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비슷한 뜻으로 사람들은 "천재가 노력하는 사람만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 분야에서는 즐기는 사람을 뛰어넘는 한 단계가 또 있으니, 즐기는 사람이 네이티브 스피커만 못하다. 거기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장땡인 것이다.
2017년 2월 15일, 나는 백일이 갓 지난 둘째와 이제 막 조잘대기 시작한 첫째를 각각 조그만 담요로 폭 싼 채 난생처음 독일이란 나라에 내렸다. 외국살이가 처음은 아니었다. 2017년은 내가 미국에 거주한 지 딱 십 년차 되던 해였다.
미국에서 십 년간 키운 배짱이 있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겠지 하는 담대한 마음이었지만, 독일의 새 집으로 향하는 도로 위를 달릴수록 어이쿠 이거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이유는 하나, 당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 이름들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데다 어찌나 긴지, 표지판을 뚫고 밖으로 나올 기세였다.
가뜩이나 길눈이 어두워 학교 캠퍼스에서도 자주 길을 잃는 바람에 후배들이 구조대를 파견하곤 했던 나다. 그래도 그땐 표지판이라도 금방 금방 읽었다. 미국에서도 표지판을 보면 일단 발음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선 표지판 읽으려고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할 판이었다.
아. 내가 이 곳에서 운전이나 제대로 하고 다닐 수 있으려나. 불안이 꼼지락꼼지락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사실 나는 언어를 배우는 일에 꽤 흥미가 있었다. 내 혀가 낯선 발음을 만나는 것, 내 눈이 신기한 글자들을 만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전공한 과에는 제2외국어가 필수였는데, 나는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독일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교양 수업으로 각종 언어들을 살금살금 건드려 보았다. 초급 일본어, 초급 스페인어, 초급 러시아어까지. 일본어와 스페인어에는 꽤 흥미를 느꼈지만 변화가 많은 러시아어는 어려웠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주드라스트부이체, 스파시보라는 인사말 정도와 알파벳 중에 외계인 우주선 같이 생긴 게 있었다는 정도다. 러시아어는 꼭 그 우주선에서 걸어 나온 외계인이 말할 법한 언어 같았다. 아무리 교신하고 싶어도 나의 주파수와는 맞지 않아 한 학기를 배우고 때려치웠다.
독일어는 필수여서 하기는 했지만 사실 변화가 많아서 싫었다. 러시아어보단 덜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명사에 남성, 여성, 중성, 이렇게 세 가지 성별이 있는 데다 동사와 관사가 미친 듯이 변해대는 통에 정신이 사나웠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을까, 결국 남은 것은 고맙다는 인사인 당케(Danke)와 작별인사인 아우프비더젠 (Auf Wiedersehen), 그리고 독일어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입에 붙었을 데어 데스 뎀 덴 (der des dem den, 남성 관사 변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독일 사람을 만나면 일단 초면에 감사를 표시한 후에 재빨리 손을 흔들며 도망가야 하는 것이었다. 더 얘길 하자고 붙잡으면 데어 데스 뎀 덴을 주문 외우듯 크게 외치는 거다. 그럼 아마 상대방이 도망가겠지? 후후. 그 와중에 더욱 망한 것은 우리 집 식구 중에 내가 제일 독어 실력이 나았다는 민망한 사실이었다. 독일 오기 전에 급하게 깔짝깔짝 공부를 해보니 예전에 배운 것들이 슬슬 떠오르긴 했지만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맨 독일 땅에 헤딩을 해야 했다.
