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덕과 투명한 유리병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by 이진민
다룰 작품:
Mason Jar/ Summer Light (Rica Bando, 2000), Mason Jar/ Wave Hill (Rica Bando, 2000)

다룰 개념 및 철학자:
공자, 군자불기(君子不器),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영혼 없는 전문가(specialists without spirit), 강철 껍데기(stahlhartes Gehäuse, iron cage)


유리병 예찬


나는 유리병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스며 차, 잼이 들어있던 유리병을 그냥 버리지 못한다. 형형색색의 플라스틱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가볍게 나부대지 않는 묵직함이 좋고, 안에 든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도 그 때문에 변색되지 않는 투명함이 좋다. 산산이 부서질지언정 뒤틀리거나 찌그러지지 않는 강직함이 좋고, 다른 병과 부딪힐 때 챙-하고 은은하게 울리는 청명한 소리도 좋다. 가시를 품은 장미가 매력적인 것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심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그 능력도 매력적이다. 누구나 유리병 앞에서는 다소 차분해진다. 마치 조금은 어려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내용물이 가만가만 줄어들면, 유리병 안에는 그만큼씩 세상이 담겨 간다. 허무하게 비어 가는 병이 아니라 알록달록 세상의 모습이 담긴다는 점이 유리병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


잼과 차가 든 병들 중에는 디자인이 예쁜 유리병이 많다. 다 먹고 깨끗이 씻으면 귀여운 유리컵이 되는 제품도 있고, 얇은 원통형이라 느낌 좋게 손안에 쏙 들어오는 병도 있다. 바닥까지 말끔히 긁어먹고 뜨거운 물에 소독을 끝낸 따뜻한 유리병을 손에 쥐면, 그 순간이 그렇게 좋았다. 여기엔 뭘 담아서 쓰면 좋을까. 그 반짝이는 온기가 손바닥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된 병 안에 나는 집에서 만든 피클을 담고,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따다 말린 허브를 담고, 덩굴 식물들을 꽂아 기르고, 갓 갈아낸 신선한 땅콩버터를 담았다. 작고 귀여운 병에는 색색의 향신료를 채웠다. 아이들은 병 안에 구슬이 떨어지면서 내는 경쾌한 소리에 매혹되어 단풍잎처럼 작은 손으로 몇 번이고 그 안에 구슬을 담았다 비웠다. 새로 가득 찬 유리병들은 자기를 조금씩 비워가면서 그만큼의 빈 공간에 또다시 세상을 담았다.


모 브랜드의 소스 병이 있었다. 스티커를 말끔히 떼어내는 작업이 항상 고통스러웠기에, 물에 넣어두면 포장 띠가 스르르 떨어져 나가는 이 병은 나를 열광케 했다. 누가 이렇게 기특한 접착제를 썼을까. 환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려나. 아니면 나처럼 유리병에 붙은 스티커를 떼다가 그 쓸데없이 지난한 작업에 분노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특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파스타 소스가 듬뿍 담겨 있을 때는 몰랐는데, 깨끗이 씻어놓고 보니 메이슨 자(Mason Jar)가 아닌가.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날, 병에 새겨진 눈금을 손끝으로 만져보면서 나는 뜻하지 않은 보물을 얻은 해적처럼 그렇게 씨익 웃었다. 나로 하여금 특정 브랜드 소스 구매에 일조하게 한 이 메이슨 자가 바로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건 앤틱 제품이고, 걸어 잠그는 형식보다는 고무링이 달린 금속 뚜껑이 하나 더 있어 이중으로 돌려 닫는 쪽을 더 많이 보실 겁니다. (출처: Wanelo.co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리병, 그 안에 담기는 것들


유리병 중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은 병을 꼽자면 코카콜라 병과 메이슨 자가 있다. 코카콜라 병은 부시맨(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멸칭이고, 코이산족이 올바른 명칭이라고 한다)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만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메이슨 자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다. 코카콜라 병은 알다시피 허리께가 잘록하게 들어간 음료수 병이다. 인체의 잘록한 허리선을 구현한 디자인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코카콜라 병의 굴곡진 라인은 사실 카카오 열매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흐르는 듯한 선이 매력적인 이 특유의 디자인이 코카콜라 병의 핵심이라면, 메이슨 자는 생김새가 정직하고 투박하다. 사실 뚜껑이 조금 특이할 뿐, 메이슨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리병이다.


