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Apr 05. 2020

I의 사회, we의 사회 (1)

we의 문화, 약인가 독인가

한국 사람들은 국난 극복이 취미라고 한다.
우리는 원래 동굴에서 백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으며 자가격리를 시행한 웅녀의 후손이라 이 시련이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도 한다.

처음 이 말들을 들었을 때, 너무 웃긴데 마음이 찡했다. 우리는 힘들 때 늘 이렇게 서로 북돋워가며 힘을 모았다.  

IMF 때는 장롱에 고이 들어있던 온갖 사연 있는 금붙이들이 덤덤하게 튀어나왔고, 태안 앞바다가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였을 때는 해당 지역 교통이 정체될 만큼의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어 소매를 걷어붙이고 기름을 닦아냈다.

요즘도 취미 생활에 여념이 없는 한국 사람들. 해학으로 웃어가며, 참고 버티는 데 능한 사람들이다.


국난 극복은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우리(we)라는 개념으로 모이는 것이다.
기자인 M이 우리나라에만 유독 사재기가 없는 이유를 어떻게 보냐고 묻기에, 우리의 독특한 we의 문화가 투명성과 자율성을 기조로 했던 정책과 만나 좋은 시너지를 낸 것 같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와의 상관관계가 비밀의 열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높은 수준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서구 사회가 오히려 위기시 빠른 대응에는 취약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we의 문화가 있는 한국은 위기시에 개인을 뒤로 물리는 경향이 있다.


기사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링크 참조. (저는 끄트머리에 수줍게 등장합니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7/2020032703608.html

기사를 읽은 남편의 반응

하지만 대답에도 밝혔듯 we의 문화도 민주적인 시스템을 만나야 긍정적 힘을 발휘한다. 개인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개인을 뒤로 물려야 건강하고 빠르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정도를 걷겠다고 선언했고, 시민들은 스스로 자제하고 권장된 지침을 잘 따르는 방향으로 힘을 보탰다.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일본 역시 강한 we의 문화를 가져 개인을 뒤로 물리는 경향이 있지만,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영광 앞에 개인들을 조용히 희생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우리처럼 개인들 스스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감수하며 함께 뜻을 모으는 방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침묵 속에서 개인들을 말없이 뒤로 물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사재기가 없는 이유로 we의 문화나 자유와의 상관관계 같은, 한 껍질 아래 있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들먹였지만 사실 나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랜 시간에 걸쳐 내면화된 위기 대응력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엄청난 배송 시스템이 1등 공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 잡는 이 총알배송 시스템은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냉동실에 한 달 이상 섭취 가능한 마법의 검은 봉다리들을 쟁여 두는 어머님들이 계셔서 사재기가 불필요했다는 생활밀착형 분석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바다. 역시 엄마 말을 잘 들으면 냉동실에서도 떡이 나온다.

       

그런데 we의 문화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들먹이고 나서 새삼스레 요즘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과연 we의 사회인가, 아니면 I의 사회인가.


우리 엄마와 우리 남편, 알고 보면 이상하다 (feat. 유노싸이?)

 

먼저 we의 문화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은 'we' 문화를 새삼 낯설게 바라볼 수 있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둘 다 미국에 있던 때의 얘기다. 아무래도 한 집에 오래 살면 그 집의 희한한 구조가 집주인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탓인듯하다. 한국이라는 고향집에 꽤 오래 살았던 나에게는, 그렇게 캐리어를 싸들고 태평양을 건너서야 우리 집의 신기한 부분이 크게 와 닿았다.  


첫 번째는 미국 지도교수님과의 대화.


"그럼 한국사람들은 외동이어도 '우리 엄마'고 형제가 많아도 '우리 엄마'야?"

"네."

"어, 그러고 보니 우리는 형제가 많아도 꼭 'my mom'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 참 재미있네."