첫 한 달, 우리의 삶은 시트콤 같았다. 로션을 사 와서 바르는데 얼굴에서는 왠지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났고, 세탁기 버튼에 즐비한 외계어들이 낯설어 빨래는 건너뛰고 탈수부터 시작하는 파격 빨래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분을 사고 싶었던 나를 도와주시려던 수퍼마켓 할아버지와 한없이 따뜻한 침묵의 대화를 나누는 일 같은 게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과는 달리 꽤 살만했다. 이 곳에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딱 B1 자격증(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의 독일어 급수 자격증)만 따 놓고는 이곳에 새 둥지를 틀고 젖먹이를 돌보는데 몰두해서 슬금슬금 독일어를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지 육신과 뇌가 동시에 삐걱거리는 나와는 달리, 머리도 입 안도 말랑말랑한 아이들은 언어 습득이 굉장히 빨랐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은 곧 어느 영화에선가 보았던 게슈타포처럼 스탑을 "슈톱!"이라고 발음하며 독어 영어 한국어가 근본 없이 섞인 참신한 문장들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자기들끼리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독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어느 나라 말이든 애들 발음이 제일 알아듣기 어렵다. 나는 아이들과 복화술을 시도했지만 뱃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그런가 번번이 실패했다. 형의 만행을 눈물로 호소하는 둘째가 대체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같이 울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너도 옳고 또 너도 옳고 부인 말도 옳소'의 황희 정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큰아이를 뮌헨 시내의 한글학교에 데려다주려고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갈아탈 역을 두 개 남긴 상황에서 아주 긴 안내방송이 나왔다. 치직거리는 음질이라 더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내가 겨우 붙잡을 수 있었던 말조각들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장뿐이었다. 네? 저 아직 이해 못했는데요. 제가 그 고마움을 받아 챙겨도 될까요. 방송을 영어로도 해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봤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영어 방송 따윈 없었다. 무슨 말이었을까, 눈치를 보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평온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내렸지만 원래 사람이 많이 내리는 환승역이었고, 칸이 완전히 비워지는 게 아니라 타는 사람도 많았기에 나는 근처에서 무슨 행사라도 있나 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 이제 다음 역에서 내리자, 하고 아이에게 가방도 메어 줬는데 어이쿠 이놈의 열차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게 아닌가. 다음 역에서 황급히 내려 벽에 붙은 안내문을 읽어보니 주말 선로 공사로 인해 일정 구간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리영역 시험지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일순간 뇌가 오작동하는 느낌이었지만 황급히 노선도를 보며 목적지까지 갈 방법을 궁리했고, 넉넉히 시간을 두고 나온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수업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의 조그만 손을 잡고 헐레벌떡 뛰어가면서 내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아이 한글 수업이 아니라 중요한 인터뷰 같은 거였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아니 그 방송이 위급한 대피상황을 안내하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과연 방송을 듣고 내 아이를 적절히 보호하며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을까. 그 날 나는 약간 서늘해진 마음으로, 그간 느슨하게만 가졌던 독일어의 필요성을 단단히 가슴에 새겼다. 작은 불편이 커다란 위험으로 바뀌는 것은 찰나일지도 모른다.
외국에 떨어진 사람은 딱 자신이 구사하는 외국어만큼의 나이가 되는 법이다. 알아듣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가 알려주고 챙겨줘야 하는 어린애와 다름없다. 집안에 어른이 하나도 없고 옹알이 수준의 아이들만 넷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건 사실 불편함을 떠나 그 자체로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이 사회에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려면, 또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려면 독일어를 알아야 했다. 3년 정도 살아보자고 생각하고 온 독일이었는데 여러모로 우리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여기에서 좀 더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각종 문서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손에 쥐어졌지만,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였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을 위해서라도 쏟아져 내리는 독일어의 물살을 뚫고 나가야 했다.
남편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룹의 관리직을 맡게 되면서 소통해야 할 사람들의 반경이 늘어났다. 연구진이 아닌 다른 직원들과 더 잘 소통하려면 독일어를 할 수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연구소가 아닌 일상의 반경, 즉 마트나 우체국이나 관청 같은 곳에서 염화미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나를 보살펴 주는 사람들도 내 친구들도 모두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아이들은 '나는 너희가 하는 말 따위는 모르겠다'의 당당함으로 기죽지 않고 어린이집에 적응해 갔다. 친구와 다툼이 생기면 최대한 독일어처럼 들리는 외계어를 랩처럼 쏟아낸 다음, 상대가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면 의기양양해하며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허허 이 자식들. 하지만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큰아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표현력이나 어휘가 현저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노는 게 주된 사명인 작은아이도 어려움을 제법 겪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 친구들도 쉽게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짠하고 안타까웠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공통 목표는 독일어가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아이들도,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에게 가르쳐주며 조금씩 독일어를 늘려가고 있다.
다시 마음먹고 도전하기 시작한 독일어.
하지만 이십 대에 일본어나 스페인어를 마주하던 때와는 또 다르다.
불혹이 넘어 새 언어를 마스터하려니,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나이에 관사 변형의 이치가 안 깨달아져 마음이 찰랑거리고 있다.
언어를 배울 때는 '장례희망'은 대통령이며 '곱셈추위'가 싫은 아이들처럼 내 말이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조잘거려야 하는 법인데, 약간 완벽주의가 있는 나는 틀릴 것 같은 문장을 입 밖으로 내려면 당최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꾸역꾸역 해나가고 있다.
우선은 기초를 잡기 위해 학원을 다녔다. 아이들 때문에 평일 코스를 듣기 어려워 주말에 인텐시브 코스를 들었다. 열 시간씩 넘게 자리에 앉아 있느라 가뜩이나 납작한 내 엉덩이는 더욱 평면에 가까워졌다.
얼추 혼자 해나갈 수준이 된 이후로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하루에 한 장씩 동화책 읽기, 독일어 팟캐스트 듣기, 아이들과 어린이용 그림 사전 보면서 단어 공부하기, 일상의 반경에 들어오는 독일 사람들과 짧게라도 대화하기, 아이들과 함께 동네 도서관에서 어린이용 DVD 빌려 보기.
