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대잔치입니다.
1. 이렇게 습하고 선선한 밤이 되면 편의점 앞 회색(혹은 파란색) 의자가 생각난다. 대학원생 때 버스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이 의자에 도란도란 앉아 랩실 친구들과 4캔 만원 맥주와, 소주를 사서 소맥을 만들어 마시며 소소하지만.. 무거운 이야기를 했던 그 공기가 아직도 느껴진다. 8월 말 그리고 9월 초, 우린 항상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 고민의 8할은 졸업 가능 여부였다) 이 주제를 가지고 우린 새벽까지도 열띤 토론을 펼쳤다. 다행스럽게도 우린 다 제 때 졸업했고 멋진 사회인이 되었지만 졸업 후에도 만날 때마다 아직도 우린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하나 바뀐 건 있다. 회색의자가 아닌, 습함을 모르는 에어컨 밑 의자.
2. 원래는 감정 소모를 할 수 있는 책(혹은 영상)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인데 요 근래 책을 보지 못했다. 있는 시간을 쪼개 오늘 오랜만에 퇴근 후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고 지금 이미 눈이 팅팅 부운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속 시원하지 않은 거 보면 덜 울었나 보다.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찝찝하다. 아 난 우는걸 왜 이렇게 좋아하지?
3. 나는 정말 고집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답은 '아~ 모르겠다'였다. 어디를 가든 고집이 있는 편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내가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적은 없는 것 같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땐 내가 좀 그랬지 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고집을 부렸던 적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집일 수도.
4. 요즘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 이 전에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자 했는데 요즘은 '생각'이라는 거 자체를 잘 안 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은 발설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글도 하나의 발설이다.
5. 이전에 '프로페셔널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전 회사 사람들과 한번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 사무실에 인형을 가져다 둔 동료의 모습을 보고 리더가 '그건 너무 언 프로페셔널한 행동이에요'라고 이야기한 걸 들어 시작된 토론이었다. 그리고 내린 정의 중 하나는 인형의 유무는 프로페셔널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우린 아직'이었다. 그때 당시 이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업무를 떠난 우리는 다 언프로패셔널하다! 우린 귀여우니까! 의 결론이 났던 것 같은데, 2년 전 이야기지만 난 아직도 언프로패셔널 하다. 낄낄 난 아직 귀여우니까.
6. 점점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 이전에는 '그럴 수도 있지'가 입에 붙었다면 요즘은 '그럴 수도 있는 건가?'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큰일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어간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인형은 귀엽다.)
7.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앞으로도 할 거지만) 제일 어려웠던 건 '사람'이다. 그만큼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하다가도, 왜 이렇게 어렵지?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나오는 모든 결론은 '아직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라는 답이 나온다. 사실 나는 '저는 낯가려요'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아닌가 싶다. 낯가리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항상 흥미로워하고 또 그만큼 새로운 사람이 나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동안 최대한의 긴장을 한다. 그래서 사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서 집에 가면 지친다기보단 근육통이 심할 때도 있다. 이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거 보면 나는 전생에 강아지였나 보다. 멍멍.
8. 어제 냉장고가 고장 났다. 집에 도착해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동안 냉동실에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음식들이 이미 다 녹아서 상해있었다. 물건 하나에도 정 붙이는 나였기 때문에 고장 난 냉장고에게 화를 내면서 쓰레기를 처리했다. 냉장고에 가장 오래 잠들어있던 나의 추억은 2017년 노르웨이의 추억이었고 이 추억을 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그냥 버렸다.(사실 이게 있는지도 몰랐다.) 냉장고를 깨끗하게 비우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나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고 (집 도착 전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내가 2023년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냉장고가 고장 난, 그리고 고장 난 냉장고 때문에 내 소중한 추억을 다 버린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 (흑흑 기사님 빨리 와주세요) 사람의 행복이 이렇게 확확 바뀔 수 있다니. 인생... 쉽지 않다.
9. 저번주 주말, 갑자기 '거실 인테리어를 다 바꿔버리자'라는 마음을 먹고 거실에 있던 소파와 책상을 다 나눔 했다. 처음 한국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사용한 가구였고 해당 가구를 잘 사용하지 않아 이 가구 언제 버리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눔 해버리니 넓어진 거실만큼 내 마음이 뻥 뚫린 것 같다. 소파와 책상을 받아간 분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셔서 기분은 좋아졌지만 그 가구들을 쓰고 나서 다 좋은 일 밖에 없었던 것 같아 보고 싶기도 하다. 아 새로 산 식탁은 언제 오지?
10. 회고를 할 때마다 자책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젠 그 습관이 좀 없어지고 있다. 이 전 회사에서는 '회고'가 일에 대한 회고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걸 잘못했고 이걸 잘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직한 후 처음했던 회고는 '아 나 이거 잘못했고 다음부턴 안 그러겠습니다ㅠ'의 회고였던 것 같은데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자책보다는 '이걸 하면서 이렇게 느꼈으니 조심하세요~'라는 느낌으로 회고를 하고 있다. (사실 회고 때 아주 크게 감정적 부분 배제!!라고 써놓고 진행한다.) 회고를 하면서 느끼는 건 사람은 노력하면 변하는구나? 를 제일 많이 느낀다.
1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를 좋아한다. 아! 다시 이야기하면 난 몰입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서 칙센트미하이도 좋아한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을 좋아하는 만큼 어찌어찌 논문까지 몰입 이론을 꽉꽉 욱여넣었다. (Lab실 내 레전드 석사논문 page 수를 가지고 있다.) 칙센트미하이를 좋아했던 이유는 칙센트미하이가 행복의 근원은 돈이 아닌 '몰입'상태에 도달하는 경지가 행복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누가 돈주면 더 행복할 것 같긴 하다. 남의 돈 최고) 난 아직 몰입상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업무를 다하고 한 번씩 '어 나는 몰입했고 이 때문에 만족감을 얻었다'를 느낄 때가 있다. 이 기분을 느껴서 아직까지 데이터라는 거에 흥미를 느낀다. Binge-watching이 무서운 것처럼 Binge-data도 무섭다. 덜덜. 힘들면서 왜 좋아하지?
12.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 브런치는 공개 브런치이기 때문에(그렇다고 많이 보는 건 아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이어서 그런지 내 모든 속내를 보여주기가 꺼려진다. 아예 만취해서 술을 쓰면 내 속내를 다 보여줄 수 있을까? 하다가도 진짜 헛소리를 할 것 같아 자제한다.
13. 나이를 먹어가는 게 실감이 안 난다. 동생과는 암묵적으로 생일마다 나이에 맞게 용돈을 주곤 한다. 이번 연도에도 내 나이에 맞춰 동생에게 용돈을 받았지만 받으면서도 '잘 못 보냈는데? 후후' 하며 받았다. 이후 너 잘못 보냈더라~ 이야기를 하고... 다친 건 역시나 나였다. 하 아직 나는 20대인데. 언제 이렇게 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