미국 지도교수님께서 내 글을 검토해 주시다 가장 신기해하셨던 부분은 한국인들이 습관적으로 '우리'라는 관형어를 붙인다는 점이었다. 공(公)과 사(私)에 관한 글을 쓰다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은 'we' 문화에 대한 예시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나라.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그걸 받아서 한국에서는 외동이어도 '우리 엄마'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다섯 형제 중 하나여도 '나의 엄마(my mom)'라고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콕 찍어주신 것이다. 사실 별생각 없이 쓴 부분이었는데, 선생님이 너무 신기해하셔서 생각해보니 새삼 신기했다. 나와 우리. 우리는 왜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는 표현 안에 우리를 넣어두고 살아온 걸까.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여친, 우리 남친, 우리 아내, 우리 남편.

생각해 보면 카드나 편지에 “사랑하는 울 자기,”라고 첫머리를 쓰는 건 카사노바나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표현이고, 나아가 “우리 남편은요~”라는 말 습관에 이르면 어이쿠 이건 일부일처제를 부정하는, 고해성사 받는 신부님 뒷목 잡으실 표현이 아니던가.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소엔 이런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는 우리 안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멋진 대답이다

다음으로 '나와 우리'에 관련된 인식이 정말 다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은 내가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학교에서 무차별적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이 참혹한 사건의 범인은 조승희라는 인물로, 한국 국적에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온 미국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고 연일 그의 사진이 뉴스를 도배했으며, 총기 소지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다시 들끓었다.

사건 직후 한인 사회에서는 보복성 폭력이나 증오범죄에 연관될 수 있으니 한인들은 바깥출입을 자제해야 한다며 두려워했다. 무엇보다도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사람이 한국인임을 크게 한탄하며 부끄럽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나라 망신이 아니냐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크게 받아들이긴 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슬픔이나 충격과는 별개로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나와 같은 해에 같은 학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언니는 심지어 이름도 조승희였다. 아우, 우리 언니 어쩌지.

  
하지만 함께 뉴스를 보던 외국 친구들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다. 도대체 걔랑 너랑 무슨 상관이냐는 거였다. 그냥 위로차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저 범죄자가 너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쟤는 그냥 한 명의 sick person일 뿐이야."

"네가 왜 우울해?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서 무슨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그럴 거야? 으하하. 그러면 넌 평생 우울하다가 죽을 걸!"

그들의 태도는 심플하고도 깔끔했다. 걔는 걔, 너는 너.
그들은 나의 처진 어깨를 툭툭 쳐주며 그런 개떡 같은 생각은 처음 본다는 눈동자로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물론 저렇게 생긴 친구는 없었다

리버럴한 미국 동부, 그 안에서도 대학원생들이라는 버블 속에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시원시원하고 홀가분한 구분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긴 그러네. 나는 왜 조승희라는 범인과 나를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잇고 있었던 거지?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유명 외국인의 사돈의 팔촌이 한국인이면 그게 이슈가 되는 나라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에 유달리 흐뭇해하기도 한다. 박항서 감독님 덕분에 한때 베트남이라는 나라 자체가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고, 최근에는 봉준호 감독님 덕분에 상당수가 소위 국뽕에 취해 기뻐했다.  
"유노싸이(You know PSY)?" "유노BTS?"(유노윤호는 이걸 염두에 두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가.)

상대 외국인이 안다고 예스를 외쳐주면, 자기가 PSY고 BTS인 것 같은 느낌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김연아가, BTS가, 손흥민이, 봉준호가, 자랑스러울 수 있다. 같은 한국인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이 마음은 사랑스럽다. 나도 그들이 이루어낸 성취 앞에 언제라도 한 마리 토실토실한 물개가 되어 아낌없는 박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을 지나치게 자기 동일시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저 유노싸이라는 질문이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조승희와 내가 동일인이 아니듯, 나는 김연아도 봉준호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모두 다른 개인들일뿐이다.  