메이슨 자는 원래 북미에서 과일이나 채소의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잼이나 절임을 만들 때 절임 용기(canning jar)로 많이 사용한 유리병이다. 북미에서는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고, 복고적 소품으로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앤틱 샵에 놓인 푸르스름한 메이슨 자들도 보석처럼 예쁘지만, 색색의 피클이나 수프 재료가 담겨 차곡차곡 부엌 선반에 놓인 메이슨 자들을 보고 있자면 재료들의 그 다양한 색감과 형태에 눈이 황홀해진다. 코카콜라 병이 딱히 유리병일 이유는 없지만, 메이슨 자는 유리여야 한다. 투명해서 그 안에 담긴 음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카콜라 병 안에는 코카콜라가 담긴다. 물론 간장이나 참기름을 담아 심심치 않게 시트콤 에피소드를 생산하는 어머님들이 계시지만, 콜라 병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안에 콜라가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임 용기인 메이슨 자 안에는 애초에 다양한 식재료가 담긴다. 내가 3주 전에 담아 놓은 오이 피클과 지난주에 담아 놓은 양파 피클을 구별해야 하고, 저번에 끓여 만든 다양한 잼들 중에서 딸기잼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한다. 즉 코카콜라 병은 디자인이 중요했고, 메이슨 자는 유리라는 특성 자체가 중요했다. 예쁘고 특이한 병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던 코카콜라 병과 달리, 메이슨 자는 그저 유리라는 특성 자체가 팬층을 두텁게 했다. 이 용기들이 태어나 백 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둘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코카콜라 병은 이제 대부분 간편한 페트병과 캔으로 대체되어 시중에서 병 제품을 만나기 어렵지만, 메이슨 자는 그 반대다. 오히려 유리병으로서의 매력 때문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즉, 코카콜라 병은 디자인만 살아있는 셈이고, 메이슨 자는 유리라는 특성이 가장 중요하게 살아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메이슨 자가 차츰 존재감을 뽐내며 다양한 쓰임새를 선보이고 있다. 인테리어 소품으로 감각적인 변신을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는 손잡이가 달린 메이슨 자에 음료를 담아 내놓기도 한다. 내용물이 투명하게 보이는 점 때문에 먹을 것을 담아도 예쁘다. 샐러드를 담으면 색깔의 대비가 두드러져 더 싱싱해 보이고, 디저트를 담으면 크림이나 초콜릿, 캐러멜 소스 등이 층층이 눈 앞에서 반짝거려 더욱 유혹적이다. 내용물이 훤히 보이는 유리병의 장점이다. 이렇게 만든 샐러드는 뚜껑을 꼭 닫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훔치는 도시락이 되고, 병에 곱게 담은 파이나 케이크 등은 그 자체로 예쁜 선물이 되기도 한다.

인테리어 소품, 음료, 샐러드 (차례로 from DHgate.com, ⓒ Nicole Peattie ⓒ LAYLA)

