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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e Oct 20. 2020

들어주소서 구질구질한 변명을

성신여대역 미소야 이모님에게 닿길


1. 나는야 스탠다드한 사회인 

통행량이 적거나 차선이 좁은 도로에선 가끔 무단횡단을 한다. 졀라 싫어하는 회사 동료를 신랄하게 뒷담하고 앞에선 안 그런 척하기도 한다. 잘못 구매한 물건을 뜯어보지 않은 척 다시 봉하고 교환한 적도 있다. 스스로를 윤리의식이 높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진 않는다. 그럼에도 전과가 없고, 밀린 국세나 지방세도 없으며(큰 금액이 과세될만한 자격이 없기도 함), 평범한 신용등급을 갖고 있는 나는, 사회망 안에서 적당한 준법 시민이라 생각한다.



2. 모든 게 꼬이는 날이란.

아침부터 마음 컨디션이 안 좋았다. 집중이 잘 안되고 초조했다. 월요일이라 그런 건가. 월경 전이라 그런 건가. 마침 사무실에 상사들이 거의 없는 타이밍이 있길래 혼자 스벅에 가서 돌체라떼와 스콘과 초콜릿을 플렉스하고 와서 와구와구 먹었다. 마음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그냥 점심시간까지 존버했다.


출근한 팀 인원이 적은 날이라, 기분 내자고 동료 A의 차를 타고 사무실에서 좀 먼 곳으로 식사를 하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일을 쳤다. 혼자만 바이크를 타고 간 동료 B의 핫초콜릿을 대신 들고 오다 그만 차의 직물 시트에 쏟아버린 것이다.... 차주인 동료 A는 너그럽고 털털한 편으로 연신 괜찮다 했지만 우유 베이스의 음료가 부직포에 스며들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나는지 뻔히 알기에 최선을 다해 클리닝을 했다. 시트를 물에 빨아 햇빛에 널고, 물티슈 40장을 써서 바닥을 훔치고. 대표님 방에 가서 다 본 신문을 얻어와 그 사이에 깔고. (대표님 신문 다 보셨나요? -신문은 왜? 제가 **님 차에 우유를 쏟아서요. -저런...) 그러고도 방향제를 선물해야 하는 건 아닐까. 오후 내내 혼이 나가 있었다.


앞의 이 모든 얘기를 길게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나올 스토리가 아침부터 맴돈 우주의 기운이 축적된 나비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3. 그냥 사정이 있었을 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교정 너드 5개월 차를 맞아 치과 정기 검진을 가는 날이었다. 5시 퇴근을 해서, 전철로 한 정거장만 이동한 후 저녁 식사를 하고 6시까지만 치과에 가면 되는 일정이기에 마음은 느긋했다. 실제로 시간이 여유 있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이었던 그 느긋함은 오전-오후의 나빴던 컨디션 때문에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서였을 거라 (지금 글을 쓰며 깨달아) 생각한다. (시간 감각을 못 갖고 태어났는데 후천척 학습에 의해 억지로 개발시켰고, 원래 갖고 있는 척 살아가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 여튼 업무 효율이 별로인 날이었던 것은 맞기에 평소엔 칼퇴가 습관임에도 굳이 15분 정도 야근을 했다. (같은 층 쓰는 이사님이 왜 퇴근 안 하냐고 물어왔다) 이미 하루치 너갱이는 다 써버려서 몸이 느려진 데다, 시간 감각까지 상실했기에 떠나는 전철을 뛰어서 잡지도 않고 대충 성신여대역에 내리니 5:36.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담? 이때부터 잠시 사라졌던 시간 감각이 돌아왔다. 진료를 받고 철사를 조이면 저녁 먹기가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에 서둘러 식당에 들어갔다. 치과 맞은편 퓨전 일식집으로.


재빠른 동작으로 코로나19 대비를 위한 방문자 명단을 작성하고 찌개류 메뉴를 시킨 후 창가 자리에 앉아 맞은편 치과를 노려보며 시간계획을 짰다. '식사가 42분에만 나와준다면 10분 만에 먹고 3분 안에 치과에 가서 5분은 양치질을 해야겠다. 이동 시간을 줄이려면 횡단보도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신호를 잘 보고 나가야겠다.'