처음에 내가 학원 교재로 나온 CD를 수시로 틀어 두었을 때, 큰아이는 그 CD에 나오는 대화들을 외우고 다녀서 유치원에서 큰 웃음을 주었다. 세 살짜리가 "나는 서른두 살이고, 딸이 둘 있어.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싶어." 같은 문장을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은 남편과 유료 앱을 깔아서 서로 경쟁적으로 진도를 빼고 있는데, 아이들은 들여다보며 문장을 따라하고 참견하기를 여전히 즐긴다. 지금은 문법이나 어휘 면에서 우리가 조금 낫더라도 아이들은 금세 엄마 아빠의 속도를 따라잡아 앞서갈 것이다. 지금은 아이가 나에게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하지만, 몇 년 후엔 내가 아이에게 설명서가 이해가지 않는다며 물어보겠지. 하지만 무력하게 아이들에게만 의존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엄마로서 필요한 권위와 존경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고 싶어서, 무엇보다 주체적 인간으로 나 스스로의 자유를 확장해 가기 위해서, 나는 달팽이 같은 속도로라도 끊임없이 걸어갈 것이다.
이 독일어 배우기라는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테지만, 이 도전을 시작하면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첫째, 나는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간은 내가 전혀 닿을 수 없었던 삶과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다녔던 학원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엔 늘 동그란 모자를 눌러 쓰고 있던 누르한이 있었다.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폭탄이 터지는 밤길을 밤새 걸어 도망치면서 하룻밤만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목이 다 맵도록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시리아에 살 때 누르한은 학교 교감이었고 남편 오마르는 시장이었다. 슬슬 은퇴를 앞둔 나이에 고향을 떠난 그들은 새로운 곳에서 낯선 독일어를 익히느라 애를 먹었고, 공부를 굉장히 잘했다는 누르한의 막내아들은 독일어를 하지 못했기에 대학을 갈 아이들이 진학하는 김나지움에 가지 못했다. 결국 가장 성적이 낮은 아이들이 가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눈시울이 붉어진 누르한 앞에서, 나는 한창 민감할 나이의 아이가 겪고 있을 좌절감이 어떻게 그 아이를 할퀴고 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곳에는 또 한창 싱그러울 나이에 늘 피곤에 절어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가 있었다. 알고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부당하게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았던 것이라, 우리는 함께 걱정하고 안쓰러워했다. 나는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독일어로 더듬더듬 분노했고, 옆에서 유창하게 분노하는 선생님과 함께 그녀를 도울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다. 내가 독일에서 난생처음 접한 신묘한 드링크인 슈페치(Spezi, 콜라와 오렌지 소다를 반반 섞은 음료)를 좋아해서 늘 수업시간에 두 병씩 마시곤 했던, 반에서 가장 어렸던 자비드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수업 중에 어머니가 학교로 달려와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했고, 그렇게 도망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독일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다고 했다.
그들에게 독일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라 '생명, 새로운 삶의 터전, 혹은 부당하지 않은 삶'과 동일어였다. 내가 독일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한 언어가 내포하는 무게와 그 안에 담긴 절실함을 그토록 가슴 깊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이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를 조금씩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세상을 조금씩 반추할 기회를 얻었다.
독일어에 성별이 있고 그걸 외워야 한다는 사실은 깜찍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단어를 보면서 이건 무슨 성별일 것 같다는 느낌, 그게 바로 내 고정관념이었다. 처음엔 새롭고 재미있기도 했다. 치즈는 어쩌다 남성이 되었고 버터는 무슨 연유로 여성이 되었나. 치마와 비키니는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남성인 것인가. 그러다 곧 신경 쓰이는 점들이, 비 온 뒤 새싹처럼 무수하게 돋아났다. 왜 폭력(die Gewalt)은 여성이고 평화(der Frieden)는 남성이 되었을까. 무엇보다 왜 늘 남성 변화부터 외워야 하는 걸까.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것은 소년과 소녀의 성별이었다. 소년은 남성, 소녀는 여성일 것 같지만 아니올시다. 소년(der Junge)은 남성, 소녀(das Mädchen)는 중성이다. 뭔가 마음이 고요하게 부글거리지 않는가. 이렇게 성별이 중요한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면, 일상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무수한 단어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염려되기도 했다. 언어는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는 수단인데, 혹시 정 반대로 단어가 족쇄요, 언어 자체가 감옥 같지는 않을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렇게 나는 세상 곳곳에 붙은 성별이라는 코드에 대해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새로운 눈으로 이 세상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성별뿐 아니라 독특한 단어들이나 문장에 느슨하게 스며있는 문화 역시 독일 사회를 맛보는 애피타이저이자 한국 사회를 질겅질겅 되씹어 보는 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과 역으로 일맥상통하는 Schadenfreude(남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는 단어를 보면서 양국 간의 이 국경을 넘나드는 솔직함에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아름다운 독일어 단어로 꼽히지만 번역하는 것이 꽤 어렵다는 Habseligkeiten(개인이 물질적으로 가진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를 모두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소유'), Geborgenheit (든든함, 아늑함, 사랑, 친밀감, 열린 마음 같은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 같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이런 단어를 만들어낸 사회와 그 안에 든 마음을 생각했다. 반대로 정(情)이나 한(恨), 효(孝) 같은, 번역하려면 꽤나 어려울 우리 단어들과 그 정서를 구비구비 담았을 무수한 삶들도 떠올려 보았다.
