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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r 25. 2020

n번 방 사건과 악의 평범성

인성 교육은 성교육부터

믿거나 말거나, 나는 점잖은 사람이다. (문장으로 쓰고 보니 내가 못 믿겠네.)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지랄'이라는 단어를 내 발성기관을 통해 입 밖으로 내는 데 정확히 24년이 걸렸다. 마음먹고 오랜 친구에게 장난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처음 발음할 때 너무 쑥스러워 발음을 뭉개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지금도 욕은 잘 못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수줍은 나로부터 온갖 욕을 뽑아낸 사건이 있다.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내용의 참혹한 영상물들을 공유해 이윤을 챙겼다는 n번 방 사건. 사건을 접하는 순간 머릿속에 봉인되어 있던 각종 욕이란 욕이 다 튀어나왔다.

이런 시베리아 허스키가 개나리 물고 조팝나무를 돌다 자빠졌는데 수박씨 발라먹던 조카가 그 자태를 18색 크레파스로 그릴 놈들. 으아아아아아아아! 몸 안에서 불이 타는 느낌을 받았다.


기사를 읽는 내내 참담했다. 문장을 읽는 것이 괴로워 눈 뜨기가 벅찬데 그걸 여러 겹의 인증 절차를 거쳐 돈을 내고 본 (그러므로 실수로 들어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이 26만 명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인구가 오천만이라고 했을 때, 약 200명 중 한 명 꼴로 이 생지옥을 보며 낄낄거렸다는 얘기다. 확률적으로는 지인이 그 안에 몇 명 들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현실이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이 세상은 조금 힘들어도 살만한 곳, 서로가 비틀거리면서 그래도 기대어 열심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와 진짜 이런 세상이라면 망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글을 쓰고 3일 뒤인 오늘 아침, 한 지인이 고마운 정보를 주었다. 처음 언론에 보도되었던 26만 명은 중복 인원을 제거하지 않은 숫자고, 가담한 실인원은 현재 6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짜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6만은 그만큼 여전히 차고 넘치도록 많은 숫자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순식간에 300만 명 이상이 서명했고, 우리 시민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빠르게 고민하고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대통령까지 나서서 특별조사팀을 꾸려 운영자뿐 아니라 회원 전원을 조사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우울감을 조금씩 깎아 냈다. 온라인 세상이 이런 망할 범죄를 가능하게 했지만, 나는 또 이렇게 온라인 세상에서 온기를 얻고 위로를 받는다. 특히 전자 발찌 대신에 나쁜 짓을 하면 머리가 조여 오는 전자 긴고아(a.k.a. 손오공 머리띠)를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한 지인의 말에, 깜깜한 절벽 앞에 선 것 같던 마음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법무부 행안부 관계자님들, 이거 어떠세요

나에겐 아직 병아리같이 삐약거리는 아들놈이 둘 있다.

내가 아들만 둘 낳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우리 집에서 나만 혼자 XX(욕 아니고 염색체)로 외롭게 살고 있다.

딸을 갖고 싶었지만, 아들만 둘인 것에 그간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다. 왠지 대충대충 흙바닥에 굴려가며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만, 여자로서의 삶이 그다지 만만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아들들은 '신경을 덜 쓰며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아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신경을 덜 쓰며 키울 수 있는 성별이란 없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기대를 내려놓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거짓말을 할 때라든가 부모를 존중하지 않을 때보다는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상처 주는 모습을 볼 때 아마 나는 가장 크게 실망하고 분노할 것 같다.

이 놈들을 어떻게 똑바로 키워야 하나, 저 사진 속 손오공과 같은 자세로 머리를 싸매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손 잡고 함께 지뢰밭 건너기


번번이 얘기하기도 입 아픈 사실이지만, 여자 입장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이 빌어먹을 삼종 세트를 하나도 만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나만 해도 돌아보기 싫은 경험들이 꽃처럼 만발해 있다. 이게 뭔지도 모르고 지나온 것들, 뭔지 알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일들, 나름 대처를 한다고 했고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평온한 일상 곳곳 불시에 들이닥쳐 내 마음을 종이처럼 구겨대는 기억들.
아이를 둘 낳고 마흔을 넘은 성인 여성에게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닥칠 때마다 늘 당황스럽다. 삶이 지뢰밭이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사리판단이 아직 야물지 못한 아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일을 당했을지, 그 기억이 평생 얼마나 그들을 괴롭힐 것인지 생각하면 눈이 질끈 감긴다.
 
