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놀러 간 철학자>를 시작합니다

by 이진민

같은 동네에서 십 대를 함께 보내고 이십 대에 미국에서 다시 만난 친구가 배꽃처럼 하얗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나는 미술관에 가는 게 취미야. 그림 보는 게 너무 좋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친했던 친구가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미술을 1도 모르는 게 아니라 0.1도 모르는데, 저 친구는 언제 저렇게 교양미 넘치는 아가씨가 된 거지.
모르겠다, 나는 살던 대로 술이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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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릅)


그런데 알고 보니 미술관은 미술을 0.001도 모르고 가도 즐거운 곳이었다. 교양 따위 없어도 상관없는 곳이었다. 모든 걸 자유롭게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걸 이렇게 느끼고 싶다는데 그게 틀렸다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는 나에게는 특히 즐거운 곳이었다.

정해진 정답이 없는 철학적 사유처럼, 미술작품 해석에도 딱히 정답은 없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다 보니 생각이 희한한 곳에 가 닿는 경우가 많았는데,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이 비유를 꽤 겸허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그림들이 그렇게 보였다.
캔버스 곳곳에서 철학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빼꼼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너, 이 그림 보면 내가 생각나지 않니?


그렇게 나는 거의 삼십 대에 들어서야 그림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됐고, 십 대의 내가 떡볶이집 드나들듯, 이십 대의 내가 술집 드나들듯, 삼십 대의 나는 그렇게 미술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바로 미술관이다.


실은 이 글들은 학생 때부터 가장 쓰고 싶었던 것으로, 마음속에 아주 오래 묵혀뒀던 아이디어들이다.
미술도 철학도 어렵다고 생각해서 살짝 도망치고 싶은 분들에게, 이 글들을 수줍게 권하고 싶다.


저도 노는 겁니다. 같이 놀아요.



<미술관에 놀러 간 철학자> _ 프롤로그



철학과 미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들이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고?

미술은 언어 예술이 아닌 시각 예술이므로 우리에게 '생각'보다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미술을 볼 때 생각에 잠긴다.

작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제목을 보고, 작품을 다시 보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인다.
작품을 눈에 담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서는 엄청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그렇게 우리는 서재에서, 미술관에서, 생각한다.
철학자의 잠언을 곱씹으면서 생각에 잠기고, 미술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철학과 미술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유하게 만드는 데 그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다.


그림은 대체로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좋은 생각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그림을 해석하는 순간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그림 한 장으로 우리는 머릿속에서 우주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철학을 어려워하는 것은 논의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호하게 느껴지는 개념들을 벽돌 삼아 쌓아 가는 논리의 성이다. 벽돌 자체도 쥐기 어려운데, 그걸 가지고 엄청난 성을 쌓아 놓았다. 우린 대체로 그 성에 들어가기가 싫다. 긴 글보다는 짧은 동영상이 편하게 느껴지는 시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으로 큰 건물을 지으려고 하다 보니, 소주 반 병을 콸콸 들이켜도 없던 두통이 철학책을 펼치면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얘기가 아닌데, 소통 방식에서 크게 감점을 당하는 게 철학이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눈에 보이는 스위치를 통해 우리가 머릿속에서 철학적인 집 하나를 지어 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스위치로 인해 집짓기가 좀 더 쉽고 재밌어지지 않을까?
회색으로 느껴지는 철학에 온갖 색이 반짝이는 미술이 겹쳐지면 철학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간 늘 철학을 말랑말랑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미술과 철학, 둘을 재미있게 연결할 수 있다면 철학자들이 내놓은 개념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따라서 여기에 담길 이야기들이 정답은 아니다.

어떤 그림에 어떤 철학적 해석을 정답처럼 붙여버리는 것은 사실 내 의도와는 정반대 되는 일이다.
내가 하려는 것은 '놀이'이다.
시각을 통해 생각하는 놀이.
미술을 도구로 삼아 생각하는 놀이.

그림으로 철학을 맛보는 놀이.

철학적 사유에 어떤 정답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미술 작품을 느끼고 해석하는 데에도 어떤 정답은 없다. 미술사적 논의나 배경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미술작품들을 철학적으로 느끼고 생각해보는 놀이를 하고 싶었다.

그 놀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과 철학 양쪽 모두를 편하게 느끼게 하고, 사람들의 사유의 근육을 튼튼하게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에서 편하게 나 스스로도 놀이처럼 시작한 글들이다.
정답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정답을 찾겠다는 강박 없이 내 생각을 자유롭게 이리저리 펼쳐 보는 건 굉장히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메시지도 꼭 덧붙이고 싶었다.


이를 테면, 이런 작업이다.
정의의 여신상은 왜 눈을 가리고 있을까?

편견 없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과, 정의로운 제도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쓴 인간들.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을 감상하면서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소개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쁜 유리병 그림을 보면서 공자님 말씀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군자는 편협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하기에 그릇이 아니라는데, 세상 만물을 가리지 않고 한 조각 담아내는 유리병을 본다면 공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메이슨 자(Mason Jar)가 청량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공자의 '군자불기'라는 개념을 짚어보면 그 개념이 유리처럼 반짝여 즐거울 것 같았다.

앞으로 이어질 여러 편의 글들은 이렇게 조금은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좀 더 쉽게 머릿속에서 재생시킬 수 있는 스위치 같은 예술 작품들을 골라서, 눈으로 보면서 생각해 보는 놀이이다. 즉 미술에 철학을 올려놓고 싸 먹는 쌈이 될 것이다. 맛있었으면 좋겠지만 맛이 더럽게 없을까 봐 걱정이다.


실은 <미술관에 놀러 간 철학자>라는 제목을 붙이는 일이 부끄러웠다.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철학자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대하면서, 혹은 삶을 살아가면서 즐거운 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끄러움을 다소 덜어내고 이 제목을 붙였다.

정답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정해진 답을 기를 쓰고 찾기보다는 스스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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