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에 함몰된, 젊어서 슬픈 꼰대 꿈나무들을 만나고
나이 마흔 여덟.
난 흔히들 '꼰대력 최고치'라고 말하는 팀장~부장급 관리자이다.
하지만 동시에 꼰대력 만렙의 상사들에게 심한 알러지가 있는 다소, 아니 어쩌면 꽤 많이 시니컬한 중간관리자이기도 하다.
IMF에 처음 시작한 직장생활, 보험사에서 7년, 병원 재단에서 13년, 지방 대형치과병원에서 약 1년, IT기업에서 2년 6개월, 중소 웹에이전시에서 2년 6개월, 그리고 지금은 좀 이름난 웹에이전시로 이직해 5개월째 근무중이다. 오랜 기간동안 온오프라인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었고, 중간중간 시스템 및 웹사이트와 서비스 기획 업무를 주로 해왔고, 지금은 PM급의 전업 기획자가 되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문득 첫 직장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발령받은 본부의 본부장님이 신입사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교육중에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ㅇㅇ씨가 이 중에서 회사 젤 오래 다닐 것 같네.”
대학 때는 25년 정도 회사를 다니셨던 아버지가 너무 대단해 보였고, 나는 그렇게까지는 절대 못 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된걸까 어느덧 27년차 월급쟁이로 여전히 탈탈 털리며 ‘복무’중이다.
그 기나긴 시간들 중, 기억에 남는 안타까운 순간들이 좀 있어 얘기하고 싶어 처음 글을 쓴다.
때는 바야흐로 급작스레 방만한 경영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이 되어 급여까지 밀리기 시작한 IT기업을 가까스로 탈출해서 대충 찾아들어간 흔히 말하는 '좋소기업'에서 다들 어렵다는 코로나 시국에 어디라도 들어간 걸 다행으로 여기며 3개월간 마케팅 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말이 좋소기업이지 처남-매부 지간인 사장-부사장과 공장2명, 해외영업2명, 국내영업1명, 관리부2명, 홍보부4명이 전부인 소재 전문 제조 기업이었다. 그래도 업력 26년 꾸준히 흑자를 기록해왔고 연간 매출액도 50억을 기록해왔고 재정상태 건실한 기업이라는 점이 좋아보여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입사를 결정했었다.
성급했고 별 생각 없었다. 인정.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받느라 7개월을 고생하면서 뭘 더 알아보고 고민하는게 귀찮았었다.
그런데 정작 수습기간 3개월을 끝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을 마무리짓고 말았다
처음 얘기했던 근무 조건과 너무 다른 형태의 업무를 하면서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긴 했지만, 사실 지금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정작 다른 내용이다.
젊꼰 이야기.
이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반년 쯤 전 홍보팀으로 들어온 영상제작자를 빼고 거의 3~4년 이상 근무했다고 들었다. 일주일에 한번 출근하는 사장을 대신해 회사를 총괄 관리하는 부사장이 표면적으로는 해외영업 부서장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해외영업부가 회사의 중심인 다소 특이한 구조였다. 그러다보니 해외영업부의 여직원, 오랜시간 부사장과 손발을 맞춰온 영업과장이 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인 모양새였다.
'Alkaline Pouch'.
무엇이 떠오르는가?
미국에서는 "tea bag"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며 미국 유학 시절 기억을 꺼내놓던 어린 그녀 말에 나는 좀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 제품을 팔려면 검색에 걸리는것도 중요하지만, 검색되는 수많은 제품들 사이에서 단연 뇌리에 남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브랜딩이라는 거니까. 검색에 걸리는 건 키워드나 태그 설정을 신경써서 하고 제품 설명을 눈에 쏙 들어오게 잘 하는 걸로 충분했다.
애플 이어폰, 애플 핸드폰, 애플 노트북....이런 직관적인 단어를 쓸 수 있음에도 애플은 에어팟, 아이폰, 맥북이라 이름 붙였다. 스티브잡스는 인사이트가 없어 제품명을 따로 가져가지 않았을 것.
차라리 회사 이름을 적절히 버무린 "ㅇㅇㅇㅇㅇ 미네랄워터 파우치"만 됐어도 그냥 가보자고 했을 것 같다. 적어도 회사명을 눈에 띄게라도 했을테니까. 그런데 그냥 딸랑 Alkaline Pouch라니.