아직 다섯 살, 세 살인 내 아이들의 세상은 이런 어둠과는 관계가 없을 듯이 말랑말랑해 보이지만, 살펴보면 그들 곁에도 늘 지뢰가 있다. 아이들이 즐겨 읽는 이야기, 특히 전래 동화나 세계 명작 동화 속에는 강한 성차별과 고정관념은 물론이고 성추행과 성폭력이 난무한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는 강간의 제왕이고, 세상의 많은 왕자 놈들은 여자들이 자고 있으면 마음대로 입을 들이밀고 키스를 한다. 보통 '트루 러브'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지만 아니 처음 보는 여자가 자고 있는데, 처 자느라 말도 한마디 못 나눠 봤을 텐데 무슨 망할 놈의 트루 러브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이쪽 방면의 유명한 빌런은 나무꾼으로, <선녀와 나무꾼>은 목욕하는 데 훔쳐본 것도 모자라 옷을 감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한 여성을 감금한 사례를 다루고 있다.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면 선녀 측의 동의가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 한다면 동의보감으로 처맞을 소리다. 선녀는 살던 곳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고, 늘 옷을 내어주기를 간청했다. 비슷한 또래를 키우고 있는 후배 H는 늘 "~를 해 오는 자에게 내 딸을 주마."하고 말하는 동화 속 왕들이 너무나 싫었단다. 이런 망할 놈의 왕들.    

뭐라고요 아빠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처럼 여성이 다른 여성의 핍박 속에도 말 잘 듣고 꾹 참다가 수동적으로 남성에게 구원받는 스토리도 문제지만, 이렇게 동화 안에 버젓이 성추행과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 품에 안겨 어린 시절에 읽은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 따뜻한 시간과 매혹적인 스토리 안에 나를 망가뜨릴 지뢰가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판의식이 없는 스펀지 같은 아이들에게는 기존의 가치관과 잘못된 행동들이 무방비 상태로 흡수될 수 있는 무서운 순간이다. 신화나 전래동화들이 만들어질 당시의 성문화나 젠더 감수성은 우리 시대와는 분명 달랐겠지만, 그것이 전통이나 문화라는 탈을 쓰고 들어올 때를 우리는 특히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여성학자 바바라 워커가 쓴 <흑설공주>처럼 다시 비틀어서 쓴 동화를 찾아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올바름이라는 가치를 관통시키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는 원작의 맛을 훼손시켜 그저 밍밍한 교훈 덩어리로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스토리와 그 안의 이름들은 세상의 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꼭 필요한 알맹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아이들이 백설공주며 신데렐라, 선녀와 나무꾼과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국어책에서 배웠던, 소위 말하는 스키마(schema)라고 본다. 이런 놀부 같은 놈, 이라고 했을 때 놀부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는 청순한 얼굴로 눈을 깜빡여서는 곤란하다.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

제대로 읽는 대신, 지뢰를 제대로 터뜨리면 된다.

무방비 상태로 모르고 터뜨리면 파편이 내 안에 들어와 박히지만, 위험성을 알려주고 피하게 한 뒤 터뜨리면 아이들 뇌에 그 파편이 잘못 박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즉, 답답한 유교걸들이 추앙받고 성범죄자들이 은근슬쩍 등장하는 전래동화를 그냥 피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읽으면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즐기고, 대신 제대로 비판할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코 자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마음대로 뽀뽀해도 될까?" "목욕할 때 누가 나를 훔쳐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런데 아빠인 왕이 저런 말을 하면 공주 입장에서는 어떨 것 같아?"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기회로 삼자는 말이다. 동화 읽는 시간을 무비판적으로 가치관을 흡수하는 시간으로 만들지 말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만들면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좋은 성교육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실 각 잡고 남녀 인체도를 보면서 어색하게 말을 더듬는 것보다, 이런 방식이 더 자연스럽고 마음에도 오래 남는 성교육이 될 것 같다.   


엄마도 무수한 지뢰밭을 건너 여기에 와 있지만, 아이들 앞의 지뢰밭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이 지뢰밭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 이게 잘못 터지면 나만 다치는 게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가 함께 다칠 우려가 있다.
"이런 걸 같이 생각해 보라고 이런 이야기가 있는 거야."   

두 아이의 엄마인 H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어여쁜 아이들에게 그런 동화들을 읽어 줄 거라고 했다. 엄마 아빠들이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깨닫고 힘을 내면, 아마 세상은 조금씩 바뀔 것이다.


