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체능 커리어는 왜, 어떻게 창업으로 이어질까
“왜?” 질문해 혼났지만 그 덕에 얻은 3가지 깨달음
무작정 간 영국서 우여곡절 끝에 찾은 ‘진로 변경’
공간 기획자로 입사하면서 겪은 방황의 시간들
모두 내려놓으니 보인 다음 선택지 : 사운드배스
아웃트로 : 10년 뒤에 칭찬할 만한 오늘을 살려면
스텔러스가 인터뷰하는 이야기꾼, 스토리텔러들은 다들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나다움을 헤아리고 ‘나다운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기나긴 인생을 행복하고도 균형감 있게 살 수 있다고 몸소 보여줍니다.
그렇게 나다움을 찾아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 사람, 그 삶의 이야기 3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연희동에서 무릉이라는 사운드 테라피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박시현 대표 님입니다.
무릉은 ‘사운드를 통해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선물하는’ 브랜드인데요. 시현 님이 직접 선정한 3가지 차를 마시면서 싱잉볼 명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적인 쉼을 연구한다”는 소개 문구가 눈길을 끄는 곳입니다.
이런 시현 님은 원래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8살 무렵부터 20대가 되기까지 가야금을 연주하다가 완전히 다른 경로를 선택한, 색다른 이력을 가진 인물이죠.
시현 님의 삶 이야기에도 ‘나다움’에 대한 관찰이 가득합니다. 가야금 연주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가 사운드 테라피라는 길을 선택해 나다움으로 돌아오기까지, 굽이마다 고민과 의사결정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어요. 조바심으로 인해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방황하다가 모두 내려놓는 쉼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 결정의 순간과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 없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무언가 비어있다는 공허감을 느끼는 것. “바쁘다는 건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산다는 뜻”이라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어떻게 나의 리듬에 맞춰 살아갈지 고민해볼 일입니다.
오늘 스텔러스가 담은 시현 님의 이야기, 그 끝에 달린 삶의 단서들이 여러분께 좋은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 글은 2024년 9월 19일에 발행된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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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은 윌니스 스튜디오를 운영하시지만, 원래는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가야금 연주자로 커리어를 시작하셨을까요?
악기는 초등학교 2학년, 만 나이로 6살 때 시작했어요.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 가야금반이 있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름 풍경이 너무 신기하고 뇌리에 남았어요. 아직 가야금 반에 들어가기엔 어린 나이였음에도 ‘진짜 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놀랍게도 어머니께서 덜컥 가야금 악기를 사주셨어요. 당시 저희 집 형편이 그리 부유하지 않았음에도 선뜻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가야금을 배울 수 있었어요.
이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예고를 갈지 기로에 섰어요. 집에서는 난색을 표했어요. 아무래도 부모님 입장에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레슨 선생님이 저를 서울에 데려가 공연을 보여주셨고, 저는 완전히 매료됐어요. 꼭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가야금을 계속 배울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대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재수를 했어요. 이때부터 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Q. 에고. 대학 진학이 쉽지 않으셨네요.
사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저는 연주자의 길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졸업 후 악단에 들어갈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죠.
다시 말하면, 타고난 재능을 갖은 친구들에 비해 한 끗이 부족하다는 걸 누구보다 제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체능인에게는 일종의 독기, 혹은 연습량으로 채워지지 않는 재능의 영역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단지 기술로 채울 수 없는, 어떤 ‘한의 정서’가 저에게 없다는 걸 느끼니 답답했어요.
‘내 인생은 너무 평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인생이 송두리째 막 굴러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부터 공연 기획, 예술 경영에 관심을 갖으며 기획자의 길을 꿈꾸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나는 연주자보다 기획자가 맞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기도 했죠.
Q. 당시 시현 님에게는 평생 해왔던 연주가 아니라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게 참 막막했을 것 같네요.
마냥 악기 연주를 하기 싫어서 멀리하기도 했어요. (재밌게도) 그 와중에 대학교 동기들과 국악 팀을 만들어서 제가 기획까지 맡는 데 더 열정을 쏟았답니다.