식사는 43분경에 나왔고, 음식이 너무 뜨거워서 잘 먹히지 않았다. 이 와중에 스마트폰으로 유머 자료를 보던걸 멈출 수가 없어서 폰을 보며 식사를 하는데 불시에 감동 코드 게시물을 보게 되어 중간에 갑작스레 눈물이 좀 났다. 안 운 척 훌쩍 거리며 감정을 자제하느라 로드가 더 걸렸다. 시간은 어느새 훌쩍 50분을 넘겼고 식사를 반도 못 한 나는, 찌개의 잔재가 남은 치아로 진료를 받는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며 모든 건더기를 다 먹겠다는 목표를 급히 수정해서 밥만 대충 국물에 말아먹기 시작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는 꼴이 아주 산만했을게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양치질을 여기서 하고 갈까 치과에 가서 할까 고민을 하며 가게 화장실을 탐색하느라 홀을 죽 돌아보는데 서빙 이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느낌에 그렇게 산만했나 머쓱해하며, 전 필요한 게 없어요! 하는 눈빛으로 대응해준 뒤, 55분을 넘긴 시간을 확인하곤 급히 입을 닦고 마스크를 쓰고 가방을 들고 빠르게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10 발자국쯤 걸었을 때 이모님이 가게를 쫓아 나오며 외쳤다.


'손니임~ 계사안~'

헐! 사전 계산 아니었나. 정신이 번쩍! 어머나 세상에 하며 '사전 계산인 줄 알았어요!' 하고 빠르게 쫓아 들어가 카드를 내밀었다. 얼굴이 붉어져 '어머 사전 계산한 줄 알았어요. 제가 너무 급해서 정신이 없어서.'라고 다시 한번 얘기했지만 이모님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대놓고 혼내는 것도 아니고 유쾌하게 믿어주는 것도 아닌 그 사이에서. '아 늬예늬예. 변명됐고! 어쨌든 내가 잡았으니 계산하고 가.' (이 워딩을 쓰셨다는 건 아님) 대충 이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반응.


어쨌든 치과는 늦었으니 계산 후 다시 치과로 뛰어가는데. 식당에 들어선 뒤 보인 나의 모든 행동이 전략적인 무전취식자에 적합했던 것 같아서 점점 낯이 뜨거워졌다.


1) 애가 정신이 불안해 보임. 한 군데 집중을 못하고 산만하고 쫓기는 것처럼 보임.

2) 폰보다 갑자기 울었음. 뭔가 사연이 있음

3) 가게 밖이나 내부를 자꾸 두리번대며 눈치를 봄 

4) 뭔가에 쫓기듯이 빠르게 나감 (거의 도망)

5) 바로 튀어나온 사전 계산인 줄 알았어요 -> 걸렸을 때를 대비한 변명 같음

...

6) 심지어 오늘 옷도 회사원스럽지 않게 후리한 캐주얼.


내가 가게를 나간 뒤 일하는 아주머니들끼리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여기까지 상상하니 부끄러움 주머니는 펑! 폭발했다.


'좀 이상하더라니깐. 내가 유심히 봤잖아. 젊은 사람이 무전취식이 웬말이야.'



4. 저 준법 시민입니다. 

그래서 생각했다. 무전취식을 하게 되는 비참함과 계획적으로 무전취식을 하는 야비함. 일부로 전체를 매도당하는 억울함과 부분을 잘 보고 판단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 방어기제들.


결론은 의도적인 무전취식자로 보였을 수도 있다는 1g의 가능성이 너무 챙피하다. 이모님에게 진지하게 날 무전취식자로 생각하셨는지 묻고 싶다. 아무런 나쁜 뜻 없는 나의 행동들에 대해 구구절절 사연 있다며 변명하고 싶다. 그리고 '나 돈 있어요. 밥 사 먹을 돈 있어요. 저 준법 시민이에요.'라고 울며 잠이 든다. 뚀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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