구글이나 아마존에서 Alkaline Pouch로 검색되는 검색결과만 좀 들여다봤으면 눈치챘을 것이다. 타사의 경우 ph-on-the-go나 ph fuser, alkaline anytime, gofiltr등의 제품명으로 시선을 끌면서 alkaline pouch로 검색하면 최상단에 뜨는 전략을 택했다. 국내에서도 커머스 좀 한다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식으로 검색광고를 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부사장님이 그녀가 맡은 아마존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고, 내가 마침 마케팅 부장으로 처음 근무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업무에 가이드를 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제품 디자이너와 함께 관련 업무 미팅을 했다. 당장 그 이름으로 제품 디자인을 들어가자고 하는 그녀에게, 하루 정도만 이름을 더 고민해보고 마땅한게 생각나지 않으면 그땐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하고 회의를 마쳤다. 브랜드명만 들어도 어떤 제품인지 딱 짐작이 가고, 한 번 들으면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 그런 이름에 시선을 끄는 디자인이 더해졌으면 좋겠다고 내 의도를 설명했다. 혹여나 그녀가 갑자기 자기 일을 빼앗기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해할까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했고 그녀도 분명 알겠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절차가 맘에 들지 않았나보다. 담당자인 저 혼자 진행하고 그 과실이 크던 작던 그것조차 혼자 따먹고 싶었던 것일까. 회의 땐 알겠다고 해놓고, 돌아서서 부사장 자리로 가 수근수근 뭐라 말하는 순간까지도 난 회의 결과를 보고하는 줄로만 알았고, 내일 회의가 끝나면 결과를 보고해야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사장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그냥 Alkaline Pouch로 해요~"
...???!!!
일에서 한 발 물러서있던 부사장이 갑자기 내 자리로 와서 그녀가 회의시간에 말했던 부분을 똑같이 읊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피가 꺼꾸로 솟았고 왜 그런 결정을 하시는건지 궁금해 부사장에게 조용히 면담을 요청했다. 이러저러해서 내일 회의끝에 제품명을 정하고 일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고 하니 그랬냐,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눈을 똥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그녀를 불러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제가 지금까지 아마존 판매 진행했던 담당자잖아요.
그래서 이 일을 빨리 진행해서 제품을 빨리 판매하고 싶었어요
그녀가 의욕적으로 일을 진행하려던 것이 기특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오늘 내일 판매를 시작하지 않으면 매출에 손해가 있을리도 만무했기 때문에 의욕적인 그녀에게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고 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둘러대는 해외영업부 말단 여직원의 당돌함이 대단해 보이기도, 건방져 보이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아무 의견 없이 있는둥 없는둥 한 친구들보다 똑부러지게 자기 의견 말하고 관철시켜나가는 힘이 있는 직원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또 물었다.
"우리가 회의를 통해 어떻게 일을 진행하기로 했는지 부사장님한테 보고드렸는데, 그 말을 듣고도 그냥 예전처럼 진행하자고 하시던가요?"
"당연히 말씀 드렸고 그냥 전처럼 진행해달라 하셨어요"
"부사장님은 그런 보고 못 들으셨다고 했는데, 그럼 부사장님이 거짓말을 하신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거짓말.
이 친구의 말에 거짓이 없었다면 되바라지고 건방지다는 생각은 애초에 치워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더해지는 거짓말이 소름끼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마존 판매, 그래 니가 담당했었지.
그래서 매출 얼마였니?
왜 그것밖에 안되었을거라 생각하니?
검색해도 안 나오고, 제목에는 특색 없고, 기억에 안남고.
그러니까 상세페이지 클릭도 없고, 제품 상세 클릭 한다 해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결국 장바구니에 안 집어넣고 다른 제품 산다고 이탈는거 몰랐니?
해외 주문건 처리하고 송장업무하고...그런거 니가 했었지만 마케팅과 디자인은 해본 적 없잖아?
그리고 고작 하루 빨리 일이 추진된다고 매출이 급상승이라도 한다니?
아니 그런거 다 떠나서, 남의 얘기 한번 좀 들어볼 순 없었니?
넌 협업이 뭔지 모르니?
머리가 하나인 것 보단 셋이 낫잖아?
의견을 모아보고 더 좋은걸 찾아보자는게 그렇게 아니꼬왔니?
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그 친구도 조사 없는 자신의 섣부른 주장이 생각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대로 하기로 하고 자리에 앉으니 옆 자리 앉은 과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토닥토닥"
순간 씁쓸해졌다. 여기도...모두가 마케팅 전문가인 그런 곳인가?
그렇다면 전공자는 아니지만 홍보마케팅 업무만 20년 가까이 한 경력직 마케팅 부장을 왜 뽑은걸까?
입사한지 한 달 갓 넘어 초고속으로 사직서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앞으로의 일이 불보듯 뻔하게 그려졌기 떄문. 권력을 잡은(?) 기득권 젊꼰들과는 그 뒤로도 몇 가지 일들이 더 있었고, 결국 3개월만에 사직서를 내고 업을 변경해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때 쌔~했던 그 느낌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뒷목을 잡게 한다.