유리병에 담길 수 있는 것들은 비단 먹고 마실거리뿐만은 아니다. 공기도 달달했던 초여름, 내 유학시절 룸메이트의 야외 결혼식에는 테이블마다 손잡이가 달린 날씬한 메이슨 자가 사람 수 대로 놓여 있었다. 하객들이 하나씩 들고 다니며 바에서 자유롭게 칵테일이나 와인을 제공받은 다음, 그 잔을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한 거였다. 나중에 거기에 음료수를 담으면 하트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던 그 날의 달콤한 공기가 떠오를 테고, 술을 담으면 내가 하는 건배에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한 자락쯤은 섞여 들어갈 테니, 이처럼 깜찍한 기념품이 없다. 몇 해 전 여름에는 아이가 고모로부터 작은 유리병을 선물 받기도 했다. 여름휴가를 같이 보냈던 바닷가의 예쁜 조약돌을 담아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 유리병 안에는 파도 소리, 내 아이의 울음소리, 조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어 있다. 그때 돌을 갓 지난 조그만 어린아이였던 내 아이는 파도가 칠수록 발 밑에서 조금씩 꺼져 들어가는 모래 땅이 무서워 엉엉 울었다. 이렇게 유리병 안에 담기는 것들은 음식에서부터 추억까지 무궁무진하다.


리카 반도, <메이슨 자 - 여름빛(2000)>


리카 반도의 <메이슨 자 – 여름빛>이라는 작품에는 여름을 통째로 담고 있는 메이슨 자가 있다. 리카 반도는 '메이슨 자'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을 제작했는데, 병에 새겨진 글자를 부제로 붙이기도 하고 곁들인 소품이나 배경에서 부제를 따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계절감이 주는 아름다움, 그 청량한 색감에 대한 찬사가 부제로 선택된 듯하다. 배경은 은은한 파스텔톤인데 유리병 안의 색깔은 오히려 선명하고 진하다. 한복 치마저고리 일습처럼 고운 옥색과 청량감 있는 쪽빛이 어우러져 매끄러운 질감으로 반짝, 하고 빛나고 있다. 여름의 색, 빛, 향기. 저 멀리로는 열기와 습도 같은 것들도 고루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렇게 유리병 안에는 한 계절도 통째로 담긴다.

Mason Jar/ Summer Light (Rica Bando, 2000)

뒤에서 배경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여름 해는 뜬 지 얼마 안 된 싱싱한 어린 해였을까, 아니면 온 세상을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처럼 사정없이 엿가락처럼 늘이는 폭군 같은 해였을까. 여름밤이었으면 아마 강렬한 햇빛 대신 은은한 달이 병 안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풍류를 즐겼던 옛 선조들의 술잔 안에 오롯이 담겼던 달처럼. 아마도 여름밤에 지었을 것이 분명한, “한 말 술 마시고 동산에 누우니 하늘이 이불”이라는 시선(詩仙) 이백의 권주가를 떠올리며 이 그림의 유리병 안에 담긴 푸른 하늘을 보다가, 분명 이태백도 지겹도록 읽고 암송했을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는 공자님 말씀이다. 하지만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군자는 이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이 푸르게 빛나는 유리병 그림은 내 눈에 군자불기의 내용을 유쾌하게 비트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자님께서 군자는 그릇이 아니어야 한다고 하셨거늘 대체 왜 군자가 이 유리병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까.


군자불기, 군자는 왜 그릇이 아닌가


군자불기는 동양철학의 고전인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구절을 음미해 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하나, 군자는 무엇인가, 둘, 그릇은 무슨 의미인가, 셋, 군자는 왜 그릇이 아니어야 하는가.


하나, 서양철학에서 시민이라든가 부르주아가 하나의 인간형이듯이 군자는 동양철학의 한 인간형이다. 논어 안에서 군자는 아주 은근하고 근사한 사람으로 나온다. 꼬장꼬장하게 방 안에 들어앉아 책만 읽는 먹물이 아니라, 활도 멋있게 쏘고 노래도 부르며 뭇사람들과 즐길 줄 아는 그윽한 인간이다. (仁, 우리 아빠가 이 ‘인’ 자를 쓰시는 외자 이름이었다는 TMI를 전한다)을 체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 논어에서는 주로 좁아터진 소인(小人)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두루 통하여 편벽되지 않으며'(<위정> 편), '조화를 이루되 다름을 인정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자로> 편) 멋진 인물이다. 공자의 무수한 제자들이, 그리고 공자 자신도, 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닦는다. 즉, 동방의 선비라면 누구나 되고 싶은 인물이 군자다.


