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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Mar 03. 2022

경계를 넘어,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난 고양이를 싫어해.”




“어쩌다 터럭이들을 좋아하게 된 거야?”


요즘 스토리에 종종 등장하는 고양이들을 보고 동생이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다. 난 고양이라면 ‘야옹’하는 울음소리조차 소름 끼친다며 듣기 싫어했고, 녀석들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는 건 소름 끼친다며 더더욱 꺼리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녀석들을 안고 만지고, 혀 짧은 소리로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가족들이 놀랄 만도 하다.


고양이를 싫어하게 된 악연이랄까,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엄마는 강아지든 고양이든 집안에서 털이 있는 동물을 키우는 걸 싫어하셨고, 자연스럽게 나도 엄마의 취향을 따르게 됐다. 공기 중에 털이 떠다니는 걸 보면, 괜히 코 끝이 간지럽고 온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 동생이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아 온 적이 있다. (그때부터 동생은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듯하다.) 작은 상자에 푹신한 천과 수건을 깔고 거실 창가 쪽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새끼 고양이는 몸집이 얼마나 작았는지 내 손을 활짝 펴면 다 가려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고양이 상자 옆에 가지도 못하고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상자 밖으로 녀석이 걸어 나올까 잔뜩 겁을 먹었다. 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실오라기 같은 털이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으아악! 털, 털!"

털이 몸에 닿으면 큰 일이라도 날 듯, 나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엄마는 실내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건 안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결국, 집에 온 지 하루 혹은 이틀 만에 새끼 고양이는 돌아가야 했다.


고양이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도 한몫했다. 검은 고양이에 대한 저주,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꼭 앙갚음을 한다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내 삶에 고양이라는 존재는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골목길에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만날 때마다 온몸은 얼어붙었고, 눈을 찔끔 감은 채 멀리 ‘빙’ 돌아 집으로 잽싸게 뛰었다.

고양이도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만난 나를 보고 녀석 역시 놀랐을 터인데, 갑자기 내가 뛰기까지 했으니... 녀석은 빨라지는 내 걸음 뒤로 ‘야~옹’ 하며 소리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나한테 왜 그러냐옹~ 같이 놀자옹~”라고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양이만 보면 긴장했고 다가가지 못했다. 영국에 살던 시절,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를 코트 속에 넣어 '쏙' 안고 와서는 갑자기 내 눈앞에 내미는 친구에게 "Lovely!"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물론 녀석을 만지지는 못했다. 새하얗고 긴 털이 눈에 띄던 고양이였는데 아직 아이가 없던 친구 부부는 녀석을 'baby'라 부르며 하루에도 수십 번 뽀뽀를 해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엔 집주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잽싸게 소파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고양이 털이 없는지 살필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보드라운 발등을, 북슬북슬한 온몸을 쓰다듬는 것도 모자라 온몸으로 껴안고 있다니...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나 싶다.


나를 변화시킨 건 새끼 고양이 리리짱이다. 7~8여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일본에 사는 삼촌 댁에 놀러 왔다. 그런데 그동안 기르던 귀염둥이 강아지가 사라지고, 대신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점점 몸집이 커지는 강아지를 아파트에서 기르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지방에 사는 지인에게 강아지를 맡기고 눈물의 이별을 한 뒤, 삼촌네 식구는 틈이 날 때마다 지금까지 성견이 된 '개'를 만나러 그 집을 찾고 있다.) 


고양이가 무서워 소파 가장자리에 멀찌감치 앉아 있던 나에게 리리짱은 한 발, 두 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무릎 위에 보드라운 발을 ‘툭’ 얹었다.

'뭐...! 뭐... 나한테 어쩌라고?'

만지지도 못하고 소파 등받이와 하나가 된 듯 붙어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리리는 ‘야~옹’하고 말을 걸었다.

리리의 울음을 애써 무시했다. 못 들은 척 당시에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야~오옹"

녀석은 다시 한번 울었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올린 발을 꼼지락거렸다. 

'만져달라는 거야? 어떻게 해달라고...'

당황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발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잿빛과 아이보리빛이 섞인 털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무엇에 홀린 듯 녀석의 발등의 털을 반복해서 쓰다듬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리리의 발을 잡았다. 악수하듯 인사했다.


“안...녕...! 리리짱!”

리리는 거부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고 오히려 '야~옹' 하며 또 소리를 냈다. 핑크빛 발바닥은 부푼 젤리처럼 살집이 제법 있었고, 말캉말캉 촉감이 좋았다. 그렇게 리리짱의 발을 만지다 보니, 어느덧 내 손은 녀석의 등으로, 머리 위로, 그리고 귀와 턱 밑까지 쓰다듬고 있었다.




대학 시절, 충무로에 죽 늘어선 pet shop 앞을 늘 지나야 했다. 늘 붙어 다니던 친구는 점포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데 투명한 유리창에 얼굴을 밀착한 채, 꼬물거리는 생명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난 ‘고양이가 대체 뭐가 예쁘다고... 참...’ 속으로 푸념하며, 그녀가 어서 역으로 향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지나가는 길고양이만 보아도 인사하고, pet shop에서 놀고 있는 아기 고양이들을 보느라 몇십 분을 서 있다. 심지어 내가 무얼 사러 가고 있었지 깜박할 때도 있다.


싫어한다라는 건 뭘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는데…

“나랑 맞지 않아. 내 취향이 아니야.”

살아갈수록 생각도 습관도 시나브로 변해가는 나를 발견하며, ‘싫다’는 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알아가고 있다. 

수차례 경험도 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싫다. 좋다. 옳다. 그르다' 단정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경계를 넘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쓰다듬어 주면 이렇게 눈을 감고 좋아하는 리리
▲ 새끼 고양이었던 리리는 어느새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통통한 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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