Q. 독특하네요. 빠르게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셨어요.
당시에 퓨전 국악이 붐을 타기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팀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연주 합을 맞춰 퓨전 국악 공연을 시도하기로 마음 먹었던 거죠.
당시에 소위 ‘돈 버는 맛’을 알았어요. 너무 재밌더라고요. 언니들한테 연주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내서 기획사 사장님들과 직접 협상도 하고, 가격 정해지는대로 악기는 제 차에 싣고 친구들을 택시 태워서 공연장으로 향하는 식으로 열심히 활동했어요.
당시에 라이브 공연까지 할 수 있는 팀이 많지 않다 보니 앙드레김 패션쇼 같이 크고 화려한 곳에서 직접 연주 공연을 하는 경험을 많이 했답니다.
Q. 다시 가야금 연주에 주력할 마음은 아예 없었을까요?
그냥 악기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밤새서 연습해 무대에 서는 것, 그 무대를 성사시키는 과정이 훨씬 재밌었어요. 정해진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무언가 창의적으로 시도하는 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애초에 저는 ‘왜’라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어요. 특히 입시 음악에서는 정해진 정답에 맞게 연주하면 되는데, 저는 거기에 반발심이 일었던 것 같아요. 왜 전통을 답습해야 하는지, 입시곡만 반복해서 연습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았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연주자의 기량을 만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연습이었는데, 그 누구도 이걸 명쾌하게 설명해준 어른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문이 들고 질문을 꺼냈다가 선생님들께 혼나기도 했답니다.
대학 때도 ‘그냥 해야 한다’는 데 의문을 던졌다가 난처해지기도 했어요. 보통 대학교에서 1년에 한 번씩 예술제를 준비하는데, 빡세게 연습하는 와중에 선배들의 ‘집합’에도 응해야 했어요. 후배 기강을 잡는다는 목적이었죠. 연습해도 모자란 시간을 그렇게 쓰는 게 이해가 안 가서 따져 물었다가 제가 속한 학년 전체가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Q. 아이고… 여러모로 곤란하셨겠어요.
하지만 반대로 저희 동기끼리 결속력이 생겼어요. 제가 국악 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동기끼리 친해졌기 때문이었어요.
Q. 새옹지마 같네요. 어쩌면 ‘왜’라는 질문이 전에 없던 가능성을 실현해준 셈이에요.
국악 팀으로 활동할 때도 수익을 공평하게 N분의 1로 나눠서 가졌어요. 공연 기획 및 팀 운영을 하는 사람은 “뽀찌”(딴돈의 일정량을 다른 사람에게 팁으로 돌려주는 것)를 받는 게 공공연했는데요. 저는 그런 걸 몰랐고,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어요. 도리어 투명하게 수익을 나눠 가지니 팀 결속력이 더 좋아지면서 미친듯이 연습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집요하게 한 박 한 박 맞춰가면서 연주 연습을 하니까 저희 팀 연주 합이 진짜 좋았어요. 서로 고개 한 번 까딱하면 바로 연주가 맞춰질 정도로, 집에 안 가고 연습했거든요. 그렇게 꾸준함이 빚어낸 탁월함, 조화로움 덕분에 여러 공연에서 저희 팀을 찾아주셨어요. 결국 탁월함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구나, 이 경험을 통해 명쾌하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Q. 시현 님의 10대, 20대 시절을 들으니 “버릴 경험이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듯합니다.
맞아요. 저도 ‘작은 경험이 쌓여야 큰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주변 친구들은 지금의 제가 ‘어떻게 창업을 할 수 있어?’라고 신기해하지만, 저에겐 마냥 어렵진 않았어요. 대학생 때 (사업자등록을 안 했을 뿐이지) 팀을 꾸리고 공연 기획을 하면서 사실상 사업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을 경험했으니까요.