언어에는 한 사회가 오랜 시간을 두고 겹겹이 녹아있다. 내가 독일어를 새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언어에 켜켜이 쌓인 다양한 생각거리를 꺼내 곱씹어보거나, 오랜 시간 언어에 방울방울 스민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헤아려보는 일에 게을렀을 것 같다.
셋째,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언어의 힘을 새롭게 깨닫는다.
말이 가진 힘, 그리고 말이 주는 힘. 두 힘은 제법 다르지만 한 인간 안에서는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말에는 말 자체가 가진 힘이 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힘을 준다. 예를 들어 당당함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당당하다. 그리고 "저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에게 실제로 당당함의 수치를 높여주기도 한다.
굳이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느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사유의 수단이라는 것을. 빈약한 언어로는 가난한 집을 지어 영혼이 곤궁한 살림을 살게 된다. 내 안에 아무리 부푼 구름처럼 오색찬란한 사랑이 빛나고 있어도, 표현할 어휘가 빈곤하면 내뱉는 것은 그저 흙빛의 작은 모래알일 수 있다. 그간 나는 아직 독어가 짧아 아이의 반 친구들에게 너희가 얼마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운지 제대로 전해줄 수 없었고, 황당한 일을 겪어도 부당함을 조목조목 설명할 수가 없었다. 독일어로 만든 내 존재의 집이 마치 첫째 아기돼지의 지푸라기 집처럼 부실해서, 바람만 불면 밑천을 드러내며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발레리가 언어를 아름다운 사슬이라고 한 까닭은, 언어는 우리에게 많은 구속으로 작용하고 습득에도 힘이 들지만 이 사슬에 제대로 매여야만 우리가 퍼덕거리며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힘. 그 중에서 가장 고마운 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는 점이다. 언어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에피소드들이 풀리는 경험이 늘어났다. 무뚝뚝해서 조금 무섭기도 했던 유치원 원장님이 실은 얼마나 장난을 잘 치는 분인지, 매주 화요일에 우리 건물에 청소하러 오시는 거트 아주머니가 얼마나 다정한 분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 곳에서 뭔가 작게라도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하고 있다. 시작과 도전이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또 다른 시작과 도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한 세계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갖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위로는 같은 민족에게 막혀있는 우리지만, 새로운 언어를 통해 우리는 집 안에서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다 보면 실제로 그 언어를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경우가 분명히 생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언어에 흥미를 느끼고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가족이 함께 배우면 더 좋은 것 같다. 부부간에는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생기면서 동지애가 생겨나고, 서로 자극이 되어 분발하게 된다. 세상에 엄마 아빠도 모르는 것이 있고, 함께 찾아가면서 배우는 게 재밌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인 경험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한 번은 큰아이가 그랬다.
"한국말은 쉽고 영어는 재미있는데 독일어는 어려워."
어떤 말을 좀 할라치면 애를 데려다 딴 세상에 갖다 놓은 엄마로서는 그 말이 짠했다.
네가 한국에 있었으면 아마 말의 샘이 더 깊고 넓었을 텐데. 너는 그 안에서 신나게 헤엄치며 더 편안하게 많은 걸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엄마도 쩔쩔매지 않고, 네 샘이 더 깊고 넓어지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여러 샘에서 헤엄치다 보면 넓은 바다에서 자유로워지는 날도 있을 거야.
"엄마도 그래. 독일어 진짜 너무 어려워. 우리 같이 공부하자."
자기를 이끌어주는 엄마보다 자기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더 편안해 하기를, 커다랗기만한 아빠에게 자기도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아이가 뿌듯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와 우리 가족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이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논어로 시작했으니 논어를 다시 소환해 볼까. 논어를 펴면 맨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나는 지금 배우고 때때로 익히고 있으며, 그것은 분명히 즐겁다.
나는 이 언어로 내 아이들과 다양한 감정을 나누고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이 언어로 이웃들을 좀 더 알게 되고 더 많이 웃게 되기를, 새로운 꿈을 꾸기를, 그리하여 더 반짝이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오늘도 토이 토이 토이(Toi Toi Toi,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