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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Nov 22. 2021

백수+1

100세 시대를 살아가며

대롱대롱 매달린 감을 노리는 새들이 어느 집 위를 맴돌고 있다.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는 하교하는 초등학생들로 가득하다. 길 양쪽에는 모자와 조끼, 짧은 깃발을 든 할아버지들이 곳곳에 서 있다.


"할머니 조심해!"

"응, 괜찮아. 할머니는 이곳이 아주 익숙해."


길 모퉁이를 돌던 꼬마가 잡고 걷던 할머니의 손을 흔들며 말한다. 달걀노른자처럼 동그란 모자를 쓴 아이의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말이다. 짧은 백발의 할머니는 자신을 걱정하는 손자가 기특하고 귀여운지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참 웃는다. 그리고는 손을 잡지 않은 반대편의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든다. 행진하는 군인처럼 다리도 90도로 척척 들어 올린다.


"이것 봐! 할머니 건강하지? 아직 눈도 초롱초롱해.(후훗)!"


손자는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를 보고 웃는다.

뒤에서 보니 할머니의 걸음이 범상치 않다. 얼핏 보아도 여든에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지만, 뒷모습만 보아서는 30대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이다. 반듯하게 곧은 허리는 물론이고   어깨와 탄력 있는 엉덩이와 다리까지. 한국에 계신 아빠와 비슷한 연령대   같은데, 너무 다른 모습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이들  일하는 어르신이  많다.

집에 돌아가는 아이들의 교통지도를 하는 할아버지들. 자전거를 타고 음식을 나르는 우버이츠 배달원. 상자를 차에서 내려 수레로 옮기는 택배원. 긴급 사태 이후로 활기를 되찾은 동네 라면집의 종업원. 그리고 100년이 넘은 당고집의 노부부. 아침마다 살고 있는 맨션을 청소하는 할머니.


우리나라보다 고령화 사회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 고령자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은 수십  전부터 익숙해진 풍경이다.


문득  전에  뉴스 보도가 생각난다.



일본의 100세 이상 노인 8만 6천 명 넘어 51년 연속 역대 최대치 경신!

역대 최고령은 118세!


NHK 방송은 9 14, 일본의 100 이상인 고령자 인구가 8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2021 9 1일을 기준으로 주민기본대장을 토대로 파악한 결과, 100 이상 고령자는 지난 1  9176명이 늘어나 8 450명으로 집계됐다.


 증가폭은 일본에서 100 이상 인구의 연간 증가자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3 이후 가장 많은 수치라는 . NHK 따르면 일본의 100 이상 고령자는 1963 153명에서 1998 1 명을 넘어선  올해 처음으로 8 명대에 올라섰고, 성별로는 여성이 전체의 88% 해당하는 7 975명에 달했다.


일본 국민 평균 수명은 지난 2018 기준으로 여성이 87.3, 남성 81.2세이며, 70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0% 넘는 초고령사회이다.


▲ 인구 10만 명당 100세 이상 고령자 인구가 최대인 곳은 시마네현으로 9년 연속을 기록

인구 10만 명 당 100세 이상 고령자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134.75명을 기록한 시마네현으로, 9년 연속으최다 기록이다. 이어 고치현이 126.29명, 가고시마현이 118.74명이었다. 한편 가장 적은 곳은 32년 연속을 기록한 사이타마현으로 42.4명, 그 다음이 아이치현이 44.42명, 치바현이 49.12명이었다.

▲ 일본 국내 최고령자는 118세 여성, 후쿠시마시에 사는 다나카 카네(田中カ子) 씨

2021 9 기준 일본 국내에서 최고령자는 1903년에 태어난 118 타나까 씨인데, 그녀는 생존하는 세계 최고령자의 기네스 세계 기록도 가지고 있다.