성과를 함께 공유해야 팀을 끈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얻은 탁월함이 기회를 만든다는 것도 모두 지금까지 도움이 되는 경험이에요.
Q. 대학생 때 훨훨 날아다니셨던 시현 님도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으셨을 듯해요. 그때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당시 대학원 준비를 하며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당시 선생님께선 저한테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했죠. 너는 다른 애들보다 학벌이 좋지 않으니 성공 못 할 것이다, 진흙탕 밭에서 시작했으니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해서 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헌데 제 생각은 달랐어요.
내가 진흙탕 밭에서 발걸음을 시작했다면 그 땅을 내가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을 벗어나서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통해 접했던, 훨씬 더 넓고 큰 세상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있었는데, 막상 악기 연습을 하느라 한 번도 긴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침 이러한 바람이 켜켜이 쌓일 때쯤 동남아시아로 3개월간 배낭 여행을 갈 기회가 생기면서 제 시야가 바뀌었어요.
Q. 시현 님의 시야가 여행을 통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그때 제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어요. 그런데 긴 여행을 갔으니 뼈저리게 깨달은 거예요. 언어를 알아야 내 세상이 커지겠구나.
그래서 어학연수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호주 비자까지 다 받아 놨어요. 헌데 이번에는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지금까지 쭉 악기 공부를 시켰는데 갑자기 20대 중후반에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니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미국 유학’으로 어떻게든 절충안을 마련했는데, 이번에는 뉴욕에 체류하는 비자가 거절되면서 난항을 겪었어요.
그래서 결국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영국 유학을 꿈꿨던 건 아니었지만, 면학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어학원 대다수에서 영국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다녀서였는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게 됐어요. 사실 엄마는 크게 반대하셨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Q.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런던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유학을 준비할 때부터 '워릭대학원이 아니면 안 간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예전부터 막연하게 ‘예술 경영, 기획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실제로 공연 기획을 하면서 한 예술경영지원센터 웹진을 즐겨 읽었는데요. 거기서 제가 눈여겨본 기고자 이름 옆에 ‘워릭대학교 문화경영 전공’이라고 딱 써 있었거든요.
헌데 신기하게도 워릭대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하게 됐어요 제가 워릭대학교를 지망한다는 걸 알게 된 친구가 그 학교에 다니는 다른 친구를 소개해줬는데, 마침 그 친구가 문화경영 전공이었어요. 한참 제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듣더니 그러더라고요.
‘너 이 과랑 안 맞을 것 같아.’
대신에 같은 대학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엔터프라이즈’(미디어 예술 창업) 과의 담당 교수님을 만나보라고 조언해줬어요. 학교 지원자들이 참석할 수 있는 오픈데이 때 런던에서 1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서 문화경영 대학이 아니라 예술 창업 학과에 방문했고, (영어를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 학과 특유의 바이브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Q. 갑자기 과를 바꿔야 했지만, 생각보다 결단이 수월하셨겠어요.
물론 영어 성적을 끌어올려서 입학 요건에 맞추는 게 참 쉽지 않았어요. 언어 공부를 빡세게 해본 적이 없으니 진짜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영국에서만큼은 진흙탕 밭에서 시작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있었어요. 대입 때 제대로 노력하지 않아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했다는 아쉬움이 컸으니까요.
결국 1년 가까이 영어 시험을 치르고 또 치러서 입학 직전에 점수를 만들 수 있었어요. 9월 입학이 확정된 후에도 3~4개월 미리 학교에 가서 논문 쓰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죠.
Q. 간절함이 컸네요. 첫 수업은 어떠셨나요?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쇼킹했던 기억이
Q. 우여곡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네요ㅎㅎㅎ
심지어 교수님이 30분간 발제를 하시고서 나머지 시간에는 토론을 하는 수업 위주였어요. 엄청 힘들었어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교수님께서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1대1 면담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한국 애들은 A+ 못 받으면 죽는 줄 알더라. 하지만 네가 영어 못 하는 거 다들 알고 있다, 첫 학기에는 일단 통과하는 데 집중하면서 포기하지 말아라.’
