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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공원 Sep 25. 2018

SNS- 활자의 개막

그때 , 나는 내가 썼던 것일까?

파랑새의 개막


9년 전 140자의 기록이 세상에 떠돌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아무 말 대잔치'가 난무하는 그 글자들 중 선택받은 글자들은 랜선을 타고 이리저리 부풀고, 회차되며 SNS, 타임라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무개 , 아무개 씨 , 홍길동 씨. 희망한다면 배우 정유미, 더 희망한다면 유재석도 될 수 있는 그곳에서 눈먼 글들이 폭발하는 것들을 지켜보며 금세 빠져 들었다.

소희 말하는 '병맛' 콘텐츠의 원조는 이 파랑새 플랫폼에서 시작된 것 같다.

더 - 자극적으로

더 - 웃기게

기본 뽕 10단 게를 장착한 것 같은 글들은 다음날 아침 세상을 웃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중 한 눈먼 1인으로 성실한 140자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나를 발견하는 일은 손끝에 꽤나 큰 희열을 안겨 주었다. 직장에선 맛볼 수 없는 내가 쓴 글자의 부유는 꽤 매력적인 자극제였던 것이다. 카카오톡 메시지는 꺼두고 '투이타(트위터)' 생활에 빠졌다. 실시간 주고받는 너와나의 리트윗 정분으로 병과 병이 오가는 병맛 대잔치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주는 펀치라인이었다. 오죽하면 지인들이 트위터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었을까...


SNS를 열심히 한다는 것?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 또 다른 파란 페이스인 페이스북 플랫폼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닌 나의 일기장은 또 다른 내가 되어 부유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포스팅을 했던 것 같다. 본능이 닿는 한, 손가락 관절이 안녕한 한...

지인중 몇은 내 SNS 계정들을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들은 거의 비슷한 뉘앙스를 가졌던 것 같다. 요즘으로 치면...


"야! 너 비트코인 한다며!!"에 버금가는... 말이었다.

"야! 너 SNS인가 ? 그거 진짜 열심히 하더라 ㅋㅋ."


당시 병원 연구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독서에 막 눈이 트인 시기라서 뭐든 읽고 , 그냥 끄적이는 것이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내재된 관종인지 병맛인지 모를 끼를 발산할 곳이 없었던 것인가... 내가 그런 자아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적어도 우리 엄마는 나를 민소매도 못 입게 하며 화초로 키우고 싶어 했었고, (물론 말안들음 -_- ) 중고등 학교 땐 문예부에서 할머니의 정을 단감에 빗대어 표혔했던 그런 내가.....ㅎ

글에 병맛을 달게 될 줄은 몰랐다. 환경을 탓해본다 (OTL- 네! 옛날 언니예요 ^^)

가훈없는 집들의 단골가훈인 '차카게 살자' 는 늬양스의 여느 집처럼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다.

집에 자주 놀러 오던 친구들 왈 -

"야 니네 집은 왜 이렇게 소근소근 말하냐! 귓속말만 오가는 것 같아." 라고 하긴 했으나...



시크릿의 위력


시크릿 이란 책을 끝까지 읽진 않았다. 엎어진 프로젝트 중 <시크릿 까지>라는 주제의 책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20대 초반에 꾼다는 꿈이란 걸 서른을지나 현재까지도 주머니 속에 넣고 사는 사람이다. 다이어리 앞표지에 되고 싶은 모습의 한 문장을 써놓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활자는 곧 현재의 내가 되어 있는 경이로운 인생을 살았다. 타고난 재능보다 너무 많은 복을 쥐고 살았던 것 같아 감사하다.

'아산병원'이라고 쓰고는 그곳에 실습을 가게 되었고, ' 연구실'이라고 쓰고 산 해에는 정말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었다. 현재로 치면 직장 부적응자 수준으로... 떠나온 곳들이 몇 번 - 그렇게 정착하게 된 곳은 일만 열심히 하면 간섭하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는 임상시험연구실이었다. (전화 울렁증이 있다.)