▲ 현존하는 남성 최고령자는 나라시에 사는 111세의 上田幹藏 할아버지(1910년 5월 11일 출생)

남성의 경우 최고령자는 나라시(奈良市)에 사는 111세의 上田幹藏 씨로, 1910년에 태어났다.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살아오면서 100세를 넘긴 어르신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 몇 해전 돌아가신 할머니도 94세의 연세였지만, 장례식장에 오신 문상객들은 "장수하셨다. 오래 사셨네. 복 받으셨어."라며 할머니의 아흔네 해의 생애를 '길다'라고 평가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병원의 침상에 누으셔야 했다.  두어 달을 제외하면 나의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는 집에서 매일 아침을 맞았다.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쓸고 닦고, 철마다 푸성귀를 삶고 조물조물 무쳐 밥상 위에 올리기도 하시고, 엄마를 돕는다고 작은 둘레상을 펴고 마늘이나 파를 다듬기도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과 달리 행여 다치실까 봐, 아프실까 봐, “조심하시라. 일 하지 마시라.” 우리는 잔소리가 잦았다. 그런 우리에게 할머니는 늘 웃으며 말씀하셨다.


“사람이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면 몸도 고장이 나는 거여. 건강이 공으로 얻어진다냐?”




종일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며 침침해진 눈. 뻐근한 목과 어깨를 핑계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꽤 오랫동안 걷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를 배호하던 중이다. 전철 역의 광장에 가까워질 무렵,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나는 기타 연주에 맞춰 부르는 나이든 남성의 허스키한 노랫소리.


코로나 팬더믹 이전에는 이따금 역 광장에 나와 통기타를 메고 연주하시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왠지 그 버스커 할아버지일 것 같은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윤기 나는 하얀 단발머리는 아직도 풍성한 숱이 인상적이었고 멋진 청바지와 잘 어울리는 카키색 스웨이드 재킷, 무심하게 두른 짧은 스카프는 할아버지의 멋을 한층 끌어올렸었다.


어쩜! 할아버지는 그대로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상의가 도톰한 패팅으로 바뀌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청바지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컨트리 송을 신나게 부르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할머니도 함께이다. 까딱까딱 발장단을 맞추며 할아버지의 공연을 로열석에서 즐기는 할머니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할아버지에게도 지금 할머니의 모습은 수줍음 많은 소녀와 다름없겠지?


유난히 손이 차가워 가을만 되어도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다니는 나의 손이 저절로 박수를 치고 있다. 가사는 모르지만,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버스커 할아버지의 멋지 모습을 응원하는 박수가 그칠 줄 모른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그렇게 건강할게요.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하게 나이를 든 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쉽지 않은 일인지 느낀다. 영원히 내 것일 것만 같은 젊음, 그리고 건강. 세월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기세를 잃어가는 것들을. 아니 굳이 세월이 아니더라도 불시에 나에게서 떠나버릴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게 장담하며 살아왔을까.


만추의 11월, 찬서리에 축 늘어지고 물기 가득했던 가지와 잎은 푸석푸석해지는 것이 비단 초목뿐일까. 나는 인생의 계절에서 어느 즈음에 와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러다가는 풍성한 가을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보릿고개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여든, 아흔이 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고, 성성한 두 다리로 일어서서 집안 곳곳을 살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그 때도 나는 sns를 기웃거리고 있겠지? 좋아하는 일들을 누리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일상. 그리고 이따금씩 나이 든 나를 찾아오는 반가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모습.


그런 부지런함과 힘을 갖추려면 지금부터 아껴야 한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거저 얻어지는 것인 줄 아니니까. 그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100세를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삶이 쉽게만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들을 참고 절제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쌓여, 100세 이후에도 자랑할 수 있는 '건강'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흔히들 특별한 직업이 없는 백수의 일상이 가장 바쁘다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같은 의미의 백수는 아니지만, 100세를 코 앞에 둔 아흔아홉의 백수의 삶이 어쩌면 누구보다 바쁘지 않을까! 100년이라는 생을 목전에 마주한 99세의 인생이라니.


우스운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가슴을, 어깨를 쭉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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