무엇보다 제게 너무 와닿았던 조언은 “과정을 견디는 것이 창의성의 핵심”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동안 저는 (아무리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해도) 항상 남들과 비교 당하면서 ‘과정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여겨져 왔어요.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어요. 헌데 교수님의 저 조언이 제 인생의 관점을 바꿔줬어요.
가이드를 주지만 답을 가르치진 않는 방식도 크게 와닿았어요. 가령 인턴십을 하더라도 담당자가 인턴을 인턴으로만 대하지 않았어요.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언가를 만들어 봐. 하지만 그건 우리가 정해주지 않아.’ 주어진 목적을 기반으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학교를 통해) 많이 접할 수 있었답니다.
Q. 과정을 견디는 것이라… 저에게도 와닿네요. 실제로 수업에서는 어떤 걸 배우셨나요?
창의성이란 무엇인지, 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가 돌아가는 산업에 대해 배웠어요. 특히 아이디어(예술)을 비즈니스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나누었지요.
수업 방식도 참 기억에 많이 남아요.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것보다도 역할극에 하거나 서로 악수, 포옹을 하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는 식이었어요. 혹은 1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직접 돈을 벌어온 후 매출과 그 과정에 대해 정리하는 수업도 있었어요. ‘부딪치면 된다’는 걸 배우는 시간들이었어요.
Q. 입학이 있다면 졸업이 있죠. 영국에서 맞이하신 졸업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졸업 논문을 쓰면 진짜 많은 걸 배웠어요. 그때 ‘공간이 어떻게 예술가의 창의성에 영향을 미치는가’(How Space Affects Artist's Creative Process)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요. 인터뷰한 뮤지션들을 통해 씬의 성장에 있어 '살롱 바다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신인 아티스트들이 꾸준히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거나, 뒤풀이에서 자연스럽게 아티스트와 관객이 어우러질 수 있게 하거나,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등 공간을 구심점으로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창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때부터 막연하게 ‘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참고 : 홍대 대표 클럽 '살롱 바다비'는 왜 문을 닫았을까)
Q. 그 꿈이 지금의 무릉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로 공간 창업을 하진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일단 취업 준비를 했어요. 이제는 돈을 벌어 가족들의 지원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스포티파이, 넷플릭스 같은 해외 기업부터 국내 기업들까지 폭넓게 지원하면서 대영박물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러다가) 마침 한국에서 전시 공간 기획을 할 수 있는 회사에 합격이 돼서 빠르게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급하게 한 결정이었어요. 비자가 만료되어 한국으로 돌아오며 거의 입국과 동시에 지원한 전시 공간에 들어간 것이었죠. 얼른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 면접에서 떨어진 건들이 늘어나니 불안해서 한국에서 합격이 결정되자마자 바로 입사를 정했던 것 같아요.
첫 회사 생활은 솔직히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5년 가까이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권에 살다가 한국 조직 문화에 나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피드백이 없고, (막연하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눈치껏 행동하며 ‘내 것’을 늘려가야 하는, 그런 유연함이 제게도 부족했던 시점이었고요.
Q. 고난의 사회생활이네요.
처음에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괜찮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3개월쯤 지나나니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어요. 맡은 일을 꾸준히 해서 사업을 키웠음에도 회사에서 인정 받지 못하니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어느 날 실장 님이 저를 부르더니 ‘그만두라’고 하시더라고요. 명확한 이유가 없었어요.
결국 사무실에서 얼른 나와서 펑펑 울며 소리를 질렀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온몸에서 열꽃이 피어서 두드러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 퍼졌어요. 내 몸이 나를 공격한 거예요. 아무리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도 열꽃이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요가와 명상을 시작하게 됐어요.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붙잡을 무언가 필요했어요.
Q. 듣기만 해도 답답하네요. 이후에는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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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끝에 커리어를 재정립하고
스튜디오 창업에 좌충우돌 하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성장하는
시현 님의 성장스토리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