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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21. 2019

자연섬 이야기

두 번째 동화:  토머스 홉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이야기는 동네도, 나라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예요.


자연섬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섬에 자연인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자연인들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몰랐어요.

하지만 가끔씩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다 마주치곤 했지요.


포도넝쿨이 우거진 언덕에 사는 자연인은 해님을 숭배했어요.

시냇물 옆 컴컴동굴에 사는 자연인은 달님을 숭배했어요.

향기로운 느티나무 숲에 사는 자연인은 별님을 숭배했어요.

이들은 자기가 믿는 해님, 달님, 별님이 가장 힘이 세다며 만날 때마다 투닥거렸습니다.


자연섬 언덕 연못가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탐스러운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서 있었어요. 사과가 어찌나 크고 달던지, 하나만 따 먹어도 하루 종일 배가 불렀답니다. 사과는 자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거리였어요.


와삭와삭.

아이구 맛있다.


사과 한 알을 맛있게 먹고 배가 부른 한 자연인이 사과나무 밑동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요.

‘흠. 내일도 이 맛있는 사과를 또 먹고 싶은데. 내일 비바람이 불어 사과가 연못 물에 죄다 풍덩풍덩 빠져 버리면 어쩌지? 옳지, 사과를 양껏 따서 내가 사는 동굴 안에 넣어두어야겠다. 그럼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맛나게 먹을 수 있겠지.’


잠시 후,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사과를 따 먹으러 온 다른 자연인이 깜짝 놀랐어요.

아침에 볼 때만 해도 가지가 휘어질 만큼 주렁주렁 달려 있던 사과가 글쎄 절반밖에 안 남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응? 사과가 다 어딜 간 거지? 이거 큰일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이 자연인도 첫 번째 자연인과 같은 생각에 다다랐어요.

'그래. 이대로는 불안해. 더 없어지기 전에 내가 많이 따 가야겠다.’


다음, 그다음,  또 다음.

사과나무 앞에 오는 자연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욕심껏 사과를 따 갔어요.

얼마 안 가 사과나무 가지에는 사과가 한 알도 남지 않게 되었답니다.


다음 차례로 도착한 자연인은 그만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맛있는 사과를 먹으려고 오늘은 물고기도 한 마리 안 잡았는데, 탐스럽게 달려 있어야 할 사과가 온데간데없지 않겠어요? 대체 사과는 다 어디로 간 거지?    

 

사과를 먹지 못해 한 동안 시무룩하게 누워 있던 자연인은 할 수 없이 물고기를 잡기로 했어요.

나무 막대기를 하나 쥐고 어슬렁어슬렁, 냇가로 내려갔지요.

저 앞에 다른 자연인 하나가 물을 마시러 가나 봐요.

그런데 어?

옷자락이 동그랗게 불룩하네요?


옳거니, 자연인은 손에 잡고 있던 나무 막대기로 그 사람의 엉덩이를 내리쳤어요.

“으아악! 왜 이래!”

난데없이 맞은 사람이 엉덩이를 감싸 쥐고 팔짝 뛰어오르자, 옷자락 안에 들어있던 사과 두 알이 툭 툭 떨어졌어요.

엉덩이를 때린 자연인은 신이 나서 사과를 양 손에 쥐고 도망쳤어요.


“아이고 엉덩이야... 그나저나 큰일이네. 나도 배가 고픈데.”

엉덩이에 멍이 시퍼렇게 든 자연인은 아픈 엉덩이를 한참 문지르다, 자기도 옷 속에 커다란 돌멩이를 감추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사과를 가지고 있는 놈이 보이면 나도 때리고 빼앗아야지.’


그렇게 자연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자다가도 아야, 습격을 당하고 졸다가도 철썩, 따귀를 맞았어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저 친구가 나에게 언제 몽둥이질을 할지 모르니 마음이 너무 불안했지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상대방을 힘껏 때리는 것이었어요.

상대방이 아이쿠, 얼굴을 감싸 쥐고 넘어졌을 때 얼른 도망가면 나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자연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몸에 상처만 늘어갔답니다.


한편, 사과를 그득그득 따서 저장해 놓은 첫 번째 자연인의 동굴 속에는 새콤달콤한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어요.

동굴 바닥에 고인 예쁜 색깔의 액체에서 나는 향기였습니다.

와아. 사과가 맛있는 사과술로 변한 거였어요!


“킁킁, 이게 뭐지?”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다 혀로 살짝 핥아 본 자연인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생전 처음 맛보는 황홀하고 찌르르한 맛!

새콤달콤한 향에 홀려 홀짝홀짝 들이키다 보니 해롱해롱, 기분도 엄청나게 좋아졌어요.
자연인은 동굴 밖으로 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답니다.

"사과 같으으으으은 내 얼구우우우우울~ 으헤헤헤헤헤헤헤!"


소문이 퍼지자 이제 자연섬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사과보다 훨씬 맛 좋은 사과술을 원했어요.