둘, 그릇은 편협한 도구성의 상징이자,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하는 단어다. 공자님 시대에 그릇은 이미 제각기 정해진 용도가 따로 있어서 술잔이라도 그릇마다 담는 술이 달랐다고 한다. 청동기인 은나라 시대에 벌써 술통도, 술병도, 술잔도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었다는데, 이를테면 맥주는 피쳐에, 소주는 소주잔에, 와인은 글라스에, 막걸리는 대접에 마셔야 하는 것이었다는 친숙하고도 군침도는 얘기다. 즉, 그릇 하나에는 하나의 용도밖에 없었고, 따라서 군자불기에서 기(器), 즉 그릇이라 함은 한 가지 쓰임새밖에 없는 편협한 도구성을 뜻한다. 또한 '그 사람은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하다, ' '그 사람은 그릇이 그것밖에 안 돼' 같은 표현에서 보듯 그릇은 우리나라에선 특히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셋, 군자가 그릇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내용물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찻잔이 아닌 차가, 밥공기가 아닌 밥이 되라는 의미다. 하드웨어가 아닌 콘텐츠가 되라는 것. 또 다른 의미로는 여러 쓰임새가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군자는 한 가지 구실밖에 못하는 도구나 부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막힌 곳 없이 두루두루 통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가 되라는 말이 되겠다. 덕은 바다 같은 것이라 그릇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이므로, 안팎을 구분하는 단단한 경계가 있고 한정된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군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서 <공야장> 편에서 공자가 제자인 자공과 나눈 귀여운 문답이 있다.

자공이 여쭈었다. 저는 어떤 사람인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너는 그릇이니라.
어떤 그릇인지요? 제기 그릇이니라.

너는 그릇이니라, 하는 답에 자공은 아마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너는 아직 군자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하지만 공자는 제기 그릇이라는 말로 슬며시 제자의 마음을 달랜다. 아직 도구성을 벗어나진 못한 존재이긴 하지만 너는 그릇 중에서는 가장 좋은 제기 그릇이란다, 조금 더 정진해 보렴, 하고 마음을 다독여 준 것이다.

암만 봐도 군자일리 없는 나는 어떤 그릇일까. 내가 좋아하는 예쁜 찻잔 정도면 나는 공자 할아버지께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간장 종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생각해보니 간장 종지여도 딱히 나쁠 건 없겠다. 뭔가 작게라도 중요한 쓰임새가 있다는 말이니까.


강철 껍데기 안에 들어앉은 우리


군자불기는 막스 베버가 말한 "영혼 없는 전문가(specialists withour spirit)"와도 맥이 닿는 말이다.

베버는 근대화된 국가는 필연적으로 관료화된다고 했다. 국가의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국가 업무가 세세하게 나뉘는 것은 불가피하다. 즉, 합리적 전문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작은 라면 가게는 사장님이 요리도 하시고 돈도 받으시지만 체인점이 되면 무수한 점장들과 주방 직원, 서빙 알바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국가조직에도 이렇게 각 분야를 담당하는 관료들이 등장하는데, 이 관료들은 오로지 자기 구역만을 담당한다. 그 구역을 넘어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다. 게임을 하다 각층에서 만나는 보스몹처럼,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대신에 내가 맡은 분야에서는 유능해야 한다. 즉 관료의 본질은 전문가이며, 근대적 인간형은 스페셜리스트인 셈이다. 베버는 관료제는 그 합리성과 효율성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추세가 될 것이며, "지하에 매장된 마지막 석탄 한 조각을 캐내어 태울 때까지" 관료제는 인류와 함께 할 것이라는 서늘한 예언을 남긴 바 있다.


