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 속에 자꾸 ‘죽는다’는 생각이 나..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이란 제목의 책을 읽었다. 대학병원 간호사였던 작가가 숱하게 마주한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억지스러운 방식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 속 평범한 죽음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주제의 책을 아주 좋아한다. 이미 한 10 년도 더 전에 일본의 호스피스 병원 의사가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이란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고 서른 살 남짓의 새파란? 나이에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병사라면 어떤 병, 치료는 어디까지, 진통제 사용 여부, 여명은 집에서 혹은 호스피스에서..죽고 나서 장례는-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아주 세세하게 그려보기도 했다.
당시 고심 끝에 내린 결심은 의미없는 연명치료 중단, 장기기증 서약,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기.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집에서 죽고싶다는 거였다.
내 생의 마지막 나날에는 너무나 평범해서 소중한 줄 몰랐던 일상의 조각들을 나누고 싶다. 꺼져가는 숨결 사이로 봄의 흙내음을 킁킁거릴 수 있기를, 나무 그늘 아래로 불어오는 시원한 초여름의 바람을 맞고 바스락거리는 가을 낙엽 밟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어느 평범한 오후 집 앞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 가 이 생에서 내 귓가를 간지럽히는 마지막 소리이기를.
더불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눈 맞추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가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죽음은 오래 전부터 늘 내게 흥미로운 주제였다. 자연히 평소 즐기는 책이나 각종 콘텐츠들도 시한부, 자살, 존엄사, 범죄, 호스피스, 임사체험, 전생, 환생 등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다.
딱히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면서, 꽤 행복한 순간에도 늘 ‘이러다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머릿 속 한 켠에 하며 늘 죽음을 가까이 두었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라는 주제는 내 일상으로 더욱 성큼 다가왔다. 내가 나이드는 만큼 부모님도 늙으시고, 주변에 갑작스러운 혹은 예정된 죽음을 맞는 사람을 하나 둘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막상 쿨하게 죽는 건 어렵겠지? 최대한 회한과 후회를 덜 남기고 죽으려면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지, 어디에 삶의 가치를 둬야 하는 지 막막하고 궁금했다.
죽음을 놓고 부모님과도 오픈해 얘기해보려 시도한 적이 있다. 50대부터 아파서 큰 수술도 여러번 하고 그 이후 건강 때문에 삶에 제약이 많았던 아빠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길 싫어하시는 회피형이다. 하고 많은 좋은 얘기들 중 굳이 어둡고 칙칙한, 두렵기만 한 죽음을 화두로 올리는 것 자체가 싫다 하신다.
최근 몇 년 부쩍 조금만 컨디션이 안좋으면 확 예민해 지면서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닐까?’ 싶어 아주 우울해 하셔서 가족 모두 걱정이 많다. 너무 일찍 아프게 되어 진작 왜 건강을 관리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가득한 아빠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반면 몇 년 전 유방암 투병을 하셨고 최근 또 한 번 크게 아파서 병원신세를 지셨던 엄마는 이제 죽음 앞에서 한결 마음을 내려놓으신 것 같다. 아프기 전 건강 염려증이라 할 정도로 철저하게 본인을 챙겼던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고, 불면증과 원인 모를 복통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면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처음으로 실감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음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명은 재천이라며 이제는 미리 맘에 드는 영정사진을 찍고싶다, 갑자기 내가 어떻게 되면 금융관련 처리는 어떻게 해라 등등의 주제와 관련된 얘기를 자연히 꺼내신다.
요즘 여섯 살 아들의 장난끼가 거의 최고치를 찍고 있는데 아이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 ‘죽는다’는 거다. ‘죽는다’ ‘죽인다’는 말은 여섯 살 꼬마 머릿 속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금기어인가보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친구들과 die, kill 등의 단어를 쓰며 싸우기 놀이?를 하는거 같은데 잠들기 전에 내게 자주 고백하듯 ’엄마 나 자꾸 머릿속에 죽는다는 게 생각나‘ 라고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럴 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럴 수도 있지만 너무 자주 ‘죽는다’는 말을 쓰지는 말라는 정도로 대꾸하고 넘긴다. 아이가 죽음에 대해 너무 심각하거나 공포스럽게 여기지 않기를,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길 바라면서.
대부분 요가 수업의 마지막 단계는 사바사나로 끝난다. 산스크리트어 savasana는 우리말로 송장자세 혹은 시체자세라고 불리는데 각각 난이도나 스타일이 천차만별일 지라도 마지막 5분은 완전한 휴식과 이완의 자세로 불리는 사바사나로 끝난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 사바사나 때 스르륵 일어나서 주섬주섬 매트를 챙겨서 나가버리는 회원님들이 있다. 바쁜 일상을 쪼개서 요가를 하다보니 가만히 대자로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5분 여의 시간이 비생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사실 요가 수련의 꽃은 사바사나다. 한 시간 내내 매트 위에서 땀 뻘뻘 흘리며 모든 에너지를 불사르고 난 뒤 무념무상으로 죽은 듯 누워 숨을 고르는 시간. 이 시간이 있기에 한 시간의 요가 수련, 즉 삶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
memento mori, amor fati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싸이월드 시절 내 대문의 붙박이 문구였다.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지금의 내 삶에 더 감사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유난히 피가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내 모토였다.
생의 한 가운데서 아이러니하게 자주 죽음을 생각 할수록 지금의 순간이, 매일 보는 얼굴이, 맘에 안드는 나 자신의 모습이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불확실한 매일매일에서 가장 확실한 것,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는 ‘죽음’을 기억한다면 매일의 일상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요즘 흔한 말로 ‘현존’할 수 있다면 똑같은 매일을 더 간절하게 값지게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모두에게 끝이 정해져 있는 삶이라면,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우아한 투스텝으로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모두의 끝이 결국 죽음일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