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m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소설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했던
<빨강 머리 앤>을 언젠가 드라마로 한 편 봤다.
1900년대 초반 캐나다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한 편을 본 느낌은
따뜻하고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드라마가 펼쳐지는 목가적인 마을 분위기도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참으로 품위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최근 쏟아지는 드라마며 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신선함과 그 속에 스민 온기에
그래 드라마가 원래 이래야지 싶었다.
병원에서 무료함을 잊으려 집어든 <빨강 머리 앤>.
보통 책의 절반 사이즈로 나와 읽기에 편했다.
드라마와는 또 다른 감동과 품격.
<빨강 머리 앤>은 읽는 내내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매튜와 마릴라 남매가 집안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구했는데 주선자의 착오로 잘못 오게 된 앤.
예상치 못한 앤과의 동행에서 앤의 밝은 에너지와
재잘거림에 귀여움과 애정을 느낀 매튜.
그런 매튜를 못마땅해하며
직접 앤을 데려다주러 가던 마릴라.
마릴라는 그러나 앤을 데려가려는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비참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고 ‘가까스로 풀려난 덫에 또다시 붙잡히고 만 힘없는 작은 동물 같은 모습’의 앤을 구출했다.
그렇게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됐다.
<빨강 머리 앤>의 큰 미덕은 단연 앤의 캐릭터에 있다.
앤은 어리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넘치며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숨기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먹을 수가 없어요.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어요. 아주머니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음식이 넘어가세요?”
”아, 희망 하나가 또 사라졌네요. 제 인생은 그야말로 희망이 묻힌 묘지예요 “
기쁜 일에 마음을 다해 기뻐하고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극복할 줄 아는 앤의 대사를 읽고 있노라면 나조차 그 재잘거림을 계속 듣고 싶은 입장이 된다.
펄펄 살아있는 깜찍한 캐릭터는 마릴리와 매튜의 삶에
또 다른 긴장감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마릴라와 매튜의 사람과 삶에 대한 태도도 인상 깊다.
“하지만 저 애는 정말 예쁘고 좋은 애야. 마릴라. 저렇게 여기에 있고 싶어 하는 애를 돌려보낸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 아니냐?”
마릴라를 존중하면서도 앤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매튜는 그렇게 계속 앤의 든든한 큰 기둥이 되어주었다.
‘가늘고 작은 손이 자신의 손에 닿자 마릴라는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이 가슴속에 고요히 일어났다. 아마 그것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모성애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마음을 녹이는 듯한 그 감미로운 감정에 마릴라는 심란해졌다. ’
이 대목은 내가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또 메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의 말랑한 버전 같은 느낌도 든다.
따뜻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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