정착이란 걸 하고 난 후부터는 올 것이 온다. ' 시집' 압박이 시작되어 선만 보고 다녔던 것 같다. 역시 흥미도 재미도 없었다. 그해에 다이어리 앞장엔' 작가가 된다'라고 쓰고 살았다.

주크 버거가 만들어준 곳에서 병맛을 시전 하고, 직장이 끝나면 책 쓰기 교실에서 '제대혈 업계의 000'이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출간이 될 수 없다는 최종선고를 받았다.

좌절은 없었다. '직장이 있으니까... 시집가면 된다고 다들 그러니까...'

시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저녁엔 심장에 뛰지 않는 남자와 밥을 먹고 , 아침이 되면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하고 주 3회 시집에 '노오오력'하는 일상에 임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쌓였던 걸까?. 시크릿에 결혼 이란걸 안써서 였던 걸까 ?

이상한 오빠들, 이상했던 남자, 너무 그리운 남자. 너무 그리운 사람.이야기를 제3의 자아가 SNS에 지어 쓰고, 그리워 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남자들, 그리운 남자. 이야기로 세상에 '작가'로 나오게 되었다.


계획한 인생, 그렇지 않은 인생.


나는 너무 막살았다. 사랑을 하면 그냥 사랑만 하면 되는 줄 아는 연애 애송이처럼 두둥실 - 부유했다. 돈의 성질을 모르고 , 맘껏 소비하며 연봉협상을 하듯 그렇게 산 것 같다. 이직이 필요 할땐, 이력서에 별짓을 다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작가 생활은 아니었으나 , 꽤나 많은 일들이 몰려왔었다. 제3의 나를 요청하는 일들을 안고 직장을 나왔다. 이후엔 더 막살았다.

며칠 전 트레바리에서 크리에이터 '태영'님께서 강의를 하셨다. 스타트업 인터뷰 내용의 유튜브를 운영, 책읽찌라 등의 콘텐츠를 스토리 텔링, 기획하신 분이다.

강의의 열기가 뜨거워 시침이 10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밤 10시가 가까워 짐에도 성실한 도시 생활자 들의 질문이 끊임 없었다.

" 어떻게 해서 그렇게 -

" 어떻게?!

" 그렇게 하면 정말-

으로 시작하는 '나도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염두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태영 님이 대답을 이어가셨다. 그중 한마디가 가슴에 꽂혀 인사동을 한참 걷다 집에 돌아왔다.


" 그때 , 그냥 어떻게든 그렇게 해야 해서 했어요."


이 대답을 공감하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 했던 상황, 배경, 그때의 눈빛과 본능은 누구도 재현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해야만 해서 사냥을 하듯 야생의 눈과 뇌가 돌아가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별짓을 다할 때, 그냥 그래야만 해서 그랬던 것 같은 때가 있다.

이직 할 땐, 회사를 오래도록 관찰하고, 별짓을 다해 마침내 그곳에 앉아있는 내가 너무 신기했다. 적성이고 뭐고, 모르겠고 (우주파워 연봉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그것을 해냈던 것인가!)책을 내고 난 후에도 본능이 시키는 대로 제3의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제안서를 뿌리고 , 못하는 강의를 아무말 대잔치하고 , 내가 까발려져도 될 만한 공간을 찾아 본능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태영님께서 강의에서 말씀하신- 유튜브 하다 간장 (약타는것을 간장이라고 표현)을 넣게 되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는 그부분을 내인생에 행해 버렸던 것 같다. 까발려지기 싫은 곳까지 간장을 보냈고, 보기 좋게 통편집 되길 몇번 지속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광고가 되었는지 또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면 열리는구나... 하는 근자감을 이 때부터 갖고 살았으나, 계획과 지식의 밑천이 부족했다. 어쨋든 하고 싶은 일을하고, 신나게 사람들을 만나고 그토록 동경하던 작가님들을 거의 다 만나게 된 운이 넘치던 시기에 다시한번 감사한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나에게 자꾸 뭘 하자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가, 내가 쓸모가 있는가?, ... 에서는 역으로 피로와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점점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 글로 인한 제3의 나에게 집중하는 피로가 해일이 될 때쯤, SNS를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겠는 제3의 나에게....

그해 겨울, 부산으로 줄행랑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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