인성 교육은 성교육에서부터,

성교육이 가장 중요한 정치 교육이다


인성 교육과 성교육은 얼핏 보기에 밀접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최근  B 선배의 소개로 독일 교육을 다룬 한 TV 프로그램을 보던 중에, 성교육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 교육의 시작은 성교육이어야 하고, 어찌 보면 그것이 교육의 바른 순서가 될 수 있겠다는 깨달음.

달리 말하면, 성교육이 인성 교육의 기본이 된다는 말이다.


프로그램은 독일어와 독일의 사회 문화를 전공하신 김누리 교수님의 강연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었는데, 강의 중간에 '한국 교육에는 없고 독일 교육에는 있는 것 세 가지'가 등장했다.

독일 살지만 모름

그런 게 있어요?라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자 '성교육, 정치 교육, 생태 교육'이라는 답변이 이어졌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비결이자,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참교육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독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말씀.

이유를 들어 보니 "성교육은 나와의 관계, 정치 교육은 타자와의 관계, 생태 교육은 자연과의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동심원적으로 관계를 넓혀가는 프로세스에서 성교육은 나의 자아를 단단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이 되는 교육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 교육이 된다는 것이다.

아니 성교육이 자아와 정치와 대체 무슨 관계냐고?

방송에서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이유로 들고 있었다. 자신의 본능을 적절히 컨트롤하고 죄책감 대신 책임감으로 충만한 자아, 이런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훌륭한 시민이 된다.

또한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타인과의 합의, 타인의 동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성교육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패턴은 자신의 '자유'를 기반으로 '합의와 설득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자유 민주주의에서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전형이다. 성교육이 좋은 정치 교육이 된다는 건 이런 의미다. 합의와 동의는 성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 된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성과 관련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 단단한 자아를 만드는 일이며, 좋은 시민이 되는 밑거름이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은 음란한 것,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가치인 생명과 인권과 관련된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갖는 것으로 성 문제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은 없고,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유명한 여성학적 명제를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성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 문제다.


성교육이 이렇게 먼저 단단한 자아를 만들어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교육이라면, n번 방에서 피해 여성에게 '노예'라는 글자를 쓰게 했다거나 협박을 통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행위들을 강요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는 점은 이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회원들에게 동조를 구하고 비슷한 영상을 올릴 것을 강요한 일 역시 뒤틀린 방식으로 그 집단 내부의 동질화를 꾀한, 굉장히 악마적인 관계 맺음이다. n번 방에서 자행된 일들은 이것이 일반적인 성범죄 수준에서 벗어나 상대를 노예로 만들고 끊임없는 협박으로 상대의 영혼을 파괴했다는 점, 돈으로 인권을 사고팔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에 특히 충격적이다. 돈을 냈으니 그만큼 가학적인 행위를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는 관계가 아닌, 숨어서 내가 드러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 놓고 잔인해졌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20대 중반까지 보냈던 나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임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리대를 어떻게 안 보이게 휴대해야 하는지 같은 걸 배우기보다는 실제 일상에서 나에게 어떤 위협이 있을 수 있는지, 희롱하는 놈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면 나의 지난 세월은 덜 억울했을 것 같다. n번 방 가해자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들 역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한다. 김누리 교수님은 한국 사회는 "수퍼 에고(superego,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 윤리)가 리비도(libido, 본능적 충동, 주로 성충동)를 악마화 하는 사회, 그리하여 그 사이에 낀 에고(ego, 자아)가 고통받는 사회"라고 했다. 성이라는 것이 괜히 부정적인 것, 감추어야 할 것,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되다 보니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성 본능이 어쩔 수 없이 눌리고 왜곡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억압이 눈알조차 꾹 눌렀는지, 여성을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로 보지 못하고 정복의 대상이며 물질성을 띤 객체, 돈벌이 수단, 혹은 그저 애 낳는 도구로 인식하는 눈동자들이 많다. 26만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한참 부족한 우리나라의 성교육과 부정적인 성담론에 발을 담그고 자란, 슬프도록 어이없는 숫자다.   


