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by 진희
열 네 살을 돌이켜본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시절. 나는 어떻게 지냈을까.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는 깜깜한 시기다.
우리는 네 남매이고 나이 터울도 많다.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내 밑에는 초등학교 5학년, 일곱 살, 다섯 살 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어린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내 도시락을 싸느라 바빴겠다.
내 마음이 검정색도 아니고 새까만 칠흑 속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마는 더했겠지. 하지만 내 마음이 너무 힘드니, 엄마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 때 친구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학교 가는 길의 느낌, 향기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엄격했고, 나는 엄마의 성에 차지 않는 아이였다.
엄마를 한 번도 거슬러 본 적 없는 숫기 없는 아이였고 학교 다니는 내내 말도 없고 조용한, 공부를 좀 하는, 있는지도 모를 아이였다.
어떤 것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채로 나이가 들어가면,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나는 자신의 색이 확실한 친구가 불편한, 투명한 아이였다.
엄마는 내가 친구와 노닥거리는 시간조차 아까워,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요리는 엄마의 주특기였다. 졸업식 날 빼고는 단 한 번도 외식한 기억이 없다. 그러니, 길거리 떡볶이 같은건 엄마에게 돈낭비이자 청결하지 못한 음식, 그리고 걸어다니며 먹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 떡볶이 컵을 들고 친구와 노닥거리거나 달고나 파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설탕에 거품이 나며 점점 굳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아주 나쁜 일이라고 배웠기에, 그런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보다는, 다른 세계 아이들이라고, 나는 배운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안한다고, 나는 나를 특별한 구획 속으로 몰아 넣었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100원 동전 하나조차 없었고, 티비를 보면 혼났다. 다른 친구들끼리 연예인 이야기를 하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였고, 학교 끝나고 바로 집에 오지 않으면 어디를 다녀 온건지 추궁당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엄마는 문제집을 들고 오라고 말하며 계란 후라이를 책상 위에 올리고 내 앞에 앉았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엄마 눈에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딸래미였다. 그 답답함을 주먹에 담아, 답지의 답이 틀릴 때마다 머리로 날리며 폭언을 쏟아부었다.
엄마는 너무 똑똑해서 완벽해 보였다.
동시에 나는 엄마가 미웠다.
절대 엄마를 넘어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엄마의 틀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달랐다.
동시에 감히, 엄마에게 불만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다 잘못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어린 동생도 다 미뤄놓고 내 공부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데도
1등을 못하는 바보 천치.
내가 피할 유일한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미술학원이었다.
다행히(!) 엄마가 못하는 것도 있었는데, 예체능 분야였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과 음악을 공들여 가르쳤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 스토리를 붙여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피아노도 좋았다.
미술학원에서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등학교 6년간 학교 대표로 그림을 그리고 대회에 참가했다. 그림을 그리는 건 내 삶의 일부였고, 얘는 미대에 보낼거야, 라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성적이 떨어지자, 엄마는 학원을 모두 그만두게 했다. 공부나 하라고 했다.
열 네 살 때였다.
그림은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기에, 절망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음을 받아들이면서 엄마를 수없이 원망하고 원망했다. 원망을 안고, 열 네 살 아이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변에 걸리는 게 많아 여러번 시도하다가 그만두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이제 막 돌 된 아이를 이모님께 맡기고 일 주일에 한 번씩 그림을 그리러 갔다. 곧 감을 잡았고 잘 그렸다. 이렇게 즐겁다니! 잘 하잖아, 나!
죽은 줄 알았던 재능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학교를 다시 가볼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자 원망은 더욱 깊어졌다.
엄마가 그 때 그림을 계속 가르쳐 주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미대를 갔을거야. 이렇게 먼 길 돌지 않고 즐거운 일을 했겠지. 어린 동생들이 있는 상황이었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어차피 공부가 내 길이 아니었다면, 잘하는 걸 시켜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분노가 일었다.
그러다 인스타로 알게 된 <안 솔> 작가님의 원데이 클래스가 있다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작가님은 비전공자였다. 비전공자가 여행을 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어 책을 썼다. 그 스토리가 알고 싶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작가님은 말했다.
"저는 그림을 전공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끄적거리곤 했어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 보면, 꼭 그리고 싶게 생긴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그러면 그 특징을 메모지에 그려 친구들과 키득거리곤 했지요."
그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꼭 그리고 싶은 선생님이 내겐 없었다는 것.
메모지에 그림을 그린 적이, 나는 없었다는 것.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나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거였다.
입시생들이 그리는 풍경화나 정물화를 배워서 그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그렸을 때만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라 믿었으며, 그들을 넘어서는 길은 입시 과정을 거쳐 미대에 입학하고 그들이 밟은 길을 똑같이 갈 때에만 가능하다 믿고 살았다.
엄마는 그런 유일한 길을 가위로 싹둑 잘랐고, 나는 엄마때문에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길이 있었다니!
이젤을 펴고 대가의 그림을 따라 그릴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니.
그림을 도구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저 좋은 거였다면, 메모지에 사람을 그려볼 수도 있는 거였구나. 하는 걸 처음 깨달았다. 미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학원을 가지 못했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존재했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화실에 다니는 것과 별개로, 나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매일매일 밤새서 그림을 그렸다.
오늘은 뭘 그리지? 하며 찾는 과정부터 나만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어느새, 그림은 쌓여갔고 내게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때쯤은 선생님이 내 그림에 손대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져, 다 그려가고 스케치만 화실에서 하곤 했다. 그리고 1년만에, 선생님과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지금은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긴 길을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 때 계속 학원을 다녀 미대를 졸업했다면, 나는 미술 분야에서 기득권에 속했을 것이다.
정해진 길이 아닌 길은 '정통'이 아니라 치부했을 것이며, 나 역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길은 무릇 미술 뿐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대한 생각으로 굳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성공한 길을 잘 따라가는 것만이 옳은 길이며, 기득권이 되는 길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은 너무 좁은 시야였다.
나는 지금 나만의 작품을 만든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수없이 겪다보니, 어느새 노하우가 쌓였다. 그 모든 과정은 내 안에 '결정'할 수 있는 힘, 단단한 내면이 되었다.
나는 여건이 안 돼, 라고 생각했던 열 네 살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다 하게 된단다.
게다가, 지금도 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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