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약이다

2020.11.20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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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험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험을 통해 지금의 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든 것들이 그렇듯, 경험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선 즐거움, 행복, 성취에 대한 기준이 높아집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과자 한 봉지만 먹어도 행복했지만, 지금의 과자는 그때만큼의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기존의 경험이 반복되어 익숙해진 측면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겪은 다른 경험들이 더 큰 행복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 그때 내가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즐거움을 느낀다면, 기존에 내가 즐겁다고 생각했던 경험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즐겁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추구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단조로운 일상에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새로운 경험 그 자체에 중독되는 거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끝없이 욕망하며 새로움을 갈구하는 존재라서, 어느 순간 과거의 새로운 경험은 단조로운 일상에 스며듭니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익숙한 경험이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내가 굉장히 편하고 익숙한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큰 데,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나가야만 합니다. '나는 더 행복할 수 있는데', '나는 더 즐거울 수 있는데'라는 끝없는 공허를 떠올리면서요.


실제로 제가 그랬거든요. 대학에 입학한 이후 정말 다양한 경험들을 추구했고, 그중 제가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딱 한 가지를 뚜렷하게 찾았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그저 경험 자체가 좋았던 거고, 무의식적으로 더 새롭고 더 자극적인 경험들을 계속 좇고 있더라고요. 이전의 경험들이 만들어 온 나 자신을 돌아보고 온전히 이해하기 전에 새로운 경험들만을 계속해서 들이붓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순간에 시공간과 물질적인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다가온다는 것을 직감하자 저 스스로가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일종의 금단증상이 온 거죠. 새로운 경험을 할 기운도 능력도 없는데, 그것들이 빠져나간 평범한 일상은 저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습니다. 우울감과 무력감이 몰려와 엄청나게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괜찮아졌지만요. 어쩌면 그 당시에 제가 겪었던 경험의 부작용은 새로운 경험을 저 스스로의 환경과 성향에 맞게 잘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는 것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아는 것도 경험이니까요. 경험을 한 사람의 세상을 넓혀주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끔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도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나일 수 있도록,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쌓아 온 나라는 사람의 가치와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만 시야가 옮겨 가는 것이 아니라 넓어질 수 있고, 그래야만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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