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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Apr 21. 2022

봄이 말을 건다

잊고 싶지 않은 이름


“오늘의 낮 최고 기온은 28도로 예상됩니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에 전국이 당황스러운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기예보를 전하는 기상캐스터는 아침부터 벚꽃 가득핀 우에노 공원에 나가 있다. 여전히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반팔 차림으로 어느 때보다 가볍게 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정말이지 4월 초순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온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시작된 꽃샘 추위와 비바람으로 다시 겨울인 듯 두터운 패딩을 꺼내 입은 지 며칠.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28도까지 닿았다. 하루 만에 15도 가까이 오른 것! 물론 한여름처럼 습한 무더위는 아니다. 구름이 해를 가리거나,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금세 몸이 서늘해지고 한기가 느껴진다. 이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름이겠지.


요즘, 다음 달에 있을 큰 일을 앞두고 해야 할 일들을 목록에 적어가며 하나씩 해치우고 있다. 마음은 바쁘지만, 그렇다고 걷기를 양보할 순 없기에 집 주변이라도 걸으려 애쓰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몸이 바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적당한 휴식을 모르는 나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몸의 알람'인터라, 통증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겁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한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제자리 걷기라도 하며 '신호'를 어루고 달래기 시작한다.




햇살이 제법 따가워진 탓에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남편도 함께다. 현관문을 열자, '푸쉭푸쉭푸쉭!' 자전거 바퀴에 열심히 바람을 넣고 있는 옆집 남자가 보인다. 미국인 부부가 근처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간 후, 몇 달 전 리모델링을 마친 옆집으로 새로 이사 온 중년의 사내다. 집 앞에 세워진 자전거 한 대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남자의 주요 이동수단은 이 자전거인 듯하다. 자전거 바람 넣기가 막바지였는지 "좋아!" 자전거 안장을 손으로 '탁' 치더니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킨다.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아!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장갑까지 제대로 갖춘 차림으로 옆집 남자는 자전거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남편은 행여 문이 일찍 닫히지 않도록 '열림' 버튼을 꾸욱 누르고 있다. '쉬이이익' 문이 닫히고 정적이 흐른다. 위이이이잉! 5, 4, 3, 2, 1.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멈추기까지 일분이 채 되지 않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낯선 사람과 동승한 좁은 공간에서의 시간은 퍽 길다. 옆집 남자와 우리는 멋쩍게 눈인사를 나누고 맨션 1층에서 각자의 길로 나선다.


오늘은 동네를 조금 멀리 벗어나 보기로 한다. 익숙한 풍경이 편하기도 하지만, 때론 낯선 골목길에서 만나는 담장과 꽃, 돌과 나무,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왠지 나를 들뜨게 한다. 덴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해질녘 노을이 예쁘기로 이름난 사야마호 근처의 역에 도착한다.

“와아아아! 꽃 좀 봐요!”

지난밤 편치 않은 소식 하나를 접하고 잠자리를 뒤척였던 탓인지, 사실 아침부터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한데, 역사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눈앞에 펼쳐지는 파란 하늘과 이름 모를 꽃들을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이 웃는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 저기 하늘 좀 봐봐요. 난 이맘때 나무들이 제일 좋아요. 쨍한 초록색으로 짙어지기 전에 보들보들 연하고 여린 물 가득 먹은 듯한 연둣빛 초록이요. 저기 나무 보여요? 다 같은 초록이 하나도 없잖아요. 어쩜 어쩜!"

함박눈 내리는 하늘 올려다보며 꼬리 치고 빙빙 도는 강아지처럼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광장에서 손뼉을 치며 콩콩 뛴다. 호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까지 20여분을 걸었을까. 이른 아침부터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나무 그늘마다 자리를 잡고 돗자리 위에 앉아 있다.

사야마호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내린다. 언제 봐도 기분좋은 노란색 세이부센 덴샤.
인기척 없는 집에는 새소리만 가득하다.

