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이 애니에게

다른 작품 속 인물과의 만남 1

by 연구하는 실천가

보고 싶은 애니.

너의 편지 잘 받았어.

나도 나와 이름이 비슷했던 네가 기억나. 그때 넌 윤기 나는 까만 머리와 새하얀 얼굴, 커다란 눈동자가 예쁜 아이였지. 너와 친했던 캔디도 기억나는구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귀여웠고, 나처럼 까만 주근깨가 콧잔등에 가득했었지. 우리 셋은 친했지만 혼자 사색하는 걸 더 좋아했던 나와 달리 너희 둘은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이었지.

애니, 네가 멋진 양복과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저씨, 아주머니를 따라 포니의 집을 떠난 후 얼마 있다 나도 매슈 아저씨와 메를린 아주머니 댁으로 오게 되었어. 네가 매슈 아저씨 댁 주소를 알아내서 이렇게 편지까지 보내다니 정말 놀랍고 반가워.


처음에 여기에 왔을 땐 내가 버릇없고 말이 너무 많다고 메를린 아주머니가 혼내셔서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점차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해주고 좋아해 주셔서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어. 너는 멋진 집에서 좋은 부모님을 만나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이런 고민을 나에게 편지로 써 보낼 줄은 정말 몰랐어.


너의 양부모님이 네가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을 숨겨야 한다고 말하고, 캔디와 연락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 정말 너를 사랑하신다면 너의 소중한 친구를 잃게 하지 말았어야 하니까. 하지만 너는 어쩔 수 없었을거야. 너를 돌봐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양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친구를 잃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너의 모습을 거짓으로 꾸며야 하는 일일거야.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상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끔찍한 상상이야.

애니, 너는 그것을 어떻게 견뎠니? 너의 가문과 너의 겉모습만 좋아하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을 것 같아. 그들에게 캔디처럼 당당하지 못했던 너 자신이 정말 싫고 부끄러웠다고 했지?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아무 노력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로 사람들을 구별하고 캔디를 함부로 대한 그들의 잘못이지.


애니.

넌 참 수줍음 많고 따뜻한 아이였지. 내가 엉뚱한 이야기로 수녀님의 꾸중을 들을 때에도 넌 맑은 얼굴로 수녀님께 이렇게 말해 주었어.

" 수녀님, 앤 머리속에는 별처럼 신기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 들었나 봐요."

너는 너의 수줍은 성격과 우유부단함이 싫다고 편지에 썼지. 그리고 나의 당당함과 용감함이 부럽다고 했지.

그런데 애니야, 나는 너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아름답고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를 내가 '애니 프린세스'라고 불렀던 것 기억하니? 나도 너처럼 예쁘고 얌전해서 친구들과 수녀님께 칭찬받고 싶었던 적이 많았어.

나는 나의 깡마른 다리와 주근깨 얼굴, 빨간 머리카락이 너무 싫었어. 메를린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내가 못 생겨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어. 그때 나는 나를 정말 사랑하지 못했어. 아무리 멋지고 예쁜 것을 상상해도 내가 못 생겼다는 사실은 벗어날 수 없었거든. 그래서 린드 아주머니가 못 생겼다고 말하거나 길버트가 '홍당무'라고 부른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나도 그때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바보 같다고 생각해. 너는 사람들이 예쁘지 않고 고아인 캔디를 좋아하는 것이 부러우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 자신의 겉모습을 꾸미거나기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빛깔을 드러낸 캔디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아이였을 거야. 나도 이제 나의 겉모습에 신경쓰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게 되었어. 그래서 날 놀렸던 길버트와도 화해했지. 길버트는 날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그저 나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내 빨간머리에 대해 말만 꺼내도 화를 냈던거야.

물론 네가 캔디의 편에 서주지 않은 것은 친구로서 비겁했어. 하지만 너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괴로워했잖아. 그러니 자꾸 너의 모습을 감추거나 누군가와 비교하려 하지 마. 캔디의 당당함과 밝음은 햇살같이 빛나지만, 너의 부드러운 미소는 고요한 달빛처럼 네게 더욱 잘 어울려.


애니야, 그러니 너도 이제 캔디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길 바랄게. 너의 순수하고 부드러운 빛깔을 그대로 보여주면 돼. 그건 너만의 특별한 빛깔이야. 너의 빛깔로 너는 충분히 빛나고 있어.

캔디나 내가 가진 모습은 단지 캔디와 나의 빛깔일 뿐이야.


애니. 내가 하는 말이 네게 위로가 안 될지도 몰라. 사실 위로란 다른 누군가에게 듣는 게 아닌 거 같아.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질 때는 더욱 그래. 그럴 땐 누군가의 위로는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얼어붙게 하기도 하지. 그럴 땐 나 자신만이 온전히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거지.

네 자신에게 말해 주렴. 당당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나의 소중한 삶에 대해 미안했다고, 그땐 사실 어쩔 수 없었지만 조금은 어리석었다고. 다음엔 좀 더 당당하게 살아갈거라고.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참 수고 많았다고, 넌 잘 이겨냈다고.


애니.
너는 이제 너 자신을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 볼 거라고 했지? 그래, 그것이 네가 뭔가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나도 응원할게. 나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고 해. 메를린 아주머니를 돌보기 위해서 못했던 공부를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아주머니가 건강을 다시 찾으셨거든) 우리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어. 서로 다르지만 같기도 해.
'하느님은 천국에 있어, 세상은 공평하니까.' 라는 말처럼.
그래서 너의 부드러움과 나의 씩씩함은 서로 다르지 않아. 우린 각자의 빛깔로 앞을 향해 나아갈 거야.


애니, 너의 길에 당당한 별빛과 따뜻한 달빛 그리고 찬란한 햇살이 항상 함께 하길.

캔디에게도 안부 전해줘.


앤 셜리로부터.

.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