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보고 (스포 다분)
가난과 가정폭력 그리고 마약중독자인 엄마, 배브. 밴스는 예일대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있다. 중요한 면접을 앞둔 기간에 누나 리지로부터 온 전화는 그를 10시간을 운전해 고향으로 갈 수밖에 없게 한다. 그의 고향은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의 몰락한 공업지대, 러스트 벨트 지역. 영화의 제목인 '힐빌리(hillbilly)'는 미국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사는 가난한 백인들을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말이다. 그렇다, 그는 힐빌리다. 미국의 가난한 백인으로 마약 중독자인 엄마 때문에 폭력과 가난 속에 자라며, 결국은 할머니 손에 키워져 자수성가한 실제 인물이다. 영화는 지난해 11월 넷플릭스에 공개됐으며, 실화인 베스트셀러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 엄마가 다시 약을 손을 댄 것이다. 그것도 악마 같은 헤로인에. 엄마로 인해 삶이 순탄치 않았던 밴스는 이러한 삶의 굴레가 지긋지긋하지만 벗어날 방도가 없다. 옆에서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면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엄마를 돌보고 있는 누나를 보면 그저 외면하기란 쉽지가 않다.
용서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어.
엄마를 이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밴스에게 누나가 던지는 묵직한 한 마디. 아 용서? 그건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데? 싶지만, 본인만큼이나 혹은 본인보다 더 엄마에게 시달리던 누나가 그런 말을 하니 입을 다물게 되는 밴스. 용서하면 진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과거를 회상하면 언제나 성숙하게 밴스 곁을 지키던 누나도 있지만, 그 옆에서 항상 누나와 자신을 보호해주던 할머니가 있다. 정부의 지원 식량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밴스를 그의 어머니, 배브로부터 분리해 양육하며 본인의 남은 삶을 바쳤던 할머니. 결국 서로를 위해 살아가던 가족 모두. 엄마도 가족. 결코 쉽게 포기가 안 되는 웬수같은 가족. 뿌리치고 싶어도 쉽게 뿌리칠 수 없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돌아온 날도 사달이 난다. 엄마는 밴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화장실에서 몰래 다시 약을 하려다가 밴스에게 발각되어 시도 불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로의 마음에 또 한 번의 금이 더 간다. 내일 있을 중요한 면접을 위해 어서 떠나야만 하는 밴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순간. 엄마는 밴스의 속도 모른 채, 울먹거리며 그에게 손을 뻗어 내민다. 나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가지 말아 달라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고민하던 그는 끝내 그녀의 손을 잡는다.
마지막 순간의 밴스는 성인 같았다. 속으로 잡지 말고 도망가라고, 이런 엄마는 떨쳐버리고 너의 삶을 살라고, 스크린 안의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외침을 보냈지만, 그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뒤이어 그가 덧붙인 말들도 마음에 콕 박혔다. 엄마가 나아졌으면 좋겠어.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포기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가야만 해 엄마. 그렇게 그는 누나에게 엄마를 부탁한 후, 다시 10시간의 여정을 떠난다. 그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자기의 삶을 위해 갈 길을 떠났다는 것. 가족이 물려준 것은 물려준 것이지만, 나는 나의 삶을 꿋꿋이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것이 맘 안에 깊숙이 남았다. 더 이상 받은 정서적 유산을 탓하지 않고, 껴안고 보듬으며 가자. 허나 그것에 잠식되지는 말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자, 하는 다짐들이.
그가 그저 혐오로 끝날 수 있던 굴레를 끊어냈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엄마 배브 또한 아버지의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피해자였다. 끔찍한 폭력의 순간들은 스스로의 존재와 주변의 가족 모두를 다 혐오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고스란히 딸 리지와 아들 밴스에게 전해졌고, 혐오의 삶이 반복될 수 있는 충분한 고리가 연결되었다. 하지만 리지와 밴스는 그 고리를 끊어냈다. 아니다. 엄마 배브의 혐오의 근원에서 평생을 자책하며 살았을 할머니의 울타리 덕에 그들이 비로소 끊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혐오를 멈추는 일은 사랑만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이제껏 낳은 혐오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저런 것들이 스치지만, 부끄러워도 과거의 일을 되돌릴 수 없음을. 그저 앞으로 마주하는 것들에 부디 더 사랑을 듬뿍 섞어 안아보도록 노력할 것. 노력하지만 나는 나의 삶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 나아갈 것. 꼭 붙잡은 엄마의 손을 잠시 내려놓고 10시간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던 밴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