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비행운과 물결무늬
7-8년쯤 전이다. 김애란의 소설이 여기저기에서 호평과 함께 회자되는 것을 보고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그래서 한국에 들렀을 때 살 물건 리스트 첫 부분에 김애란 소설책, 하고 적어두었다. 나는 아직도 책은 직접 통통한 책을 손으로 만져가며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하는 인간이다. 잉크 냄새가 옅게 밴 그 싱싱한 종이 냄새와 새 책의 맨들맨들한 질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북이란 e-book보다는 일단 휴전선 이북을 뜻한다.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이 손에 들어왔다. 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검지 손가락으로 까끌한 사포 겉면을 만지듯, 혹은 곰팡이가 피어 축축해진 벽지를 손바닥으로 스윽 훑듯 우리가 사는 2010년대의 아픈 구석들을 만져볼 수 있었다. 특히 여성 화자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띄었다. 고독하게 홀로 누운 방 안에서, 재개발 지역에 위치한 신혼의 낡은 빌라 안에서, 공항 화장실에서, 생전 처음 가 본 네일숍에서, 누군가의 꿈속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한숨 쉬며 생생히 살아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라는 문제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이 한없이 아프기도 했다.
귀한 존재들이 비명을 지르며 애써 자라서 '겨우' 누군가가 되는 사회.
세상 그 누구든 열심히 자라서 '겨우'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김애란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 안에서는 그렇게 '겨우'들이 겨우 숨 쉬고 있었다.
문제의 독백을 내뱉은 수인은 아르바이트로 대학을 겨우 졸업하고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에 시달리다 다단계에 발을 들였던 인물이다. 그것도 오랜만에 나타난 전 남자 친구에게 속아서. 절박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인은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할 때 만났던 발랄하고 명랑한 제자를 그곳에 대신 밀어 넣고 겨우 합숙소를 빠져나온다. 자신을 잘 따르던 그 해맑던 제자는 엄청난 빚과 파탄난 인간관계로 점점 피폐해지다 결국 자살을 시도해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작가는 이 과정을 그간 제자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들을 담담히 나열해 보여준다.
샘 여기 분위기 쩔어요. 원래 이런 건가염.
샘 배고파요. 밥 사주세염.
샘 왜 제 문자 씹어요.
샘 전화 좀.
샘 어디세요.
샘 전화 한 번만.
샘 저 좀 꺼내 주세요......
그래서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수인의 독백은 칼처럼 서늘하게 우리 마음을 벤다.
수인은 반짝이던 인연을 팔아 '겨우' 현재의 내가 된 사람이다. 내가 살기 위해 제자를 피라미드의 맨바닥에 깔고, 그걸 디디고서야 겨우 얻을 수 있던 삶이었다.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냐면 그것도 아니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안녕과 맞바꾸어 그저 조금 덜 불행해졌을 뿐, 그녀도 깊이 불행하다. 수인은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늘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인데 어쩌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마치 팔 차선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토록 애써 살아왔지만 겨우 이런 내가 된 것이다.
소설의 백미는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즉 나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도 희망이 없다는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진단이다. 이런 서사를 배경으로 놓고 수인의 독백을 되씹으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뼈아프다. 김애란의 책은 이렇게 내가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우리 시대의 현실 앞에 덤덤하게 나를 데려다 놓는 감각이 뛰어났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대학생이 학생운동을 했고, 지금은 다단계 판매를 하고 있다"는 문장 같은 것.
하지만 내심 마음이 불편했고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도 딱히 권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다.
사실, 제목이 갖는 중의적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비행기가 떠나면서 하늘에 남기는 구름 같은 무늬를 뜻하는 비행운(飛行雲). 열을 품은 비행기가 차고 습한 대기 속을 날면 그 자취를 따라 생기는 이 구름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차고 습한 현실 속에서 열 같고 구름 같은 조그마한 희망을 품어 보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게 곧 사라져 버리는 비행운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비행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기옥 씨였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휴가를 보내러 들뜬 마음으로 모이는 곳, 즉 하늘에 몽글몽글한 비행운이 수십 번도 더 그려지는 공항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중년 아주머니다. 원형 탈모로 고생하면서도 혹시 흉한 몰골 때문에 일터에서 잘릴까 싶어 늘 답답한 머릿수건을 쓴 채, 화장실을 치우는 사람을 마치 화장실과 동격인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을 묵묵히 마주하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아무래도 그녀의 삶은 불행해 보인다. 비행운(飛行雲)과 비행운(非幸運) 사이의 아픈 거리, 그 아이러니가 느껴지도록, 아마 작가는 그런 의도로 제목을 지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끝내 불편했던 것은 제목이 줄 수 있는 오해 때문이었다.
불의(injustice)를 불행(misfortune)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는 제목.