성교육이 부족하면 성범죄 처벌이라도 강력해야 하는데, 내가 제대로 교육을 못 시켜서 미안하다는 뜻인지 우리나라는 유달리 성범죄에 관대하다. 판결에서 마치 내 새끼가 자기가 먹기 싫은 콜리플라워를 엄마에게 퍼줄 때 보이는 선심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성범죄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특히 아이들이 관련된 범죄가 터질 때마다 강하게 처벌한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가 강한지 알고 싶다. 중학생인 친딸을 강간하고 그렇게 낳은 아기마저 유기한 친부에 대해 1심에서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고작 10년이었고, 법원에서는 거기에 5년을 더 얹어 15년을 선고했다. 성범죄에는 유난히 기소유예 판결이 많기도 하다. 범죄의 혐의는 인정하지만 재판에는 넘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네가 잘못한 건 맞는데 이번엔 봐준다는 말이다. 작년 한 해 약 3만여 건의 성범죄가 있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불기소 처분됐고 그중 기소유예가 32.5%였다고 한다. 그 많은 피해자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십 년쯤 살아 본 미국에서는 특히 아이들을 건드린 놈들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었다. 성범죄자가 출소되면 주민들에게 고지가 되기 때문에 마을에 피켓과 플래카드(물론 따뜻한 환영의 의미일 리는 없다)가 걸리는 모습도 TV에서 보곤 했다. 내가 독일의 슈뢰더 전 총리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성범죄자들은 평생토록 감금해야 한다는, 우리나라 사법부가 들으면 떡 먹다 놀랄 만한 강경 발언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로 여러 논쟁은 있지만, 독일도 미국도 기본적으로 성범죄자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을 건드린 놈들에게 일단 자비가 없었으면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을 강하게 하는 것보단 역시 어릴 적부터 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건강한 자아들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 잃고 외양간에 전기 울타리 설치하지 말고 (아, 소가 죽으려나) 애초에 눈망울이 맑은 도덕적인 소로 (음?) 길러내야 하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 눈망울은 원래 맑답니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 선생님께서 아이의 독일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라고 추천해 주신 <Das Kindergarten Wörterbuch(유치원생을 위한 단어 사전)> 첫 챕터에 당당히 들어있던 "Ein neuer Mensch(새로운 인간)"라는 파트가 생각난다. 아기에 관한 파트였는데, 유치원생을 위한 단어 리스트에 정액을 위시하여 우리가 흔히 발음하기 민망해하는 각종 인체 부위와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고루 들어있었을뿐더러 'Sex haben'이라는 동사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있었던 것이다. 

음? 초등학생도 아니고 유치원생인데?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 사회든 이렇게 핵심을 담백하게 관통하는 성교육이 무척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열심히 공부한 부끄러운 흔적

 
N번 방 사건에서 보는 악의 평범성


n번 방 사건을 접하고 함께 분노하던 J가,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꺼냈다. 이 방에 관련된 사람들이 최소 몇십만 명이라는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악의 평범성이 이런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라고 본다. 이 사건은 악의 평범성을 논하기에 꽤 적절해 보인다.

악의 평범성이란,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 뒤 썼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악의 내용이 평범하다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범한 사람이 평범하다는 말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특급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악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법정에 선 그는 창백한 모습으로 성실하게 자기변호에 열중하는, 평범하고 다소 왜소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정신과 의사들도 성직자들도 입을 모아 그는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한 의사는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

하지만 악의 평범성을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이웃이 극악무도한 범행을 저지를  있다', 단순한 -외적 불일치를 뜻하는 말로만 한정짓는 것은  내용을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의 핵심은 '악을 범하는 자가 사유하지 않음' 있다.
아렌트의 말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 성실하고 소박해 보이는 평범한 인물이 악을 저지르는가? 그것은  사람이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생각하지 않은 것이 죄이며, 생각하지 않음이 악의 평범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생각 없음, 사유하지 않음이 곧 무능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 없음과 무능력은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나 성찰 없이도 지식의 습득이라든가 사태 파악, 문제 해결, 논리적 판단, 행동 지침의 도출 같은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치 영혼 없는 공무원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서도 위에서 시킨 일을 맡아 일처리를 척척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이번에 신상이 공개된 n번 방의 그도 평범해 보였고 오히려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봉사활동을 했다고 하고, 학보사에서 편집장을 맡을 만큼 유능했다고도 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았듯 내가 그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유추하건대 그와 그 방 안의 사람들은 사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세계에서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낄낄거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렌트가 말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재판 과정에서 아렌트가 포착했던 점은, 그가 하는 말을 판사들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치의 선전 문구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용어가 그의 언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안락사'라는 단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치적인 언어로 이해하고 사용했다. 그에게 안락사란 아리아 인종의 완전성에 흠이 되는 자들, 나치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즉 지체장애인이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죽여 없애는 일을 의미했다. '최종적인 해결책'이라는 말 역시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특수 용어였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고, 사고의 변화는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따라서 일반인들과 다른 언어는 소통과 사유를 막고, 그저 방향 잃은 행위를 지속시킨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언어는 나치 특유의 의미가 담긴 언어들에 잠식당해 사유할 힘을 잃었고, 그는 판단력이 마비된 채 자신이 만든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며 그 틀 안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법정에 섰던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불렀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디에 그런 '성스러운'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재차 받고서도 그는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며 당시에 그것을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라는, 마치 "반 애들이 그냥 다 쟤를 왕따라고 부르길래 자세하게 생각은 안 했지만 나도 걔를 왕따라고 불렀어요"라는 생각 없는 초딩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포한 슬로건에 스스로 말려 들어 사유를 멈췄고, 현실 인식이 흐려졌던 것이다.  