이제는 사과술을 내놓으라며 서로 싸우기 시작했지요.


자연인들이 싸울 때, 평소에 조금 힘이 세고 약한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상대방이 사과술에 얼큰하게 취해 잠들었을 때 몰래 공격하면 상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거든요.

힘이 약한 친구들은 상대를 때리는 대신에 꾀를 내기 시작했어요.  

음식에 몰래 독버섯을 넣으면 아무리 곰처럼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자연인도 아이구 배야, 꾸르륵꾸르륵 배탈로 풀썩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과술에 취한 자연인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아악, 머리에서 피가 나고, 으아악, 다리가 부러졌어요.


거기에다 사람들의 싸움을 더욱 부채질한 건, 그들이 믿는 해님과 달님, 별님이었어요.

해님을 숭배하는 자연인들은 달님을 숭배하는 자연인들을 저주하고, 달님을 숭배하는 자연인들은 별님을 숭배하는 자연인들을 증오했어요. 이들은 사과나 사과술을 서로 빼앗겠다는 목적이 없이도, 그저 믿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아주 커다란 돌멩이를 던졌어요.


자연섬은 마치 지옥 같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기를 휘두르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잠도 잘 수 없었고, 물고기를 잡을 수도,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지요.


온몸 가득 멍들고 여기저기 부러진 자연인들은 하루라도 좋으니 마음 편히 발 뻗고 자 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아아, 이런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이대로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서로에게 맞아 죽고 말 거야.”

“그래. 우리의 다툼을 막아 줄 임금님을 모시기로 약속하자.”


약속. 약속.

자연인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새 임금님을 모셔왔어요.

한 손에는 번쩍이는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해님과 달님, 별님이 모두 새겨진 멋진 지팡이를 든 근엄해 보이는 임금님이었어요.

“위대한 왕이시여. 우리의 모든 힘을 당신께 맡기겠으니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싸움을 중재해 주세요.”   

그들은 임금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기로 맹세했어요.


임금님이 칼과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외쳤어요.


“이제부터 사과는 하루에 한 개씩만 딸 수 있다. 내 칼이 보이느냐. 이를 어기는 자, 남의 사과를 훔치거나 빼앗은 자는 모두 감옥에 넣을 것이다.”


"또 해님, 달님, 별님을 믿는 자들이 서로를 해하려고 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해님을 믿는 자들은 뜨거운 햇빛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종일 서 있는 벌을, 달님을 믿는 자들은 달님이 떠서 다음 날 새벽에 질 때까지 잠들 수 없는 벌을, 별님을 믿는 자들은 눈 앞에 별이 보일 만큼 배를 곯는 벌을 내릴 것이다. "


무서운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리고 질서를 바로잡자, 자연인들은 다시 발을 뻗고 푹 잘 수 있었어요.

물고기도 잡고, 사냥도 하고, 열매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를 수 있었답니다.

새로 보금자리를 짓는 사람도 생기고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지요.

다툼이 있을 때마다 임금님이 중재해 주니 안심하고 장사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자연섬은 점차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곳으로 변해갔어요.  

그리고 다음 해, 또 다음 해,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렸지만 아무도 욕심껏 따 가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아 참, 이 임금님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바로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의 임금님이에요.

이름이 괴상하지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에는 어떤 임금님이 있나요?

그 임금님은 무서운 칼과 번쩍이는 지팡이를 든 임금님인가요?




아이들을 위한 한 마디


동화에는 임금님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임금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에는 임금님 같은 사람이 있나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나요?


자연섬에 사는 원시인들은 서로를 죽어라 때리게 되었어요.

원시인들이 원래 나쁜 사람들이라서 서로 싸우게  걸까요?


우리는 대체로 태어나면서 이미 어느 동네의 주민, 어느 나라의 국민이 되어 있곤 해요. 이걸 공동체라고 해요.

이런 공동체가 없는 삶은 어땠을까요?

나라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어른들을 위한 한 마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본 이야기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빠지고, 그 결과 계약을 통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하는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쉽게 써 보려고 했습니다. 피비린내 가득했던 종교전쟁, 그리고 더 좋은 재화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까지 고루 담아보려고 했는데 표현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홉스는 어떻게 정치 공동체가 탄생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는 가설을 세웁니다. 이 자연 상태는 실제 인류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 머릿속에 그려보는 세상입니다.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는 전쟁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는 사람이 악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평등하며 공포와 불안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내일도 모레도 먹고 싶은데, 절대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성악설을 주장한 인물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홉스가 그리는 인간은 이렇게 '천성이 악한 인간'이 아니라 '똑똑하고 불안한 인간'입니다. 홉스는 인간의 욕망을 굉장히 심층적으로 파악했고. 인간 존재의 근원인 불안과 공포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 철학자입니다.


왠지 어둡고 고약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알고보면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원주의, 정치권력의 기반으로서 동의의 중요성, 근대적 자유의 개념, 인간의 욕망과 공포에 대한 이해 등 굵직한 논점들을 남기며 근대 정치철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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