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는 뜻밖의 사실들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인형에 아직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인형을 좋아하지만 중년만 돼도 인형을 꺼려하는 사람이 많다. 왠지 무섭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인형 문화는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짚으로 만든 인형 몇 가지가 풍습으로 전할 뿐, 인형과 관련된 풍습이 많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인형 문화가 아주 발달한 것에 비하면 두 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한국에서의 인형 문화가 특히 발달하지 않은 점은 언젠가 다시 살펴보고 싶은 대목이다.
또 다른 사실은, 어르신들 중에 인형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다는 점이다.
개인적 추론이지만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인 듯하다. 알록달록한 세계의 인형을 보며 예쁘다고 한참 바라보시는 분이 의외로 많다.
박물관에서 어르신들이 계시는 요양원으로 마트료시카 인형 체험 진행을 위해 몇 번 간 적이 있다.
어르신들이 섬세하게 만들기 힘드니 얼굴은 미리 다 색칠을 하고 마트료시카의 디자인도 색칠하기 쉽도록 간단하게 칠했다.
사실 처음 어르신들과 마트료시카 체험을 할 때는 우려스럽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잘 하실 수 있을까?''잘 하진 못하더라도 좋아하시긴 할까?''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까?'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기우였다. 어르신들은 의외로 이 마트료시카를 무척 좋아하셨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르신들은 평균 연령이 높다. 70대는 젊으신 편이고 80대, 90대도 많다.
붓질이 생각대로 안돼 속상해하시는 어르신도 있었지만 물감을 칠하면서 색이 이쁘다고 인형을 두고두고 바라만 보시기도 했다.
"이 인형 내가 가지고 가는 거야?"라고 재차 물어보시며 "그렇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소녀처럼 좋아하기도 하셨다. 어떤 어르신은 "내가 만든 거 이거야, 꼭 갖다 줘야 해."라며 강조하셨다.
알록달록 색을 칠해 예뻐진 인형이 좋으신 것 같았다.
한 요양원에서 만난 어르신은 색을 예쁘게 골라 쓰셨다. "너무 예뻐요, 어르신!"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옷 짓는 일을 했거든."라고 하신다. 그리곤 이내 속상하신 듯 "근데 손이 영 말을 안 들어 밉게 됐어."라고 덧붙이신다. 우리 눈엔 예쁜데 더 예쁜 인형을 원하시는 듯했다.
또 다른 어르신은 눈에 보이게 행복한 표정으로 붓질을 하셨다. "예뻐요! 잘 그리셨는데요?"라고 말씀드리니 "진짜? 내가 어릴 때 꿈이 화가였어. 집이 가난해 될 수가 없었지." 사람에게 꿈이란 게 뭘까. 어르신은 이렇게 화가와 비슷한 체험 만으로도 이미 다 꿈을 이룬 듯한 표정이셨다.
한 어르신은 물감을 칠할 생각은 않으시곤 종이 팔레트에 짜 놓은 물감만 한참 바라보셨다. "왜 칠 안 하세요?"라고 여쭤봤더니 "응? 색이 너무 고와서.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고와서."라고 하신다.
나는 박물관에서 어르신들을 이렇게 만난 것을 계기로 올해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진행하는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 <어르신은 인형작가!>라는 이름으로 신청해서 선정되기도 했다.
참여자를 어떻게 모집할까 막막하던 때 전화가 왔다.
"프로그램 신청할게요. 나이가 좀 많은데..."
"어떻게 되시는데요?"
"78!"
"많으신 것 아니에요. 아흔 되시는 분들도 인형 만드신 걸요~"
"내가 (이런 걸) 좋아해. 동화구연도하고 있고...ㅎㅎㅎ"
연세가 일흔여덟이라는 수화기 너머 어르신의 목소리는 나보다 젊고 통통 날아오를 듯이 가벼웠다.
"지금 신청해도 돼요?""네, 어르신!"
"내가 꼭 하고 싶어요~."
이번엔 수줍은 소녀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30여 명의 어르신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박물관에 오셔서 다양한 종류의 인형을 만들고 나중에는 작가 수준으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도 하고 작품 판매도 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처음 신청해 주신 분은 유진경 어르신.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고 계신다.
이건 무슨 운명인가 싶었던 건, 이 프로그램 1호 신청자 어르신의 성함이 우리 박물관을 운영하는 두 사람(유 ** + * 진경)의 이름을 합친 셈이었기 때문이다.
유진경 어르신이 또 다른 어르신에게 알리고 그렇게 우리 프로그램은 알음알음 원래 계획대로 30여 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어르신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우리 주변에 멋쟁이 어르신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어느 어르신은 동화 구연을 수년 째 하고 계시고 또 어느 어르신은 이야기 할머니 교육을 받아 유치원 등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다. 오카리나를 배우는 분도 있고 생태해설가로 다년간 활동하신 분도 있다.
첫 만남을 갖기 전, 박물관이 궁금해서 찾아오신 열혈 어르신들도 있다.
이제 곧 50대의 문턱을 넘을 나보다 에너지 넘치고 목소리가 좋았다.
사실, 어르신들이 찾아오셨을 때 그 에너지로는 내가 어르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사느라 바빠 내가 나이가 든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가도
어느 날 문득 흰머리 하나 생기고
또 어느 날 문득 안경을 벗어서야 가까운 사물을 보는 게 편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끔씩 다리가 저려오고 허리도 살그머니 아파온다.
나이의 좌절에 갇히려면 40대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이 같은 것, 나이가 주는 좌절 같은 것 알 바 아니라는 듯
소녀처럼 웃고 20대나 30대처럼 활동적이면서도
지혜롭고 고운 어르신들을 만나면 뭐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어르신들과 함께 하면서 어르신들의 열정과 따뜻함에 감동했다.
인형을 예쁘게 더 예쁘게 만들려는 노력도 대단하셨다.
어르신들은 아이만큼이나 인형을, 세상의 예쁜 것들을 좋아하신다.
이렇게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기 전까지는 몰랐었다.
#브런치북 #박물관의하루 #인생2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