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깎아내리는 감정 트라우마

2020.11.26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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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민하기도 해서 주변의 평가에, 설령 그것이 공격의 의도가 없는 객관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쉽게 깎아내립니다. '이런 게 나의 단점이야', '나는 잘못했어',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등등으로 말이죠.


제 자신을 갉아먹는 이러한 습관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를 되짚어보면 중학교때부터였었던 거 같습니다. 신체적·감정적으로 폭력적인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본능적으로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 사건들의 시발점은 저의 행동들이었으니까요. 당연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났으면 안 됐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공포는 저라는 사람에게 깊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 나를 깎아내린다'라는 사고의 흐름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꼈으니 나를 깎아내려 스스로를 긴장하게 만들어 빠르게 바꾸지 않는 이상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 이후로 제가 극도로 조심하기 시작하고 다들 머리가 조금씩 커 가면서 저에게 신체적·감정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부정적인 표현들이나 상황들을 마주하면 그것이 실제 저를 공격할 의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크게 움츠러들게 되었습니다. 과거처럼 실제 제 생존을 위협하는 것과 같은 진짜 위협이 아닌 데도 위협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죠. 저의 감정적 트라우마는 이러했습니다.


최근까지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감정적인 위로였어요. '내 잘못이 아니다', '난 그런 측면보다 장점이 많다' 등 나는 사실 괜찮고 좋은 사람이고 즐거울 수 있다는 방향의 생각이었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 대신 좋은 감정을 느끼려는 시도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상담센터를 다니기도 하면서 반복해서 이러한 생각들을 접하자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에는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상황들에는 그럭저럭 잘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나는 장점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이 자기 합리화 같은 거예요. 특히나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로는 저의 부족함을 냉철하게 피드백받게 되는데, 크게 악의가 없음에도 그것을 증폭시켜 저 스스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지는 거죠.


저는 공부를 할 때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성격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집중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특정 수준 이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집요하게 부족함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자체가 저한테는 힘들었던 겁니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만큼 힘들진 않아도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무의식 중에 공포로 바뀌어 더 깊게 들어가고 있는 것을 막고 있던 거였죠.


학위과정에서의 피드백이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겪는 무지함 같은 제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저라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판단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었는데,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해 느낀 부정적인 감정이 항상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행위가 되었던 겁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감정을 느끼려고 하는 위로의 단계에서 벗어나 감정 자체를 밖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판단 자체를 하지 않음으로써 지금 느낀 부정적인 감정을 나 자신에 대한 판단과 분리하는 겁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기에 만약 화가 난다면 '아 나는 지금 화가 나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해야지, '나는 화를 내니까 나쁘고 부족한 사람이야. 어떻게 해야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화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정말 더 나은 사람일까요? 더 나은 사람이라는 판단은 결국 나 자신이 하는 것 아닌가요? 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깎아내려 새로운 모습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아껴 주는 방법 아닐까요?


감정을 무디게 만들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저처럼 감정적인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여러 감정을 폭넓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기에 현상이 표현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그리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오해하지 않고 느낄 수 있으려면 내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부정적인 현상을 접한다 →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나를 깎아내린다'의 사이클에서 '나를 깎아내린다'는 부분을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동안 제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왔던 것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제 자신을 깎아 내려왔을 필요도 없었죠. 단지 트라우마로 인해 새겨진 공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과 저에 대한 판단을 이어왔을 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끊어내고 싶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또다시 저라는 사람을 깎아내리려 할 때, 잠시 멈추고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 지독하게 저를 괴롭혔던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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