사실 나에게는 국뽕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묘한 불쾌감이 있었다. 굉장히 쓸데없이 민족주의적인 단어라고 생각해 왔다. 사실 단어 자체가 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냉소적인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그런데 최근 이 단어가 단순히 민족주의적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이라는 지적을 접하고, 막연히 오묘했던 불쾌감에 뚜렷한 형체가 생기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강유정 교수님은 "국뽕이라는 것은 제국주의적 발상이며, 국뽕이라는 말 안에는 경쟁이 심한 우리의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이 말을 풀자면 이렇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의 국가에서 누군가가 인기를 모으거나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으면 우리는 '희한한 현상이다, 재미있다, 잘했다' 정도에서 멈춘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님의 오스카 수상처럼 상대적으로 우리가 열위에 있다고 느껴지는 곳, 우리가 동경하던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 이걸 대단한 업적으로 느끼고 '취한다'고까지 표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단단하고 높아서 더 뚫어내기 어려운 벽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양궁에서 카메라 렌즈까지 뚫어가며 그토록 세계 1위를 고수해 왔는데, 이를 두고 국뽕에 취한다는 표현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필리핀 유재석이라는 라이언 방 역시 엄청나게 고군분투했을 테고 그 노력은 충분히 조명받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대체로 그의 성취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프리카 한 나라의 민속춤을 파고들어 세계적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가 과연 비보이 세계대회 우승자만큼의 이슈가 되고 팬이 생길지, 조금 회의적이다.
    

살다 보면 국뽕에라도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다. 외국살이가 길어지면 특히 그렇기도 하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구호 아래 모였던 2002년 월드컵이 우리에게 주었던 기쁨과 환희란. 개인적으로도 너무 즐거웠던 마법 같은 시간이어서, 이따금 반복 재생하며 에너지를 얻고 싶은 빛나는 기억이다. 하지만 술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고 마셔야 하듯이, 취하고 싶으면 적어도 국뽕이라는 단어 안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있는지는 알고 취해야 할 것 같다. 더 멋진 개인들, 너무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지만, 나는 국뽕에 취하기보다는 그저 존경과 찬사의 마음을 아낌없이 보내고 싶다.
   

I와 We의 희한한 동거
 

내가 글의 서두에 우리는 과연 we의 사회인가, 아니면 I의 사회인가, 하는 질문을 두고 고민 중이라고 밝혔던 것은 우리 사회가 굉장히 'we'라는 덩어리로 뭉쳐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파편화되어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가 본 한국 사회의 특징 네 가지는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라고 한다. 이 가운데 극단적 개인주의라는 진단이 특별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결코 개인을 중심에 두는 사회는 아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독립적인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 가치를 두는 입장을 말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나 주체가 사회나 인종이나 계급이나 성별이 아니라, 각 개인이라는 얘기다. 이게 특별히 나쁠 리가 없다. 내 판단이 늘 나의 성별이나, 인종이나, 계급이나, 내가 속한 사회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원문의 표현, 적어도 영문의 해당 표현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도서관도 모두 문을 닫아 건 현재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 진단의 출처는 <Heroes: Mass Murder and Suicide>라는 책이고 국내 번역서 제목은 <죽음의 스펙터클>이라는데, 후에 기회가 되면 꼭 확인해 보고 싶다.


그런데 원문 표현에 대한 궁금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 '극단적 개인주의'라는 진단이 우리에게는 아무 이질감 없이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마 베라르디는 심각하게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 극단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극단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극단적 개인주의'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거의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개인을 앞세우는 행동을 이기적인 것,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온 것이다. 이것은 그릇된 we의 문화가 강하게 작용한 탓이다. 영어 사전에서 individualist, individualism을 찾아보면 독립성, 개성, 자유로움 등이 부각되는 단어로, 대체로 긍정적이다. 가장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건 odd나 strange, 즉 남과 잘 어울리지 않고 좀 별난 정도에서 그친다. 옥스퍼드 동의어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selfish라는 동의어는 없고, 심지어 빈번히 연결되어 쓰이는 단어들 목록에서도 selfish는커녕 egoistic의 코빼기도 안 보인다. 그래서 원 뜻으로는 아무리 '극단적인' 개인주의라 해도 이게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방향은 아니다. 그저 남들과 동떨어지게 너무 마이 웨이거나, 독단적인 모습인 것이다.  