유학 첫 학기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어 복화술을 시도해 가며 들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에서, 그토록 영어가 미운 와중에도 쉬클라(J. Shklar)나 루카스(J. Lucas) 같은 철학자들이 가장 크게 내 마음을 울렸던 건 바로 불의와 불행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의를 불행이라 치부하는 순간 아픈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저 개인적인 아픔이 되고 타인들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지만 불행이 아니라 불의라고 보는 순간, 저 눈물은 내 눈물이 될 수 있고 저 사람의 분노는 정당하며, 저 사람의 아픔은 공동체가 함께 느껴야 할 아픔이 된다. 불운은 개개인이 져야 할 몫이지만, 불의는 사회와 제도 차원에서 책임지고 시정해 가야 할 몫이다.
내가 보기에 기옥 씨의 삶은 그저 재수가 없고 행운이 없는 삶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 속에 던져진 삶이다. 청소 노동자의 열악한 삶, 그 안에서도 여성으로서의 미의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한다는 어이없음. 최근에 연이어 보도되고 있는, 낮은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에 대한 갑질과 폭력은 이분들이 단지 재수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건 불행이 아니라 불의다.
수인 역시 자신의 안녕이 타인의 불행과 맞붙어 있는 사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채무자로 만들어버리는 비정한 사회의 희생양이다. 다단계라는 피라미드 안에서 자기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를 팔아치워야 했던 그.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더라고요.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 언니."라는 그녀의 말은 굳이 마르크스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자본의 증식을 위해 인간을 기계의 부품이나 상품처럼 취급해야 하는 시스템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발이다.
그러게 다단계에 왜 빠져, 라는 말을 혹시 던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과연 그 거대한 피라미드와 닮은 점은 하나도 없을까 묻고 싶다. 타인의 수고를, 타인의 불행을 발판으로 삼아 우리의 안녕을 유지하는 비극을 우리는 최근의 이천 물류센터 화재,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인, 그리고 태안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낀 젊디 젊은 목숨들에게서 본다. 그렇게 가난한 청년들에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위험을 외주로 줘 놓고 과연 우리는 안전하며 행복한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월호의 기억 때문이다.
수학여행이라는 예쁜 꿈과 함께 바다 위에 물결무늬를 내며 떠났던 배가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위험을 외주로 준 것도 아니고 비행운을 내며 떠나는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처럼, 그저 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비행운(非幸運),’ 즉 운이 없었기 때문에 죽었다면 유족들의 눈물은 개인적인 아픔, 동정의 대상, 혹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 소모적인 감정,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슬픔은 정당한 슬픔, 모두의 슬픔이 되며, 그들의 분노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대상, 나아가 긍정적인 동력이 된다. 불의에 불행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이 불행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소모품으로 급격히 변질된다.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아이들, 아직 바다에 가라앉아 바닷속의 별이 된 아이들은 불행한 아이들인가, 아니면 불의에 희생된 아이들인가. 고난 상황에서 한 사람의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재난 상황에서 한 사회의 인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 쌓여 일상화된 추함과 악들이 모여 어떤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내는지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재수가 없고 운이 없어서 아이들이 죽었다면, 그 배에 타지 않아 요행히 살아남은 우리들은 언제라도 같은 운명이 될 수 있는 허무한 존재들이 된다. 비슷한 사고를 당해도 사고 수습이 잘 되면 사는 거고, 아니면 안 됐지만 할 수 없는 거다. 우리는 그저 재수가 좋아 안 죽고 살아있는 사람들일까.
나의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지인 S는, 누나 말처럼 "세월호 침몰의 본질이 단지 불행(不幸)이 아니라 불의(不義)이기에 우린 추모(追慕)를 넘어서서 여전히 추궁(追窮)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강렬한 대답을 전해주었다.
세월호 사건의 공소시효가 10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배가 왜 침몰했으며,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대체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한 어머니는 나도 아이를 따라가고 싶은데, 사랑하는 아이를 만나서 "그런데 왜 그랬대요?라고 아이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직 죽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다.
유족들의 이야기가 이젠 더 듣기 지루하고 우리 사회를 퇴행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도 나에게는 어려운 과제인, 불행과 불의를 구분하는 법을 그들에게 묻고 싶다.
너는 자라서 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누군가가 되지도 못하고 스러진 아이들.
소설가가 자기에게 "행운을 빌어요"라는 사인을 해 주었고, 그래서 <비행운>이라는 제목이 'Be 행운'으로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현실은 차고 습하고 견디기 힘들어도, 모두가 행운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비행운>은 좋은 책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소설가의 따뜻한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따뜻한 마음에 계속 울컥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운에 좌우되기보다는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소설가는 소설을 씀으로써 우리에게 세상의 불의를 마주 보게 했다.
<비행운>이 이전과는 다르게 유머가 적고 무거워졌다는 질문에, 소설가는 지금까진 어떤 곤경에도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비행운> 속 <물속 골리앗>을 쓰면서 농담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뒤에 다시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내고 한 인터뷰에서는, 그간은 상상에 기대어 일어섰던 인물들이 이젠 현실 속에서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모양새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나는 모두에게 행운을 바라기보다, 마주한 불의들을 더 깊이 바라보면서 작은 불의라도 걷어내는 일을 하고 싶다.
내 아이들이 힘껏 자라 '겨우 누군가가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