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한 번째 시
2022. 8. 26.
서상영, ‘시의 씨앗' - 시집 <눈과 오이디프스(문학동네, 2021) 중에서
아무래도 씨에서 시가 나온 것 같다
볍씨 콩씨 깨씨 감자씨
그 작은 숨들의 온기가 어른거려
푸른 밀림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갈 때
딱정벌레처럼
몰래 시는 태어난 것 같다
시는 씨에서 나온 것 같다
두식씨 정아씨 순신씨 소월씨
그 의미가 떨어져나간 뒤 찾아드는
고유한 여운이 시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시는 또 씨로 갈 것 같다
사슴씨 돌씨 소나무씨
도꼬마리씨 바다씨 안녕하세요!
애틋하게 부를 때
달씨 별씨의 비유를 제 몸에 바르며
태양씨의 문법에 따라 시는 무럭무럭 자랄 것 같다
뭐 이렇게 사랑스러운 시가 다 있담, 하면서 읽었습니다.
씨, 그 작은 숨의 온기에서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듯이, 볍씨 콩씨 깨씨 감자씨, 그 작고 동그란 행성에서 조용히 시가 태어나는군요. 그 작은 동그라미 안에 잎도 들고 뿌리도 들고 꽃도 열매도 향기도 예쁨도 다 들어있다는 놀라운 신비에서 시는 톡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씨,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는 이 단어 역시 하나의 세계를 열고 우주를 만드는 마법의 단어지요. 특히 "의미가 떨어져 나간 뒤 찾아드는 고유한 여운"이 시가 된다는 말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나온 시들이 또 씨로 간다니. 시인은 돌고 도는 우주의 순환 법칙을 이리도 아름답게 동그라미로 그려 놓습니다. 시가 통과한 마음, 시를 만진 손, 시가 스민 눈은 또 새로운 씨들을 부릅니다. 세상 만물이 부름의 대상이고, 또 다른 시를 들려줄 존재들이 되는 거죠.
주변의 시인들을 보면 시의 씨앗을 발견하는 눈이 정말 놀라울 때가 있어요. 친구의 입가에 묻어있는, 그림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구겨진 바지 주머니 안에 든, 고양이 꼬리에 매달려 있는, 지나가는 소녀의 어깨에 앉아 있는, 지하철 앞에 앉은 사람의 신발에 묻어있는, 그 작은 씨앗들이 그들 눈에는 반짝 빛나며 보이나 봅니다. 그렇게 발견한 시의 씨앗을 그분들은 꼭 농부처럼 마음에 심어 두더군요. 그렇게 한참 품고서 조금씩 단어의 싹을 틔우고 말의 잎사귀를 달아 키워내요.
“달씨 별씨의 비유를 제 몸에 바르며 태양씨의 문법에 따라 시는 무럭무럭 자랄 것 같다.”
너무 귀엽죠.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는 시들을 옆에서 볼 수 있어서 참 기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미소를 짓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시네요.
올해도 시 열심히 읽겠습니다. 아니, 시는 열심히 읽는 게 아니라 무심히 읽는 쪽이 더 어울리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정정해야겠네요. 올해도 시를 가까이 두겠습니다.
이런 저의 다짐에 잘 자라고 물 주듯, 평생 아끼고 사랑할 시인이 또 한 명 생겼습니다. 제가 쓰고 김새별 작가님이 그려주신 책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의 편집자님이 올해 문화일보와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셨어요. (2관왕이라니!) 널리 알리고 싶은 기쁜 소식이라 여기에도 전합니다. 강지수 시인, 기억해 주세요 :)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요
아뇨 아뇨 하고 뒤돌아 도망치다 보면
잔뜩 눌어붙은 마음에 칼질을 해대는 것
한 가지 알려줄까요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
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피해 길을 돌아갈 때 혹은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천성
나와 분리된 조각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워하는 겁니다
발가벗고도 이를 내보이며 웃었던 날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시원하다
아 아 아
낮지도 높지도 않은 미지근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옆집 아이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안부를 물을 때
보다는 낮고
지저분한 소문을 전할 때
보다는 높다
언뜻 저 사람과 그 옆 사람의 목소리하고 똑같다
우리 셋이 동시에 얘기하면 참 재미있겠죠
진지한 모임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소리만 낸다
아 아
교실은 소리를 머금은 상자가 되고
이가 나간 머그잔에 물을 담아 마시다가 바닥에 흘렸다
닦아내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물 위로 번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진짜사람들이 진짜미소를 지으며 진짜 멋진 진짜옷을 입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행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