 병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선으로 가야 하니 두 시간 동안 짐을 챙기라는 말에,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오로지 초코사탕만을 트렁크 가득 넣어 챙겼던 십 대 소녀가 있었다. 가방에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무겁냐는 질문에 소녀는 밝게 초코사탕이라고 대답하고, 그 대답을 들은 나이 지긋한 위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책 속에는 사탕을 사고 싶었던 다른 소녀의 이야기도 나온다. 배급표 없이 사탕을 사러 갔던 소녀 병사.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조그만 십 대 소녀와 그녀가 들고 있던 그녀보다 더 큰 소총을 본다. 그리고는 한 목소리로 점원에게 부탁한다. "그 아이에게 사탕을 줘요. 우리 배급표를 가져가면 되잖아요."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공간에서 부디 사탕이 그 보드라운 영혼에 위안을 주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안에는 인생의 달콤한 조각들로 가득하다.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찰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콘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 수필의 외국 버전으로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My favorite things라는 노래가 있다. 일상은 달콤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달달한 노래. 장미에 내려앉는 빗방울이며 고양이의 옴찔대는 수염, 밝은 색의 구리 주전자와 따뜻한 털장갑, 끈으로 묶은 갈색 소포 같은 것들. 우리 인생에는 개가 물거나 벌이 쏘는 순간이 있지만 이런 달콤한 것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힘이 생긴다는 사랑스러운 노래다.


세상에는 단맛은커녕 어떤 맛이라도 좋으니 입에 넣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유년기를 달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도 안다. 최근에 소설가 김영하 님의 온라인 북클럽에서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 구경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소설가의 질문에, 말없이 그저 나를 안아주고 싶다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자니 달콤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왠지 미안했고 심지어 이유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곱게 자라서 맺힌 데가 많지 않은 사람의 책무는, 자기가 받은 달콤함에 죄책감을 얹어 쓴맛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받은 사랑이며 좋은 말들, 따뜻한 마음들을 잘 기억하고 내가 받은 만큼 세상에 부지런히 작은 달콤함들을 얹는 일. 그게 나 같은 행운아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사탕이며 캐러멜, 젤리, 마카롱, 아이스크림 같은 노골적인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신맛 짠맛 매운맛보다는 단맛이 훨씬 편하고 기분도 좋다. 반찬은 은은하게 단맛이 도는 걸 좋아하고 술도 가볍게 단맛이 느껴지는 쪽이 좋다. 내 인생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시지도 짜지도 쓰지도 맵지도 않았으면 좋겠지만, 혹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단맛이 종종 나를 구원해 주리라 믿는다. 사실 슬픔과 절망이 나를 엄습할 땐 입에 그 어떤 것도 들어가지 않는 법이지만, 그래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싹퉁머리 없이 배가 고파지더라. 꼭 맛으로서의 단맛에서 구원을 찾지 않더라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콤해지는 사람들의 얼굴이며 좋아하는 것들은 분명 나의 작고 달콤한 구원자들이 되어줄 테니.


세상에 단맛이 있어 우리 삶은 여전히 살만하다.  



첫 번째 단맛, 드롭프스
두 번째 단맛, 바나나
세 번째 단맛, 생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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