그늘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아직은 쌀쌀한 기운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터라, 무릎담요나 카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이들이 제법 많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도시락을 싸서 나온 엄마들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며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에에에에? 그랬던 거야? 정말 몰랐어."
"우리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엔도(遠藤) 선생님 참 좋은 분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요즘 같은 때 병문안 가는 게 조심스럽지 않아?"
"그러게... 그건 또 그래. 싫어할지도 몰라. 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냥 모른 척 있어야 할까. 우리 모두한테 참 친절했는데……."

엄마들의 대화를 들으며 공원 바깥쪽, 호수의 경계와 닿은 울타리 바로 옆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노란 민들레꽃이 가득 피었는데 산책 나온 멍멍이 한 마리가 뭉게뭉게 동그란 솜털 뭉치가 된 민들레 씨를 앞 발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겁쟁이인지 발끝을 살짝 대어 보더니,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몽실몽실한 뭉치가 흔들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한다. 그리고 몇 초 뒤, 한 발짝 물러서 있다가 다시 한번 민들레 씨를 앞 발로 '툭' 친다. 가만히 목줄을 잡고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주인. 민들레 씨를 온 머리에 두른 듯, 은빛 머리카락이 풍성한 할머니는 웃으며 멍멍이를 달랜다.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탄포포(タンポポ, 민들레꽃)의 아카짱(赤ちゃん, 아기)이야. 베비(baby)라니까 베비(ベビー)!"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렸는지 멍멍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씨를 날려보낸 민들레꽃이 사방에 가득하다

노란 민들레꽃은 울타리를 따라 한참 동안 이어진다. 아직은 초록 잎 사이로 지난겨울의 흔적이 뒤섞인 풀밭. 겨울과 봄이 한데 모여 멋진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머나! 이건 쑥이네요. 숙지 나물도 있고. 냉이는 언제 나와서 벌써 꽃이 피었네요?"
"이게 냉이꽃이야? 신기하다. 하얀 꽃잎이 예쁜데?"
"그렇죠? 냉이꽃 참 예뻐요. 자세히 보면 꽃 잎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남편의 관심에 신이 나서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봄에 들에 피는 꽃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두들 우리말 이름이 다 있어요. 할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보라, 노랑, 분홍, 빨강, 자주, 파랑……. 알록달록한 들꽃을 천천히 내려다보느라 걸음이 느려진다. 눈에 익은 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고 이름까지 들었는데,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서 할머니께 물어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할머니는 척척박사였다. 할머니가 모르는 풀, 나무, 곤충이 없었고, 마을의 역사며 동네 사람들의 사정에도 밝았다. 할머니는 어떤 질문이든 ‘척척’ 답해 주셨다. 그래서 그토록 안일했던 걸까. 할머니께 듣고 배운 것들을 꼼꼼히 기록하지 않았다. 언제든 척척박사는 내 곁에 있으니, 어떤 질문에도 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냉이. 거대한 밭이다.

얼마 전 이곳 일본 땅에서 어려서 자주 보았던 들꽃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동안 수차례 같은 길을 따라 걸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풀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꽃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얼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이미지 검색을 시도했다. 안타깝게도 몇 번이나 사진을 다시 찍어 검색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결과는 '알 수 없음'이었다. 또 다른 풀 역시, 결과가 나왔지만, 할머니가 알려주셨던 그 이름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찝찝했다. 아무리 기억하려 노력해보았지만, 할머니에게 들은 그 이름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슬프다. 할머니에게 듣고 익힌 것들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내 자신을 탓할 뿐이다.


봄에 나는 반가운 풀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나무가 빽빽한 숲의 어귀에 다다랐다. 근처의 유채꽃밭에서 날아오는 달콤한 향기가 마스크를 뚫고 코끝을 간지럽힌다. 꽃 향기를 취해 얼이 빠진 아이처럼 걷고 있는데 그늘진 곳에서 꼬불꼬불한 줄기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어머나! 고사리예요!”
“고사리인지 어떻게 알아? 아닐 수도 있잖아.”

반가움에 고사리를 향해 돌진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놀란다. 시장에서 파는 말린 고사리나 조리가 되어 식탁에 올라온 죽은(?) 고사리 모양에만 익숙한 그는 미심쩍은 눈치다.

