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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 Mar 27. 2023

이제야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은사님께

  논문 리비전을 위해 학교에 내려갔습니다. 시작한 걸 끝까지 마무리하기 위함이어서 연차를 내는 것도 그렇게 큰 고민은 아니었어요. 중간에 지갑을 잃어버리는 작은 해프닝이 있기는 했는데 그것만 빼면 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며 존경하는 제 단짝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 회사 소개도 할 겸 근황도 나누고, 본래 목표였던 실험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사실 잠깐 근교를 돌아다닐까도 했는데 사람들을 정신없이 만나며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아직은 학교에 저와 학부 시절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대학원에 많이 남아있어 그랬던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표정 좋아졌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저의 학위 심사 위원 중 한 분이셨던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교수님과는 학부생 시절 휴학을 하고 돌아와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연구참여를 할 때부터 학위과정 중 과제를 함께 해나가며 졸업할 때까지 꽤나 긴 기간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학위의 중간즈음이었던 과제 발표회 때 박사에 진학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능력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답변드리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자, 남들도 하는데 제가 왜 못하냐며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학위과정 중에 많이 움츠러든 것 같아 안쓰럽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학부 때 에너지와 열정이 많았던 모습을 보셨어서 그런 위로를 전해주셨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 학위 심사를 마친 순간과 학교를 떠나기 전 학위논문을 전달드렸을 때도 교수님은 격려를 전해주셨습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담백하게 또 한 분의 지도교수처럼 저를 지지해 주셨어요. 그리고 일 년 만에 찾아뵈었던 얼마 전의 순간에도 논문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아 보기 좋다는 감사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늘 너무 진지하다고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었는데 조금은 덜 진지해진 것 같다는 꽤나 반가운 말씀도 함께요. 근황을 공유드리며 작은 고민을 말씀드렸을 때는, 내가 얼마나 잘하려 애쓰고 실제로 잘하는지와 관계없이 어딜 가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각자의 방식에 맞게 살면 되는 거라는 조언도 전해주셨습니다. 지금처럼 살아가면 되겠구나. 그간 힘껏 고민해 오고 애써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와 가슴이 벅찼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에는 크게 개운하거나 즐겁지 않아 마음 한편이 계속 무거웠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그 짐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 눈앞에 닥친 것들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이곳이 나의 재능과 노력이 제대로 쓰일 수 있는 무대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서 회사라는 곳으로 전장을 옮기며 비로소 그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제야 제가 아니라 그 당시의 환경이 저에게 오답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은사님을 만나 뵈는 것을 끝으로 꽤나 길었던 고뇌와 아픔의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왔습니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여유로워진 제 모습을 마주하면서요. 그래서 마음이 참 크게 차오르는 일정이었습니다. 논문을 마무리하러 갔다가 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네요.


  아, 잃어버렸던 지갑은 다행히 다시 잘 찾았습니다.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았고, 저도 주변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아서 제자리를 찾아올 수 있었어요. 몇 년 전 여느 때보다 긍정이 넘쳤던 과거의 제 모습처럼요.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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