그리고...이건 후담인데.
그 뒤로 그 여직원은 매출도 지지부진하고, 송장 처리를 잘못해 해외 수출건에 큰 사고가 있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사했다고 한다.
Latte is horse~
꼰대어르신들을 비꼬는 농담들이 많이 회자된다.
사실 나도 일할 때 마다 느끼는건데 세상엔 말이란게 통하지 않는 꼰대들이 정말 많긴 하다. 다른 직군과 다르게 마케팅이나 디자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각자의 취향과 생각이 있기 때문에 유독 참 많은 간섭과 참견에 시달리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잘 모르면 왜 더 용감한걸까. 참 쉽게들 내뱉고 훈수 두고 한다. 나도 답답한데 젊은 친구들은 얼마나 더 답답할까.
그래서 오랫동안 마케팅을 해온 나도 내 의견이나 경험이 좀 올드할 수 있다는 생각과 혹시나 내 별 뜻 없는 말과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젊은 친구들에게 내 의견을 말할때는 두 번 세 번 거르고 조심스럽게 말하게 된다. 하지만 늙수그레한 꼰대짓에 알러지가 있는데다가 의식적으로 그런 언행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조차도 가끔씩 불쑥불쑥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스스로의 꼰스러움에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그렇게 나이는 어쩔 수 없는건가 하고 자괴감이 들다가도 정작 내게 더 놀라운 것은 어린 실무자들 중에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감이 지나쳐 꼰대적 언행을 하곤 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
늙은 꼰대는 쌓아둔 경험치라도 많아 어떤 일에는 좀 더 다양한 변수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라도 알고는 있는데, 경험이나 데이터가 적은데 비해 책임감만 괴물처럼 커져버린 젊꼰은 자신이 아는 적은 데이터가 전부라도 되는 듯 고집을 부릴때가 많고, 그 땐 정말 답도 없었다. 다른 의견이나 설득의 노력엔 무조건 반감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만을 거듭 반복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돌아서서 뒷담화로 응수하는, 그게 아니면 결국 일은 자신있게 저지르지만, 예상과 다른 결과가 발생하면 상사의 뒤에 숨어 책임지지 않는 미성숙한 태도를 보이고 마는 젊꼰과 함께 일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꼰대. GGONDAE.
이제 영어로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는, 어감 안 좋은 그 한국말 단어.
꼰대의 모습을 보이는 어른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살아온 세월 때문에 왠지 짠한 느낌이 드는데, 고집불통의 꽉 막힌 젊꼰은 왠지 진심 그렇게 슬플수가 없다. 편견 없고 생기 넘치고 자유롭고 창의적이어야 할 젊은이가 나이 자실대로 자신 어르신처럼 생각이 굳어 완고해진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날 때부터 성품이 그런건지,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건지, 그도 아니면 삶이 척박해 그렇게 변해버린건지, 일에 대해 낮아진 자존감을 꼰대력으로 방어하려는건지... 이런 저런 의문을 갖다보면, 또 한 편으로는 나이가 들면 당연히 꼰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논리조차 폭력적이고 꼰대적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자꾸 스스로에게 "방금 그 말, 넘 꼰대같았나?...꼰대는 되지 말아야는데..." 라고 되뇌일 때가 많아졌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고서 돌아서서 급 후회하는 일도 생겨났다. 가끔은 집에 가서 혼자 이불킥하며 땅을 치고 후회도 한다. 꼰대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이미지가 거부감도 거부감이지만 혹시나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게 아닌, 우스꽝스러운 조롱의 대상으로 비춰지는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은근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보수적 사고가 꼭 꼰대스러운 것을 말하진 않는 것 같다. 보수적이고 개방적인 것은 성향이나 사고 방식의 차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고 회피만 하는 보수적 성향은 꼰대로 가는 지름길인 것 같다.
어쩌면 꼰대의 시작은...
꼰대력 충전이 시작된다고 회자되는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나
조직에서 업무를 지시하고 다독이고 꾸중하게 되는 관리자 '직급'이 아니라
내 생각에 같혀 다른 아무것도 받아들이고 시도하지 못하는 태도부터가 아닐까?
어...? 저거 좀 새롭네? 난 이게 더 좋지만, 저것도 나쁘진 않네?
저 사람은 저걸 좋아하네? 재미있다. 저럴 수도 있구나.
얘기해보고 싶다. 나도 저런 경험 해보고 싶다!
늘상 이런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꼰대력 충전은 비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죽을 때 까지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아야겠다고 되뇌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