“저… 기… 말이야. 고사리가 아닐 수도 있잖아.”
“분명! 이건 고사리가 맞아요! 그동안 할머니한테 보고 들은 짬밥이 몇 년인데요. 다른 건 몰라도 고사리랑 봄나물 몇 가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요!”

남편 앞에서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뻐기는 나.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적어도 냉이도 잘 모르는 이 사람 앞에서는) 할머니에게 들은 것 중 기억하지 못하는 예쁜 우리말 이름의 풀들이 여전히 많이 있긴 하지만, 자신 있게 구분할 수 있는 풀이 제법 있다. 이를테면, 고사리, 곰취, 산마늘, 원추리, 딱지, 고비, 숙지, 냉이, 약쑥, 곰봄부리, 광대나물, 오가피, 가죽나물, 참나물, 돌나물, 방풍나물, 익모초, 두릅, 달래 등등……. 아직은 이것들을 보면 바로 이름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나에게는 익숙한 산야초이다.


식물 박사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해진 나는 고사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보들보들 짧고 하얀 솜털에 둘러싸여 고불고불 꽈리를 틀 듯 말려있는 귀여운 모양이라니! 남편도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오는 고사리가 신기한 모양이다. 한참을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줄기가 통통해! 정말 신기하다. 빼빼 마르고 딱딱한 것만 봤는데! 그리고 완전 갈색이잖아 고사리는! 근데 이건 초록색이야.”

방학 숙제하러 식물 채집 중인 아이처럼 사진을 찍고 무릎을 꿇은 채 요리조리 고개를 숙여 제법 자세히 관찰 중이다.


“뭐시 그라고 신기할까나.
우리 강아지 눈에는!”

그 시절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산에서 새로운 풀을 발견하면 넋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말이다. 특히, 고사리와 고비를 구분하게 되었을 때는 할머니 표현을 빌리면, ‘누가 뜸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며 놀라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고비를 보고서, 그 신비로운 모양과 생김새에 입을 떡 벌리고 감탄했다.

“할머니 이거 진짜 부드러워요. 이거 먹지 말고 그대로 가지면 안 돼요? 너무 부드러워…….”

고사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도톰하고 부드러운 솜털을 자랑하는 고비를 보고, 얼굴에 갖다 대며 “기분 좋아요.”라며 좋아하는 손녀를 보며 할머니는 계속 웃으셨다.

“한 번 먹어보면 할머니 할머니 우리 고비 따러 산에 또 가자고 그럴 것이다.”

어려서부터 나물 반찬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어른 입맛을 가진 나를 잘 아셨던 터라, 할머니는 단번에 내가 고비를 사랑하게 될 거라 예상하셨다. 사실이었다. 혹 누군가 고비를 먹지 않고 병에 꽂아 눈으로 즐기겠다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권할 것이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꼭 맛보라고.




가만, 고사리와 고비는 할미꽃을 았다. 그래서일까! 볼수록 자꾸만 목이 메인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고사리 무리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눈에 들어오는 새 봄의 새 초록은 왜 이리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지. 식물 박사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제때 잘 기록해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에게도 확인할 수 없는 할머니 삶과 함께였던 그 소소한 이야기들을 애써 기억하려 해도 매번 한계에 부딪힌다. 봄나물을 보아도 아쉽고, 서점에서 옛날 옛적 이야기책을 보아도 아쉽기 그지없다.


살아있는 이야기 사전이었던 우리네 할머니의 이야기를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보물 보따리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못난 손녀는 오늘도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한 길을 걷는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완벽한 기억은 아니지만, 할머니에게 들은 단편의 산야초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나는 얼마나 감사한가!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회상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다. 여전히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어 다행이다.


해가 저무는 사야마호, 살포시 눈을 감고 걷다 보면 그 시절 할머니와 함께 걷던 좁은 산길이 나오고, 풀들마다 가진 특유의 향이 한데 섞여 날아온다.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가 함께 겹쳐진다.


“아가! 정금 따 주랴?”

봄, 봄, 봄! 그 봄을 기억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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