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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Oct 16. 2024

행정학과 학생이 스타트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20년 넘게 살던 고향 떠나 기꺼이 방황할 수 있었던 '선택의 순간들'

[아티클 한 눈에 읽기]  

꿈도, 목표도 없던 나를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

행정학과 대학생이 ‘창업’을 선택한 계기와 과정

“집 없이 소파에서  자도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서울서 3잡 뛰고 공부하면서 책 저자가 되기까지

“제가 가려는 방향에 1도라도 가까운 게 중요하죠.”

아웃트로 : 결핍은 방향이 되고, 어려움은 배움이 된다





며칠 전부터 제 화면에는 영상 하나가 자주 보였습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예고편이었죠.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실사화한 작품이었습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댓글창을 열었습니다. 한국이 자신과 맞지 않아서 뉴질랜드로 떠난 주인공의 이야기를 두고 누군가 분명 “ㅇㅇ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핀잔을 주지 않았을까, 내심 짐작했습니다. 


허나 댓글창은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가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댓글과 함께 한국을 떠난 각지의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난 이후, 힘겨운 이민 생활, 그럼에도 자기 삶을 변화시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생긴지 어언 10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30년 가까이 한 동네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던 저에겐 참 고무적인 변화입니다.   



출처 : 스텔러스 다이어리



가족을,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없다지만 


이후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능동적인 선택이든, 수동적인 받아들임이든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각자의 ‘방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설령 무언가 싫어서 한 선택이라도 그것은 방향을 설정하는 의사결정의 과정에 포함됩니다. 강력한 ‘동인’(움직임의 이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본인이 익숙한 곳, 능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결정은 어떨까요? 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관성과 타성은 은근 힘이 세거든요. 동인이 더 세지지 않고선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근 10년간 그 용기를 내어 한국을 떠난 사람이 늘어난 까닭에 이제는 그 용기의 의미를,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늘어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렇게 큰 용기를 내 살아온 사람입니다. 용기를 내 고향을 벗어나 서울로 갔고, 용기를 내 전혀 상상하지 못 했던 삶의 궤적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본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출처 : 김중철



EO라는 미디어 회사에서 교육 사업을 총괄하는 중철 님은 불과 10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어른으로 성장한 케이스입니다. 행정학과에 입학했지만 벤처 창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3잡도 불사했습니다. 자신이 5년 뒤, 10년 뒤에도 가슴 뛰며 설레는 ‘방향’을 찾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큰 동인, 큰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움직였을까요?
그는 어떤 의사결정을 거쳐서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았을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서 큰 용기를 낸 중철 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삶의 변곡점과 의사결정을 고민하는 독자님들께도 큰 영감과 용기,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 글은 2024년 9월 5일에 발행된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전체 뉴스레터를 보시려면 옆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뉴스레터 보러 가기]  




꿈도, 목표도 없던 나를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
 

Q. 중철님,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EO라는 회사에서 교육 사업 및 이오플래닛이라는 플랫폼을 총괄하는 김중철입니다. 스스로 ‘스타트업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Q. 본인을 따로 정의하셨다니 흥미롭네요. 왜 그렇게 정의하셨을까요?


스타트업 생태계가 좋고, 이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창업이나 스타트업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그걸 쉽게 알리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제가 맡은 사업이나 만드는 제품(프로덕트)이 제가 좋아하는 이 방향성에 잘 맞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 이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Q. 원래부터 ‘스타트업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셨나요? 


아니요. 저는 김해 주촌이라는 곳에서 나고 자랐어요. 마당을 중심으로 한 디귿자 모양의 집에서 두 가구가 같이 사는, 그런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저한테 ‘공부하라’고 권하는 어른들이 주변에 없었어요. 제 친척까지 통틀어서 제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었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크게 고민하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Q. 지금과는 사뭇 다르셨으리라 짐작이 가네요. 


그쵸. 애초에 대학 진학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적당히 성적에 맞춰 결정했어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 그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도 몰랐고요. 행정학과에 입학했으니 주변에서 공무원 준비를 많이 했고, 아마도 내 미래도 그렇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군대 다녀와서 학회장을 맡으면서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사실상 그 전까지는 ‘제 삶에 자발적인 배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중철 님, 출처 : 김중철



Q. 흘러가듯 살아왔던 셈이네요. 그렇다면 변화의 계기가 있었을 듯합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한 특강을 들으면서 찾아왔어요. 


학기 중에 300명이 모이는, 무조건 들어야 하는 특강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연사분이 오신다는 것만 전해 듣곤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특강 연사로는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독특한 직함을 가진 이준용 대표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분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가슴 뛴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당시 대표님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익혀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직접 만들었다고 설명해주셨어요. 그 직함을 명함에 새겨서 수백억 대 계약을 수주하고 세일즈를 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죠. 본인 직업을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접했던 순간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특강 때 저도 모르게 손을 들고 질문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물어봤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이 설렜거든요. 마침 부산에서 프레젠테이션 관련 교육을 진행하신다고 알려주셔서, 그때부터 격주로 부산에 가서 PPT 만드는 법, 발표하는 법을 배웠어요. 

제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발적으로 제가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일이었어요. 스스로 ‘나는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가 될 거야’라는 꿈도 생겼고요. 


나중에는 부산 교육이 모두 종료되고 서울에서만 교육이 이뤄졌는데, 덩달아 저도 직접 서울까지 찾아가서 교육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만큼 배움이 즐거웠고, 무언가 해보고 싶어졌던 큰 변화였습니다.  