odd나 strange, 즉 마이 웨이거나 독단적인 것은 한 인간의 성격의 문제다.
하지만 selfish, 즉 이기적인 것은 한 인간의 도덕의 문제다.
성격 차원의 문제가 도덕 차원으로 바뀌어 비난의 소지를 주고 있는 것,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거대한 we가 '개인'이라는 단어에 불어넣은 입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개인주의라는 단어에 잘못 덧씌워진 오명을 푸는 것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 I와 we가 건강히 공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현재 '개인주의'를 찾아보면 '표준국어대사전 최신판에서 삭제된 단어입니다'라고 뜨는 설명이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를 바란다. 바로잡으려면 삭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개인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아온 시간이 길어서일까, 우리 사회의 개인들은 많이들 힘겨워 보인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기대에 부응하느라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베라르디가 지적한 대로 우리 사회의 개인들은 굉장히 이기적으로 파편화된 특성도 가지고 있는데, we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갈라져 있기도 하다는 것은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we의 문화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동일하게 행동해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서운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서로 돕고 베푸는 we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어째서 동시에 이렇게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것일까.


나는 건강하지 못한 개인(I)이 강한 우리(we)를 이루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거칠게 말하면, 그동안 공동체를 앞에 두고 개인을 너무 뒤로 물렸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공동체가 우선시되는 것이 도덕적으로 권장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복하고 즐겁게 단단해질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공동체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모두 함께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적성-취미-능력-관심사가 맞지 않으면 그 개인은 능력 없는 놈이 되거나 나쁜 놈이 되기 쉽다. 일례로 모두가 공동체의 '인적 자원'이 되어야 하는 사회, 학벌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은 그 이유 하나로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기 쉽고, 사람들은 '꼴찌는 곧 문제아'라는 별 거지 같은 도식을 만들어 낸다. 다수가 특정한 가치를 바라보더라도 개인의 특성은 존중되어야 하는데, 삐죽 불거진 싹들을 반듯하게 잘라내려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병들고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이 불행한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거대한 'we'의 압력에 밀려 서로 다투게 된다. 사회가 '이게 성공이야'라고 내놓는 가치를 모두 함께 쫓느라 힘이 드는 것이다. 그 안에서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나만 잘 살면 되기에 끊임없이 밟고 올라서려 하고, 나만 아니면 되니까 눈치 보며 침묵하는 경우도 많다. 이익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작은 we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건강한 개인이 모여 이루는 연대가 아니다. 그저 파편화된 개인들의 밥그릇 토너먼트에서 복식조로 출전한 것뿐이다. we와 I가 희한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이 메커니즘 앞에서 특수학교를 위해 무릎 꿇는 엄마들이 생기고, 단지 내 놀이터를 이용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생긴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는 모든 개인들의 이익과 가치가 한 방향으로 수렴하기 쉽다.
바이러스의 위기 앞에서는 사람들이 건강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 앞으로 모이게 된다.

그 안에서 we의 문화는 아름답고 가슴 벅차게 작용한다.


우리의 we의 문화는 이렇게 위기시에는 빛을 발하지만, 평상시에는 독으로 작용할 소지도 다분하다.
건강하고 즐거운 마이 웨이(my way)의 개인들이 충분히 기를 펴고 행복할 수 있어야 유어 웨이(your way)의 행복도 존중하게 된다. 사회가 모두 한 곳을 보고 달려가지 않아야 개인들은 평상시에도 연대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I와 we가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다.  

우리 집 둘째 녀석의 마이 웨이

끈끈하게 이어진 we의 사회가 동시에 극단적으로 파편화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모순이 아니다.

모순은 아니지만 불행인 것이다.

  


(아직 할 말이 많아서 다음 편에 계속)

https://brunch.co.kr/@jinmin111/87#comment


매거진의 이전글 n번 방 사건과 악의 평범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