이런 관료제 조직 속에서는 판단하는 혜안이라든가 지도하는 정신은 없다. 관료는 본질과 가치에 대한 판단, 방향에 대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 관리의 의무가 미덕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작은 라면 가게 사장님은 신메뉴를 스스로 개발하고 가게의 영업방침을 정하며 사업을 접을 시기도 자신이 판단한다. 하지만 점장은 성실하게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베버는 복잡한 관료제 속에서 그저 부품처럼 일하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혼 없는 전문가"라고 불렀다. 가장 극단적 형태로 우리는 나치 전범 재판에서 "나는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던 아이히만을 본 적이 있다. 꼭 관료나 공무원이 아니라도, 통신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설치 기사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봐요.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통신탑을 몇 개나 더 박아야 하는지, 백 개를 박는지, 천 개를 박는지, 그게 고주파인지 저주파인지 난 관심 없어요. 나는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가 시키면 합니다. 뭐든 해요. 그게 잘못됐습니까?" -김혜진, 소설 <9번의 일> 중에서

이렇게 관료제는 근대국가의 필연적인 특징이자 딜레마다. 큰 덩어리를 부득이하게 조그만 간장종지 천 개쯤으로 나누어 놓은 결과, 우리는 책임을 맡지 않으려는 간장 종지들 사이를 오가며 분노에 찬 한 마리 다람쥐가 되기도 한다. "그건 저희 소관이 아니오니 XXX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답변 속에서 아무 소득 없이 간장종지 사이들을 쳇바퀴 돌듯 하는.

소관을 찾고 말 테다

'강철 우리, 혹은 쇠 우리'라고 번역되는 베버의 "iron cage"라는 용어가 있다. 원어로는 "stahlhartes Gehäuse," 즉 '쇠처럼 단단한 외피, 강철로 된 껍데기' 정도의 개념인데,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한 탈콧 파슨스가 'iron cage'로 번역하면서 인간이 도저히 빠져나올 가망이 없어 보이는 암울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다지 암울하고 싶지 않으니 널리 알려진 '강철 우리' 대신에 새로 뜨고 있는 '강철 껍데기'라는 용어를 쓰려고 하는데, 이 껍데기의 대표적인 예가 관료조직이다.

합리성에는 가치 합리성과 목적 합리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베버는 가치 합리성 없이 목적 합리성으로만 합리성이 굴러가는 걸 무척 경계했다. 즉, 조직이라는 것이 원래는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인데 점점 조직만 굴러가느라 인간이 내팽개쳐지는 상황, 우리가 종종 소관을 찾고 말겠다는 한 마리의 의지 결연한 포로리가 되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이 강철 껍데기 같은 시스템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 삶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과 계산적인 효율성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인간에게는 불편하고, 때론 절망적이고, 결정적으로는 무섭다. 최근의 상황은 여기에 과학적인 숫자들과 첨단 기술을 이용한 통제가 은근히 덧씌워져, 탈콧 파슨스의 번역이 오히려 들어맞는 상황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의 우리는 iron cage에 겹겹의 디지털 잠금번호가 채워진, 그래서 더욱 탈출이 불가능해 보이는 digital iron cage 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군자,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쓰임새와 크기가 정해진 것은 군자가 아니다.

안팎을 구분하는 단단한 경계가 있고 한정된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군자가 아니다.
하지만 리카 반도의 작품 속 메이슨 자를 보면서 나는 군자가 이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투명한 유리로 안팎의 단단한 경계를 다소 흐리며 여름빛과 여름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유리병 그림은, 군자불기라는 공자님 말씀을 유쾌하게 비트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강철 껍데기 속 공무원들을 볼 때의 답답함이, 저 사이다 같은 시원한 푸른빛에 살짝 녹아내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리라는 건 신기한 물건이다.
한 시인은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허무는 것, 그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유리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 말한다. 즉, "안에 있으면서도 밖을 동경하는 마음,"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완전하게는 차단되기 싫은 마음"이 유리를 존재하게 했다는 말이다(김소연, <마음사전>). 사람들은 집의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유리로 창을 내고, 또 그 유리를 가리는 커튼을 친다. 보고 싶은 마음, 보여주고 싶은 마음, 가리고 싶은 마음, 숨고 싶은 마음들이 오묘하게 교차하며 움직이는 곳이 유리창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 안에 빛이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유리다. 빛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을 담을 수 있고 경계가 허물어진다. 하지만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너는 나를 볼 수 있지만 나를 함부로 만질 수는 없다.