Q. 와… 인생이 달라지는 전환점이었네요. 김해에서 부산을 거쳐 서울까지, 공간을 넘나들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서울에 제 발로 찾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너무 작은 세상에서 살았구나’였어요. 서울에 오니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 손만 뻗으면 되더라고요. 그만큼 기회가 많은 공간을 처음 경험하면서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김해에서 부산으로, 서울로 활동 무대를 확장하면서) 이제 막 24살이 되는 시점에 시야가 트이고 나름대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행정학과 대학생이 ‘창업’을 선택한 계기와 과정 



Q. 이후 코파운더로 초기에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어요. 이 또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 줄 알다 보니 대학 내 마케팅 동아리에서 주로 활동했어요. 거기 외에는 프레젠테이션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동아리에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형을 만나 처음으로 ‘창업’이 무엇인지 접할 수 있었어요. 


(지금 보기엔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 형은 ‘우주정거장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우리가 우주정거장을 만들어 저 멀리 우주로 진출하는 꿈을 꿔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봤는데,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완전히 새로운 직업에 대해 접했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주변에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 보니 저에겐 희소한 경험이었고, 그때부터 나름대로 우주로 향하기 위해 우리가 세부적으로, 단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Q. 우주정거장…!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단계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당시에 생각하셨나요? 


곧바로 우주정거장을 만들겠다고 나설 수는 없으니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축적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러기 위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창업 아이템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차차 사업이 전개됐죠. 


벤처나 스타트업이 뭔지, 창업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2년 가량 여기에 올인했어요. 대학 내 창업 지원 공간에서 거의 먹고 살다시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부모님 입장에서는 걱정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 집에서는 ‘그거 꼭 해야 하느냐’고 (어찌보면 처음으로) 압박이 들어왔어요. 공부를 안 하니 학점은 영 시원찮게 나오고, 외박을 불사하고 돈을 써가면서 창업에 매달렸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제 나름대로 협상(?!)을 했어요.


‘학교 공부를 하면서 창업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대학생 시절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실제로 그렇게 엄포를 놓고나서 학교 공부에도 매진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학점 4.3으로 같은 학년에서 전체 3등이 됐어요. 소액 장학금도 받게 됐고. 덕분에 부모님께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한다면 할 수 있는 아들이니 믿고 맡겨달라.’

한 번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얻으니 그 이후로는 좀 더 창업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이후 4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창업에 올인했답니다.  



Q. 유독 창업에 매료되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때까지 누구도 ‘방향’을 제시해준 적이 없었어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처음으로 제게 방향을 제시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던 것 같아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롤모델을 발견했던 것처럼 ‘자아실현’을 하는 방식으로서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길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창업이 저에겐 가슴 뛰는 일이었어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나라는 사람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저에게 설렘을 준) 누군가의 삶을 추종해보면 어떨까 했어요. 그러한 ‘방향’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귀인이니까요. 그렇게 환경과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키면서 실제로 제 삶도 진짜로 많이 변화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집 없이 소파에서 자도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Q. 이십대에 삶을 바꾸는 변곡점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셨나요? 


간절하게 일했어요. 대표 역할을 맡은 형과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일 얘기 밖에 안 했어요. 다행히 사업이 잘 풀리면서 사업 확장의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서울에 가는 게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형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았을 듯해요. 아무래도 팀 전체를 이끌고 서울에 자리잡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제가 나서서 ‘서울에 가야 할 타이밍’이라고 설득했어요. 제 눈에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으니까요. 꼭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Q. 당시에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간략하게 설명해드리자면 ‘와이파이에 광고를 얹는 비즈니스’였어요. 와이파이에 펌웨어를 얹는 기술을 개발해서 사람들이 와이파이에 접속하면 첫 웹페이지에 광고가 뜨게끔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어요.  



Q. 스타벅스 와이파이에 접속하면 스타벅스 페이지가 뜨는 것과 비슷하군요.


맞아요. 다만 스타벅스의 경우 자기 채널로만 접속자를 유입시킬 수 있다면 당시 저희 서비스는 슬라이드, 동영상 광고 등을 다양하게 배치해서 와이파이에 접속한 사람들이 각 광고를 클릭해 다양하게 유입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할리스 직영점 전반에 서비스를 공급할 정도로 사업 자체는 번창했습니다.  



코파운더로 초기 창업 팀에 합류했던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Q. 서울살이는 어떠셨나요?


그때 저랑 형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서울로 향했어요. 처음에는 집이 없었고, 그나마 고객사에서 책상 2개와 소파를 빌려줬어요. 거기에 회사 짐을 모두 옮기고서 소파에서 자면서 사업을 이어갔어요. 그러면서 서울 거처를 알아봤어요. 


일주일쯤 그렇게 지내니까 고객사에서 나중에는 면세점 내 호텔을 숙소로 제공해주셨어요. 덕분에 호텔에서 1달 가량 머물다가 서울 집을 구했어요. 본격적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죠.   



Q. 꽤 오래 거처가 없었네요. 사업이 잘 되는 것과 별개로 막막함도 컸을 듯합니다. 


의외로 그때는 저희 나름대로 희망이 넘치고 되게 행복했어요. 조그마한 세상에서 살다가 서울이라는 큰 세상으로 왔다는 자체가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제가 살고 싶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어떻게든) 치열한 과정에 저를 던져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Q. 내 삶에 방향성이 생겼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철 님께 크나큰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창업을 그만두게 됐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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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잡으로 버티던 이야기,
마케터, 제품 기획을 배우던 과정,
맨땅에 헤딩해 커리어를 만들었던 
중철 님의 성장스토리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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