n번 방에 모인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보면 잘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사용했다. 여성의 특정 부위나 성적 행위를 지칭하는 속어를 사용하고 그들만의 은어를 사용했으며, 특정한 룰과 행동 양식을 요구받았다. 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기도 동영상을 올리거나 동조하지 않으면 퇴장을 시켰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그 안에서 서로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모두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있으면 나는 당연히 평범해진다.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에, 내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자기의 도덕 감정이 무뎌지고, 악이 반복되어 딱딱한 굳은살이 생겼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사유는 멈춘다. 사유가 멈춘 곳에서는 아렌트가 말했듯 악이 평범한 일상이 된다. 이들을 추적해 그들의 범죄 사실을 알려낸 '추적단 불꽃' 회원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 안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니 세상에 야동을 보는 게 대체 뭐가 문제냐, 그런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앞서 한 번 자빠졌던 내 마음속 시베리안 허스키가 다시 소환되었다.)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이 사유 없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믿으며 죄책감 대신 사명감을 가졌던 것처럼, 이들은 충격적인 성범죄를 그저 야동이라고 믿으며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일갈했던 말, 생각하지 않은 죄.
그대로 고이 접어 그들에게 던지고 싶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나도 모르게 죄를 짓고 있을 수 있다.


한편, 생각하지 않는 것도 죄지만 침묵하는 것도 죄다.

악의 평범성을 부추기는 것은 다수의 침묵이다.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악의 평범성의 소극적 공범 내지는 방조범이 된다.

그 충격적인 행위들이 죄라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그것은 범죄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소통과 사유가 막혀있는 사람들의 귓구멍에 대고 세반고리관이 떨려서 어지러울 정도로 고함을 질러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잘못된 일이 많고 화낼 일이 넘치는 데도 세상이 조용하면, 사람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 봐, 역시 문제 될 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그들만의 세계를 한층 견고히 할지도 모른다.

 

지랄을 발음하기 수줍어하던 나는, 다소곳하게 한 글자를 더 얹어서 개지랄이라는 말에 힘을 실을 줄 아는 엄마가 되었다.

사실 엄마란 게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살 세상을 생각하면 엄마들의 피는 하루에도 몇 번씩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가를 반복한다.
세상에는 개지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나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 참고

악의 평범성과 관련해 꼭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중요한 반론이다.

2001년 베티나 스탕네트(Bettina Stangneth)라는 독일 철학자가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틀어 놓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판단에 대한 반론을 담은 책이다. 스탕네트는 아렌트가 접할 수 없었던 자료들에 근거해, 아이히만이 생각 없는 부품처럼 행동하면서 악의 평범성을 대변했던 인물이 아니라 나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던 확신범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이히만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법정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던 것이고, 비록 연기가 실패해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렌트는 그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아이히만 개인과 관련된 사실 관계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빛을 잃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렌트의 이야기는 전체주의나 독채 체제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응하고 동참하는 과정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으로, 그 날카로움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악이 아니라 비범한 악이었을 수 있으나, 불법에 대한 사유를 놓아버린 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담해 유럽 전역에서 생지옥을 만들었다. n번 방의 그도 평범한 악인지 비범한 악인지 아직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n번 방에 모인 26만이 만든 생지옥은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테제와 겹쳐 놓고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히만에 대한 묘사를 빼놓고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과 내가 본 n번 방의 그들을 비슷한 덩어리로 두고 글을 썼다. 스탕네트와 같은 반론이 있고 나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면, 환영하는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개지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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