유리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는 상대를 소심하게 관찰하기에 제격이다. 평소라면 눈을 두기보다는 도망가기에 바쁠 것들을, 유리 뒤에서는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 동물원에서 우리는 유리벽을 믿고 사자며 뱀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다. 유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있는 뱀의 눈을 그토록 오래 마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은 자고 있는 뱀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뱀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살짝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벌레라도 차창 밖에 붙은 녀석이면 두렵지 않다. 언젠가 나무 밑에 주차해 둔 차로 돌아왔을 때, 차 앞유리를 곰실거리며 열심히 횡단하던 애벌레를 한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색이 참 예쁘구나, 움직이는 모습이 귀엽구나 생각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해가 쏟아져 들어오는 베란다 유리문에 가끔 붙어 배를 내보이는 무당벌레며 각다귀 같은 걸 관찰하기도 한다. 어릴 적에는 학교 숙제로 유리병 안에 개미를 키우면서 개미들이 부지런히 개미굴을 내는 걸 본 적도 있다.


유리는 안에 든 것을 가감 없이 내보이며 더 자세히 살펴보게도 한다. 딸기를 썰어 설탕에 재워 두면, 설탕이 안 녹고 바닥에 계속 가라앉아 있는 건 아닌지, 딸기가 알맞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잘 살필 수 있다. 딱 하루 상온에 두는 동안 아이들은 조바심을 내며 설탕이 빨리 녹도록 몇 번이고 유리병을 뒤집는다. 설탕이 다 녹은 걸 확인하고 그대로 유리병 째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 빨간빛도 달콤하거니와 혹시 딸기청에 곰팡이가 피는 건 아닌지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반찬을 담아두는 밀폐용기를 모두 유리로 쓴다. 환경호르몬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무엇이 들었는지 알기 쉬워 냉장고를 열고 한없이 서 있지 않아도 좋고, 그 안에 든 게 얼마나 부족한지, 또 그 안에서 혹여 상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쉽게 살필 수 있어 더 좋다.


내 안에 담고 있는 것이 썩어가지는 않는지, 그 안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군자의, 혹은 공무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약간의 두려움이 있는 권력이라는 걸 사람들이 소심하게나마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그 힘의 변화를 더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 역시 권력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유리병은 꽉 막힌 밀실에 들어앉아 내 안에 든 것만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빛이 통과하도록 길을 내어 준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을 내주는 대가로 나를 내보이고, 빈 공간에 세상 구석구석을 담아낼 수 있다. 아름다운 세상, 초라한 세상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내가 유리병에서 군자를 떠올린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왕이면 쓰임새도 유연하고 경계는 있으되 배타적이지 않은 이런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Mason Jar/ Wave Hill (Rica Bando, 2000)


참고로 한 병 더.

이 작품은 리카 반도의 메이슨 자 시리즈 중 '웨이브 힐 (Wave Hill)'이라는 부제가 달린 리토그라피다.
병이 있는 곳이 언덕 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그냥 평평해 보이는데 제목이 웨이브 힐이다. 어디가 언덕일까, 생각해 보자니 병 안에 빛이 굴절되면서 살짝 휘어져 생긴 둥근 언덕들이 보인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노력 없이도 이렇게 자기 안에 언덕 하나쯤 쓱 만들어 낸 작은 유리병의 능력이 감탄스럽고 귀엽다.

내 안을 볼록하게 만드는 힘.

내 안을 꾹꾹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두지 않고, 부드럽게 솟아나게 만드는 능력.


여러모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형은 저런 유리병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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